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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y Warren Roebling Plaza, Brooklyn Bridge Park

 

12월 9일 브루클린 브리지 파크에 1883년 이 다리 완공에 수훈을 세웠던 여인의 이름을 딴 플라자가 오픈했다. 그 이름은 에밀리 워렌 로블링(Emily Warren Roebling). 브루클린 브리지의 건축가 존 A. 로블링과 그의 아들 워싱턴 로블링의 뒤를 이어 다리 공사를 지휘한 인물이다. 존의 며느리, 워싱턴의 부인이었던 에밀리 워렌 로블링은 1883년 5월 24일 브루클린 브리지 개통식에 수탉을 무릎에 앉히고, 체스터 아서 대통령과 마차로 다리를 건넜다. 

 

에밀리 로블링 플라자는 브루클린 브리지 파크에서 폐쇄되었던 다리 아래 2에이커의 공간으로 나무, 잔디밭, 벤치 및 공터로 조성됐다. 에밀리 워렌 로블링 플라자로 브루클린 브리지 파크는 완성됐으며, 인근의 덤보의 엠파이어 풀턴 파크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로블링 플라자 공사에는 800만 달러가 투여됐다.  <2021. 12. 15 Update>

https://www.brooklynbridgepark.org/places-to-see/emily-roebling-pla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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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y Warren Roebling Plaza, Brooklyn Bridge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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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y Warren Roebling Plaza, Brooklyn Bridge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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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y Warren Roebling Plaza, Brooklyn Bridge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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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y Warren Roebling Plaza, Brooklyn Bridge Park

 

에밀리 워렌 로블링(Emily Warren Roebling)  

시대를 앞서간 여성 엔지니어, 브루클린 브리지 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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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상징 브루클린 브리지(Brooklyn Bridge)는 '세계 제 8대 불가사의(Eighth Wonder of the World, 마추픽추/ 리우데자네이루 예수상/ 멕시코 치첸이트사 마야 유적지/ 만리장성/ 타지마할/ 페트라/ 콜로세움 )'으로 불리운다. 

 

1869년 착공, 14년 후인 1883년 5월 24일 맨해튼과 롱아일랜드(브루클린 포함)를 잇는 유일한 육로가 대대적으로 개통됐을 때 처음 건넌 사람은 수탉을 안고 마차에 앉은 여인 에밀리 워렌 로블링(Emily Warren Roebling, 1843-1903)이었다. 그녀는 브루클린 브리지 설계자였던 시아버지 존  로블링(John Augustus Roebling, 1806-1869)가 사고로 사망한 후 바통을 이어받은 남편 워싱턴 로블링(Washington Augustus Roebling, 1837-1926)마저 몸져 눕자, 자신이 벌떡 나서서 브루클린 브리지 건축을 지휘한 여장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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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A. 로블링(1806-1869)/ 워싱턴 A. 로블링(1837-1926)/ 에밀리 워렌 로블링(1843-1903)

 

미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없을 뿐만 아니라 페티코트를 입고 다니던 양가집 여성이 건설 현장에 드나드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대였다. 에밀리 로블링은 시아버지와 남편을 대신해 10여년간 수학, 공학, 과학을 독학하면서 브루클린 브리지 건축 프로젝트를 감독했다. 에밀리 로블링은 엔지니어의 부인이 아니라 자신이 엔지니어가 되었다. 

 

그러나, 에밀리 로블링의 이름은 오랫동안 존과 워싱턴 로블링 부자의 그림자에 가려졌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면서 역사가 백인남성 위주의 스토리였음에 반성하는 새로운 챕터로 들어섰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시인하면서 2018년부터 역사의 뒤안길에 가려졌던 여성들의 사망기사를 새로이 실었다. 그중 한명이 한국의 유관순 열사(1902-1920)였고, 에밀리 로블링의 부고로 그녀의 삶을 재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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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로블링, 1864/ Charles Émile Auguste Carolus Duran(1838–1917), Emily W. Roebling, 1896, Brooklyn Museum collection

 

에밀리 워렌은 1843년 업스테이트 뉴욕의 콜드스프링에서 12자녀 중 11번째 아기로 태어났다. 아버지 실바너스 워렌은 뉴욕주 하원의원을 지냈다. 워싱턴 DC의 조지타운 비지테이션 아카데미(현 Georgetown Visitation Preparatory School)에 다니면서 가사, 바느질, 역사, 천문학, 프랑스어, 대수학 등을 공부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4년 장교였던 오빠 거베너의 사령부에서 부하였던 워싱턴 로블링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1865년 초 에밀리와 워싱턴은 업스테이트 뉴욕 콜드스프링에서 결혼했다. 시아버지였던 건축가 존 로블링이 맨해튼과 롱아일랜드를 이어줄 유일한 육로인 브루클린 브리지(초기 이름은 'Great East River Bridge')를 설계할 무렵 신혼부부는 유럽으로 케이슨 병(Caisson, 고압의 물속에서 몸안에 축적된 질소가 배출되지 않아 몸속에 기포를 만들어 생기는 잠수부병)에 대해 공부하러 갔다. 에밀리는 이듬해 독일에서 아들 존 A. 로블링 주니어를 출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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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oklyn Bridge under construction

 

1869년 건축이 시작된 지 며칠 후 존 로블링이 공사장을 감독하던 중 브루클린 피어의 말뚝에 발을 부딪히면서 파상풍에 걸렸고, 1개월도 되지 않아 사망한다. 이에 그의 아들 워싱턴이 수석 엔지니어를 맡아 공사를 진행했다. 워싱턴은 1865년부터 1867년까지 브루클린 브리지의 축소 모델인 신시내티 커빙턴 브리지(현 John A. Roebling Suspension Bridge)에서 아버지와 함께 작업한 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워싱턴 로블링은 1870년 케이슨병에 걸려 반신불수에 시각, 청각을 잃었으며 말도 할 수 없게 됐다. 이 케이슨병으로 최소 24명의 인부들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에밀리 로블링이 다리 공사 지휘자로 나서게 됐다. 처음엔 비서로 시작해 남편의 눈과 귀가 되어서 모든 것을 기록했다. 브루클린 하이츠의 집(110 Columbia Heights)와 공사 현장을 고가면서 공급 자재 구입에 협상을 하고, 계약을 감독했으며, 이사회의 연락책까지 맡았다. 또한, 당시 독립된 도시였던 브루클린 시장 등 반대 정당이 남편을 프로젝트에서 해고하려하는 책략을 뛰어난 외교 기술로 저지시켰다. 한편, 로블링은 자택에서 망원경으로 공사의 진행상황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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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브리지 개통날의 축제 광경 Lithograph of the opening of the Brooklyn Bridge/ Frank Leslies, Illustrated Newspaper Brooklyn Bridge, 1883

 

1883년 5월 24일 마침내 브루클린 브리지가 개통되자 에밀리 로블링은 수탉을 무릎에 앉힌 채 마차를 타고 체스터 아서 대통령과 함께 다리를 횡단했다. 

워싱턴 로블링은 개통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집에서 파티를 열었다. 뉴욕시와 브루클린시는 동시에 거대한 불꽃놀이 팡파레를 벌였다. 개통 첫날 브루클린 브리지에는 1천800대의 차량이 지나갔으며, 15만300명이 건넜다. 

 

뉴욕타임스는 "어떻게 브루클린 브리지 엔지니어의 부인이 남편을 도왔는가(How the Wife of the Brooklyn Bridge Engineer Has Assisted Her Husband)"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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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대 법학과 졸업 후 에밀리 로블링, 1899

 

브루클린 브리지 완공 후 에밀리 로블링은 어떻게 살았을까? 로블링 부부는 뉴저지 트렌톤으로 이주했다. 에밀리는 1893 시카고 만국박람회를 위한 뉴저지여성매니저 이사회의 통계위원회, 미국혁명의 딸들 모임, 조지워싱턴추모협회, 스페인-미국 전쟁 중에는 구호협회에서도 활동했다.

 

1896년 영국을 방문해 빅토리아 여왕을 만났으며,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짜르 니콜라스 대관식에 참석했다. 공부도 계속했다. 뉴욕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뉴욕주 올바니 법학 저널에 '부인의 장애(A Wife's Disability'(1899)를 기고했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며, 성차별을 비판했던 에밀리 로블링은 남편의 이니셜 W. A. R.로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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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로블링은 1903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 나이 59세였다. 남편 워싱턴은 말년에 케이슨병 후유증과 싸우면서 미네랄 광석 수집가로 여생을 보내다가 1926년 89세로 눈을 감았다. 1920년에야 미 수정헌법 19조가 통과되며, 미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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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브리지에는 존, 워싱턴, 에밀리까지 3명의 로블링에게 헌사하는 현판이 설치되어 있다. 2018년 로블링 부부가 살던 브루클린 하이츠의 컬럼비아 하이츠와 오렌지 스트릿 교차로에는 'Emily Warren Roebling Way'로 명명됐다. 로블링 부부가 한때 살았던 뉴욕주 트로이의 렌셀라 폴리테크닉대학교(Rensselar Polytechnic University)에선 공학전공 여학생을 대상으로 에밀리 로블링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브루클린 브리지와 덤보를 즐기는 20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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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1.12.28 11:08
    브루클린 브리지를 많이 건너 다녔지만 에밀리 워렌 로블링이란 이름은 전혀 몰랐습니다. 컬빗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은 컬빗이 선생님이 되셔서 칠판 앞에 서계시는 느낌입니다. 저는 브루클린 브리지에 대해 강의하시는 컬빗 교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경청했습니다. 에밀리 로블링이란 여인은 어떤 DNA를 가졌길래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해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힘이 너무 커서 무서워지는 느낌입니다. 위대한 여성이라고 감탄하면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브루클린 브리지를 탄생시켜 주어서 생활의 편리 함을 주신 그 다리를 지나갈 때마다 감사를 보내겠습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