본문 바로가기


그대가 떠난 자리...아일린 앳킨스(85)와 조나단 프라이스(72)의 환상적 연기   

'태풍의 절정(The Height of the Storm)' ★★★★


HeightOfTheStorm0133r.jpg

The Height of the Storm, Samuel J. Friedman Theatre. Photo: Joan Marcus


1967년 정신과의사  토마스 홈즈와 리처드 라헤 박사가 '인생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사건 43(Holmes and Rahe stress scale)'을 연구한 결과 배우자의 사망이 1위로 밝혀졌다. 배우자와의 사별은 생의 가장 큰 충격이라는 것이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이들에게 가장 큰 화두는 건강이며, 배우자와 누가 먼저 떠날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하게 된다. 그리고, 사별 후엔 살아남은 이의 슬픔과 상처는 길게 계속된다. 상실의 시대다.  


2012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마이클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Amour)'는 음악교사를 은퇴한 파리의 부부의 이야기였다. 아내는 뇌졸중 수술 후 반신불수를 거쳐 치매에 이른다. 양로원을 거부하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려던 남편은 그들의 사랑을 시험하게 될 결단을 내린다.



IMG_1461.jpg


2018년 런던 웨스트엔드를 거쳐 올 가을 브로드웨이 사무엘 J. 프리드만 시어터에 상륙한 연극 '폭풍의 절정(The Height of the Storm)'은 마치 ' 아무르'의 연극 버전 속편같다. '아버지(The Father)' '어머니(The Mother)' '아들(The Son)' 등 가족을 중심으로 인간관계를 탐구해온 프랑스의 미니멀리스트 희곡작가 플로리앙 젤레(Florian Zeller)의 원작 'Avant de s’envolver(Before Flying Away)'을 영국 작가 크리스토퍼 햄튼(Christopher Hampton)의 번역으로 제목이 바뀌어 무대에 올려졌다.



HeightOfTheStorm0124r.jpg

The Height of the Storm, Samuel J. Friedman Theatre. Photo: Joan Marcus


파리 외곽의 큰 저택에 살고 있는 노부부, 소설가 앙드레(조나단 프라이스 분)와 마들렌느(아일린 앳킨스 분)는 두딸을 두고 50년간 행복하게 살아왔다. 어느날 이름 모를 이로부터 꽃다발이 배달된다. 괴퍅한 성미의 앙드레는 예전엔 육식광이었지만, 자애로운 아내 마들렌느가 만들어주는 버섯 요리를 즐기며 산다. 이들의 집에 남편과 별거에 임박한 큰 딸 앤(아만다 드류 분)과 매번 남자친구를 갈아치우는 작은 딸 엘리즈(리사 오헤어 분)이 방문한다. 


큰 딸은 아버지 사후 출판할 원고를 정리하다가 일기장을 보게되었다고 실토하고, 집을 어떤 식으로든 정리해야 한다고 독촉한다. 작은 딸은 파리의 부동산 중개사인 새 남자 친구를 데려온다. 아내는 장보러 갔다가 남편의 옛 친구라는 독일 젊은 여인(루시 코후 분)을 알게 되고 집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그녀는 모두들 모인 자리에서 조르쥬라는 출판사 남성과의 뜨거운 관계를 폭로한다. 조르쥬는 앙드레일까? 앙드레와 마들레느 중 누가 세상을 떠난 것일까?



HeightOfTheStorm0011r.jpg

The Height of the Storm, Samuel J. Friedman Theatre. Photo: Joan Marcus


작가 플로리앙 젤레는 50년간 금슬을 과시해왔던 노부부의 관계를 한 사람의 죽음을 계기로 도마에 올린다. 그리고,  앙드레의 비밀을 서서히 벗겨낸다. 작은 딸의 애인이 바닥에 떨어진 카드를 발견하며, 배달된 꽃이 장례식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된다. 앙드레와 마들레네 중 누군가 죽은 것이다. 하지만, 노부부와 두딸 등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관객은 어느 누구의 부재(不在)인지 혼돈에 빠진다. 앙드레에게 마들레네와의 삶은 이전과 다름 없이 지속된다. 그리고, 한 사랑의 종말에 이른 큰딸, 새 사랑을 시작하는 작은 딸의 삶도 '완벽한 사랑과 행복'을 찾는 여정이 될 것이다.


마지막 장면, 식탁에서 앙드레와 마들레네는 여전히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하지만, 조명은 마들레네를 암전으로 페이드아웃한다. 앙드레, 그는 아내의 죽음 후에도 여전히 그녀의 그림자와 살고 있었던 것이다. 상실의 충격, 죄책감, 분노, 고통,  슬픔과 절대 고독이 짙게 깔려있다. 



HeightOfTheStorm0014r.jpg

The Height of the Storm, Samuel J. Friedman Theatre. Photo: Joan Marcus


끊임없이 버섯을 벗기는 마들렌느, 비밀을 감추고 안절부절하는 앙드레, 이들의 사랑이란 얼마나 진실될까? 완벽한 결혼이란 존재할까? 죽음은 무엇을 바꾸어놓을까? '폭풍의 절정'은 배우자의 충격적인 죽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하지만, 프랑스 원제 '날아가기 전(Avant de s’envolver)'가 보다 시적이다.   


치매 초기 증상의 앙드레는 "내 위치는 뭐지?"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바보들이야!"라고 외친다. 이 연극은 마치 아버지 앙드레의 두뇌를 해부한듯 하다. 배우자의 죽음 후 혼돈에 빠진 정신세계다. 막간의 앙상한 고목의 이미지는 우리 인간의 단순하지 않고, 삶이 엉킨 나무가지처럼 복잡한 것을 은유하는 걸까?  



IMG_1458.jpg

 

'폭풍의 절정'은 처음에 누구의 죽음인지를 알려주지 않고 관객을 미스테리에 빠트린다. 관객은 계속 퍼즐을 맞추어나가야만 한다. 이 퍼즐 맞추기는 어떤 관객에게는 즐거움일 수도, 어느 관객에게는 고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에필로그에서 조명 효과로 마침내 진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인간의 절대 고독이라는 긴 여운을 남겨준다. 



02.jpg

The Height of the Storm, Samuel J. Friedman Theatre. Photo: Joan Marcus


이 연극은 두 영국 배우 조나단 프라이스(Jonathan Pryce, 72세)와 아일린 앳킨스(Eileen Atkins, 85세)의 열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치있다. 뮤지컬 '미스 사이공(Miss Saigon)', 영화 '브라질(Brazil)'로 친숙한 조나단 프라이스와 '올 댓 폴(All That Fall)'에서 마이클 갬본과 호흡을 맞추었던 연기파 아일린 앳킨스의 공연 자체가 전설적이다.  


'밤으로의 긴 여정'의 연출가 조나단 켄트(Jonathan Kent)는 실내 드라마에서 가족의 역학관계를 유연하게 끌어낸다. 높은 천장을 가득 매운 책꽂이와 서재, 그리고 부엌의 디테일을 살린 안소니 워즈(Anthony Wards)의 무대 세트, 황혼기의 부부와 감정을 표현해주고, 마지막 빛의 마술을 보여준 휴 반스톤(Hugh Vanstone)의 조명이 하이라이트다. 



IMG_1457-800.jpg


영화 '아무르'는 피아노 곡이 죽음을 앞둔 아내의 자장가처럼 흘러나오는 반면, '폭풍의 절정'은 막간 사이의 벌거벗은 고목 그림자 커튼을 배경으로 바이올린 소나타로 홀로 남은 이의 외로움을 절절하게 표현한다. 80분. 11월 24일까지. 사무렌 J. 프리드만 시어터/맨해튼시어터클럽


The Height of the Storm

Samuel J. Friedman Theatre

https://heightofthestorm.com



000.jpg *'올 댓 폴(All That Fall) 마이클 갬본, 아일린 앳킨스 주연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아무르(Armour)' 

TA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