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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은총의 교실
2021.01.03 15:06

(547) 허병렬: 숙성한 과일들

조회 수 137 댓글 1

은총의 교실 (66) 미래를 여는 열쇠 

 

숙성한 과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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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Cézanne, Still Life with Fruit Dish, 1879-80. Museum of Modern Art Collection

 

필자는 부자다. 주위에 계신 분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제 이야기를 들으시면 이해하실 거예요’ 이 말이 그 답이다. 한 집안의 3대에 걸친 인연이 생긴 것도 교사직이 준 혜택이다. 그런데 또하나 가르친 학생들의 활동하는 절정기를 볼 수 있는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이것은 내 교사직이 70년간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는 것, 또 하나는 내 자신이 장수하는 까닭이다.

 

한국에서 손님이 오셨다. 한국 유수 기업체의 통솔자이다. 그런데 만나보니 그는 옛날 우리 반의 장난꾸러기였다. 그의 좋은 풍채, 남자다운 보기좋은 얼굴, 장소에 맞는 언어 행동... 등 오래간만에 만나보는 한국적인 신사이다. 그의 과거 50년의 눈부신 성장 결과가 반갑다. 어린시절의 그와 현재의 세련된 신사가 동일인이라고 믿기 어렵다. ‘제가 첫째 가는 장난꾸러기였어요. 선생님 한분은 저를 때린 일도 있어요. 그때 저는...’ 그가 말하는 어린시절이다.

 

‘어린시절을 충분히 만족할 만큼 즐긴 사람, 즉 만끽한 사람들이 좋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을 상기한다. 어린 시절은 결코 어른이 되는 연습 기간이 아니다. 어른처럼 행동하는 것을 배우는 견습기간이 아니다.

 

어린 시절은 그 자체로 뜻이 있다. 그들은 제각기 어린시절을 즐기며 성장하고 있다. 어른들이 흔히 버릇없다고 하는 행동, 생각대로 여과없이 말하는 말버릇, 다른 사람의 감정에 마음을 쓰지 않는 솔직한 표현과 태도, 온 세상에서 자기만이 잘났다고 뽐내는 일 등은 흔히 어리기 때문에 일어난다. 어린이의 버릇을 고쳐준다고 일일이 간섭하게 되면 그들은 마음껏 성장하기 힘들다.

 

어린이들은 결코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다. 그들은 성장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깨닫고 거기에 맞춰서 행동하게 된다. 어린이들이 성장하는 시기와 과정은 제각기 각자의 성장속도에 맞춰 커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때로는 그 과정에서 주위 어른들의 도움이 효과적이지만, 때로는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초래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충분히 만족할 만큼 지내게 하는 편이 현명하다.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낸 어른들은 큰 유산을 받은 셈이다.

 

과거 한국에서 있었던 20년간의 교사직은, 현재 그 결과가 보기좋은 숙성한 열매를 맺고 있다. 필자는 한국내 신문을 읽다가 낯익은 이름이 있으면 그것을 보관한다. 전에 가르친 학생이기 때문이다. 가끔 국제적인 수상자가 있다. 필자가 1964년 두 번째로 미국에 온 지 50년이 넘었다. 그동안 학생들은 장성하여서 한국의 일꾼, 세계의 일꾼이 된 것이다. 그들에게 대한 감사와 함께,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왜 필자에게 이런 자랑스러운 케이스가 종종 있는가? 그것은 필자가, 교육열이 강한 가정의 뒷받침이 있는 교육연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까닭이다. 이 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할 일이지만, 여기서는 가볍게 집고 지나간다.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이어서 `선생님,저 김미영(가명)이에요.’ `그럼, 한국에서...’ `예...’ `고마워. 보고싶다!’ 그의 울음 소리만 들리고 말이 없다. `미안해, 다음에 얘기하자.’ 필자는 전화를 끊고, 눈물만 흘렸다. 그녀는 우리 반에 있을 때, 엄마가 미술 공부하러 미국에 유학간 것으로 모두 알고 지냈다. 미영 어머님이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셨음을 아는 것은 주위의 어른들 뿐이었다. 필자는 그녀에게 마음을 썼지만, 어디 엄마 애정에 비교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알려진 예술가임이, 또 하나의 숙성한 과일이다.

 

필자는 지금 뉴욕거리를 걷고 있다. 발걸음이 가볍다. 무척 행복하다. 옆에 행인들이 없다면, 콧노래를 부르며, 스케이팅하듯 미끄러져 가고 싶다. 이것은 오늘 김미영의 전화를 받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서로 한마디도 말을 안했는데... 아니다, 우리는 50년의 세월을 말 없이 날려 보냈다. 나라 안팎의 숙성한 과일들이 이루는 다양한 활약이, 우리의 힘이고 이것이 바로 미래를 여는 열쇠이다.

 

 

허병렬 (Grace B. Huh, 許昞烈)/뉴욕한국학교 이사장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성여자사범학교 본과 졸업 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60년 조지 피바디 티처스칼리지(테네시주)에서 학사, 1969년 뱅크스트릿 에듀케이션칼리지에서 석사학위를 받음.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 이화여대 부속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1967년부터 뉴욕한인교회 한글학교 교사, 컬럼비아대 한국어과 강사, 퀸즈칼리지(CUNY) 한국어과 강사, 1973년부터 2009년까지 뉴욕한국학교 교장직을 맡았다. '한인교육연구' (재미한인학교협의회 발행) 편집인, 어린이 뮤지컬 '흥부와 놀부'(1981) '심청 뉴욕에 오다'(1998) '나무꾼과 선녀'(2005) 제작, 극본, 연출로 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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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1.01.09 17:21
    허병렬 선생님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지난번에도 올려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은 올해 나이가 90+ 영원히 사십시요 . 아직도 소녀같으시고 떼묻지않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샤롯테같으세요. 트레이드 마크인 빵떡 모자를 쓰시고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 우리 한국학교 교사들에게서 떠나지를 않아요.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셨던 선생님입니다. 세잔느의 숙성한 과일처럼 잘익고 맛있는 과일을 세상에 내놓으시려고 오늘도 어린이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