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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혜/빨간 등대
2023.12.10 16:20

(696) 홍영혜: 아들네와 은혜로운 랑데부

조회 수 181 댓글 2

빨간 등대 (63) Grace Farms, New Canaan, CT

아들네와 '은혜로운 랑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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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e Cho, “Conversation with Granny”, 2023, Dec. Digital Painting

 

오늘은 아들네를 만나는 날. 어젯밤에 끓여 놓은 양지머리 국물에 기름을 걷는다. 미역을 물에 불려놓고 마늘을 편으로 썰고 고기를 찢어 소금으로 간한다. 한소끔 다시 끓여 조선간장인지 확인해 보고 간을 맞춘다. 지난 번엔 졸려서 얼떨결에 진간장을 넣었다가 망친 전력이 있어서다. 손녀가 “김국”이라고 부르는 할미 미역국을 좋아한다. 아들네는 손녀가 내 식성을 똑 닮았다고 놀린다. 이 심심한 국을 손녀와 나만 좋아한다. 이렇게 꾸물거리느라 늦어졌는데, 다음날 뉴욕시 마라톤 때문인지 뉴욕을 빠져나가는 길들이 다 막혀서 마음이 조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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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네티컷주 뉴캐넌(New Cannan)에 위치한 그레이스 팜(Grace Farms)은 뉴욕시에선 50마일 남짓 떨어져 있다. 아들네와는 중간 지점에 위치해 서로 랑데부하는 장소로 만나곤 한다. 그레이스 팜은 자연을 체험하고, 예술을 경험하고, 커뮤니티를 키우며, 정의를 추구하고, 믿음을 탐구하는 5개의 큰 목표를 가지고, 세상을 좀 더 평화로운 곳으로 만들려는 인도주의적 취지하에 2015년 문을 열었다. 

 

그레이스 팜의 80에이커가 되는 숲, 목초지, 습지, 연못을 대부분 자연 그대로 보존하고, 그중 3에이커 정도를 개발하였다. 그레이스 팜을 설계한 사나(SANAA) 건축회사가 설계 취지에서 밝혔듯이, 이곳의 경관과 지형을 잘 살려 건물을 부각하지 않고 자연 속에 어우러지는 공간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리버빌딩(River Building)은 위에서 보면 지붕이 하나로 연결되어 이름처럼 강물이 굽이굽이 흐르듯 펼쳐진다. 5개의 공간, 예배당/강당(Sanctuary), 도서관(Library), 식당(Commons), 체육관(Court), 차 시음관(Pavilion)이 한 지붕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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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Commons)

 

도착하자마자 식당으로 갔는데 아들네는 점심을 먹고 있었다. 오늘의 메뉴인 셰프의 선택(Chef’s Choice)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12시쯤 되니 이미 줄이 길어져, 인기 있는 메뉴는 팔렸고, 아직 남아있는 치킨샌드위치와 버섯 수프를 시켰다. 근처 농장에서 재배한 신선한 식재료로 간이 과하지 않고 편안하다. 플라스틱 용기를 쓰지 않고 그릇과 종이를 쓴다. 

 

손녀는 벌써 점심을 먹었는데 할미 김국을 한 그릇 뚝딱한다. 사과밭에서 따온 사과도 하나 주니 꿀꺽한다. 우리가 식사하는 동안 예전에 딸이 갖고 놀던 머리털이 긴 장난감 말을 주었다. 손녀가 이름을 라푼젤 (머리털이 긴 동화 주인공)이라고 지어, 이름 짓는 솜씨에 놀랬다. 손자에게는 곰 인형을 주었는데 낯을 가리는지 싫다고 내동댕이친다. 공을 가지고 올걸 그랬나 보다. 큰 무리 없이 평화롭게 점심을 먹고 손주들이 직행하는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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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관(Court)

 

아래층에 자리한 체육관은 1층과 천장이 열려 있어 통유리창을 통해 하늘과 풀밭이 보이고 답답하지 않다. 어른들은 코트에서 농구와 배드민턴을 한다. 아이들이 놀기 좋은 부드럽고 커다란 블록과 공 들이 다른 한쪽에 있어 손주들이 여기서 정신없이 논다. 우리는 번갈아 살짝 빠져나와 가고 싶은 곳을 둘러본다. 며느리는 도서관으로 나는 예배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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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강당 (Sanctuary)

 

그레이스 팜에 올 때마다 River building에 제일 위쪽에 있는 예배당에 들른다. 전면 유리창으로 펼쳐지는 자연의 무대를 보며, 여기 앉아 잠시 쉰다. 700석의 원형극장 형태로 되어있다. 전에 무료 투어를 한 적이 있는데 환경을 생각하는 설계가 인상적이다. 땅 속 깊은 곳에 판 지열 우물(geothermal well)을 통해 55도의 온도를 유지하고, 겨울에는 10도 정도만 더 올려 난방하여 에너지를 절약한다고 한다. 기울어진 언덕의 지형을 깎아내지 않고 그대로 살려 설계하였다. 대신 각기 의자 뒷다리를 기울기에 맞추어 잘라서 700석 어느 자리에서도 같은 각도로 무대를 잘 볼 수가 있다. 일요일 오전에는 예배를 드리고, 각종 공연과 행사가 이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다시 코트로 돌아와서 아들에게 신호를 보낸다. 1층으로 올라가면, 흥미로운 퍼즐과 게임들이 구비되어 있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손주들이 노는 동안에 슬그머니 빠져나간 아들이 아래 농구코트에서 볼을 슛하는 모습이 내려다 보인다. 아들 내외가 애들에게서 잠시 해방되어 노는 모습이 좋다. 문득 어린 자녀를 키우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애들이 어렸을 때, 뉴욕, 샌디에이고, 시카고를 옮겨 다니며 쩔쩔맸다. 그때는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만 했는데, 지금 아들네를 보면서 과거의 나에게 허그를 해준다.  이제는 여유로운 할미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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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가 사라진 엄마를 찾는다. 손자도 덩달아 칭얼거린다.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길바닥에 가운데가 밤색이고 양 끝이 까만, 털이 복슬복슬한 애벌레가 기어다닌다. 손자가 한참을 쳐다보고 만지고 싶어 한다. 대신 강아지풀을 뜯어 손에 쥐어 준다. 이름이 털복숭이 애벌레(Wooly bear caterpillar)로 이사벨라 호랑이 나방 (Pyrrharctia Isabella)의 애벌레라고 한다. 과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전해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가운데 밤색 부분이 넓으면 겨울이 온화하고, 좁으면 추위를 예측한다고 한다. 밤색 부분이 꽤 넓은 것을 보면 올겨울은 온화할 것 같다. 

 

도넛 같이 생긴 동글동글하고 반짝반짝한 의자에 손녀가 쪼르르 뛰어가 앉는다. 누워서 발을 뻗친다. “할미, 할미도 이렇게 해봐!” 나도 두 발을 뻗어본다. 두 발이 서로 달듯 말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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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시음관 (Pavilion)

 

이렇게 손주들과  짧은 만남이 아쉽게 지나간다. 아들네를 보내고 연못 주변을 평화로이 한 바퀴 산책한다. 저녁에 콘서트가 있는지 예배당에서는 연주자들이 준비하는 모습이 유리창으로 환히 비친다. 거의 문을 닫을 즈음 방문자를 환대하고 무료로 차를 시음하는 곳에 여유롭게 다즐링 티와 여러 스파이스가 섞인 블랙티를 마시며 은혜의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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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e Cho, “Grace Farms”, 2023, Dec. Digital Painting

 

 

Grace Farms 

Tuesday-Saturday:10am-5pm, Sunday:12-5pm, Monday: Closed

365 Lukes Wood Road, New Canaan, CT 06840

203.920.1702

https://gracefarms.org

 

PS. SANNA

SANNA는 2010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받은 도쿄에 기반을 둔 회사이다. 맨해튼의 로어이스트사이드에 있는 뉴뮤지엄(New Museum)을 설계하기도했다. 류에 니시자와(Ryue Nishizawa)와 함께 수석 건축가 가즈요 세지마(Kazuyo Sejima)가 아래의 비디오 클립에서 “유리”라는 건축자료를 사용, 건물 안에서도 자연을 그대로 볼 수 있고, 또 건물 밖에서도 건물 속에 투과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 멋진 그레이스 팜을 잘 보여주고 있다. 

https://vimeo.com/159072884

 

 

홍영혜/가족 상담가  

서울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 대학, 대학원 졸업 후 결혼과 함께 뉴욕에서 와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이후 회계사로 일하다 시카고로 이주, 한동안 가정에 전념했다. 아이들 성장 후 학교로 돌아가 사회사업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Licensed Clinical Social Worker, 가정 상담가로서 부모 교육, 부부 상담, 정신건강 상담을 했다. 2013년 뉴욕으로 이주, 미술 애호가로서 뉴욕의 문화예술을 탐험하고 있다.  
 

수 조(Sue Cho)/화가 

미시간주립대학에서 서양화와 판화를 전공하고, 브루클린칼리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뉴욕주 해리슨공립도서관, 코네티컷주 다리엔의 아트리아 갤러리 등지에서 개인전, 뉴욕한국문화원 그룹전(1986, 2009), 리버사이드갤러리(NJ), Kacal 그룹전에 참가했다. 2020년 6월엔 첼시 K&P Gallery에서 열린 온라인 그룹전 'Blooming'에 작품을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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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3.12.14 10:31
    홍영혜씨의 아들과의 랑데뷰를 잘읽었습니다. 신선함을 느꼈습니다. 만남을 랑데뷰라고 한것이 무드를 자아냅니다. 가족간의 사랑과 따뜻함이 풍겨서 마음이 온화해집니다. 무료티 시음장이 인상깊네요. 시음을 하고 싶네요. 내가 좋아하는 생강티도 있는지요? 가끔 때묻지않은 땅을 밟고, 무한한 넓은 무공해의 자연속에서 손주들과 뒹굴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홍영혜씨는 그런곳을 자주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홍영혜씨의 글과 화가 수 조의 그림이 잘어울립니다. 화사하고 밝은 색의 그림이 너무 좋아요!
    -Elaine-
  • 김정화 2023.12.14 14:27
    아들내외, 손자녀와의 만남을 집이 아닌 공간
    에서 하루를 같이 보내는 과정과 느낌이 생생
    합니다.
    나도 모르게 쑤~욱 빨려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그레이스팜과 같은 멋진 곳이 있다면 나도 손녀, 아들 내외와 같이 보내고 싶습니다.
    차분하고 섬세하게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하여 한폭의 수채화를 보고 있는 듯 합니다.
    그림과 함께 하는 글이 더욱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