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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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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1914-1965), 빨래터, 195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111.5cm x 50.5cm, 가나아트센터

 

 

빨래

 

이해인

 

오늘도 빨래를 한다.

 

옷에 묻은 나의 체온을

쩔었던 시간들을 흔들어 빤다.

 

비누 거품 속으로

말없이 사라지는 나의 어제여

물이 되어 일어서는 희디흰 설레임이여

 

다시 세례 받고

햇빛 속에 널리고 싶은

 

나의 혼을 꼭 짜서

헹구어 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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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1914-1965), 빨래터, 1954, 캔버스에 유채, 31cm x 14cm, 국립현대미술관

 

 

빨래
 
김혜숙
 
빨래로 널려야지
부끄럼 한 점 없는
나는 빨래로 널려야지
 
피 얼룩
기름때
숨어살던 눈물
또 서툰 사랑도
이젠 다 떨어버려야지
다시 살아나야지
 
밝은 햇볕 아래
종횡무진 바람 속에
젖은 몸 다 말리고
하얀 나래 퍼득여야지
한 점 부끄러움 없는
하얀 나래 퍼득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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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1914-1965), 빨래터, 1954?, 캔버스에 유채, 72cm x 37cm, 서울옥션 *2007년 서울 옥션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45억 2천만원) 기록.

 

 

빨랫줄에 행복을 널다

 

허진년

 

일요일 오후

외출한 아내가 전화기로 지령을 내린다

세탁기 멈추었으면 빨래 좀 널어라

마누라 말 잘 듣는 것이 세상 공덕 중에 으뜸이라고 하니

 

달콤한 잠결에 들리던 규칙적인 회전음이 빨래 소리였구나

빗소리로 들리던 휘파람소리가 헹굼 물 빠짐 소리였구나

둔탁하게 베란다 창을 두드리던 소리가 탈수 소리였구나

 

뚜껑을 열자

손에 손잡고 씨름하듯이 허리춤을 부여잡은

식구들이 가장자리로 가지런히 잠을 자고 있다

 

그래, 서로의 등을 두드려서 하얗게 빛을 내었구나

따뜻한 가슴을 풀어서 세제를 녹였구나

가는 목덜미를 씻겨주며 말끔하게 헹구어 내었구나

 

아내의 좁은 어깨를 펴서 빨래줄 중앙에 편안하게 앉히고

주름진 내 다리통을 반듯하게 펼쳐서 가장자리에 세우고

매일 식구들 체면을 닦아주던 수건의 네 귀를 꼭 맞추어

가을 국화꽃 향기를 묻혀서 널어놓고

 

소파 깊숙이 몸을 낮추고 올려다보니

내가 아끼고 사랑하여 왔던 모든 것이 빨랫줄에 있다

 

 

000박수근4- 종이에 연필. 18.8x26cm.jpg

박수근(1914-1965), 빨래터, 1954?, 종이에 연필, 18.8x2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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