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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관하여 1: 애너벨 리
부산 문제아, 뉴욕 아티스트로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칼럼을 쓰게 된 케이트입니다. 뉴욕에 살게 된 지는 어느덧 9년이 되었고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글로 글을 썼던 것이 까마득한데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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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때 조안 바에즈가 부르는 '애너벨리'를 아빠의 음악방에서 처음 들었다. 그때는 유튜브도 구글도 없었던 시절이라 내가 접하는 외국문화는 아빠 방에서 듣는 클래식 음악이나 팝, 아니면 내가 TV에서 챙겨보는 만화가 다였다. 애너벨리는 에드거 앨런 포가 마지막으로 지은 시인지도 당연히 몰랐다. 아빠의 CD 안에 적혀 있던 가사는 영어로 되어 있어 무슨 뜻인지 완전히 알 수가 없었지만, 어려운 문장들이 아니어서 나는 마음대로 상상해 버렸다. 

It was many and many a year ago, 
   In a kingdom by the sea, 
That a maiden there lived whom you may know 
   By the name of Annabel Lee; 
And this maiden she lived with no other thought 
   Than to love and be loved by me. 

바에즈의 멜로디는 기괴하지만, 예뻤고, 비극적이었다. 나는 그것을 토대로 만화를 연습장에 그렸는데, 중1 때 시작하여 중2 때는 연습장이 3권이 되었다. 공부는 뒷전이고 부모님 몰래 밤을 새워 페이지를 만들 정도로 열심이었다. 돌이켜보면 이것이 나의 첫 작품이었다. 친구들은 공부를 하나도 안하고 언제나 만화만 그리는 주제에 성적은 그럭저럭 잘 나오는 나를 아주 신기한 생물체로 보았고, 만화 동아리까지 만들어 만화도 가르치며 다른 반 친구들까지 애너벨리를 돌려볼 정도로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광안리 바닷가에서 자란 나에게 소녀, 소년, 그리고 바닷가에 있는 왕국이라니, 나는 중2 답게 비련의 여주인공을 생각하고, 내가 되고 싶은 여성상을 마음껏 투영했다. 주인공은 몰락한 왕국을 새로 일으키고, 꽃다운 나이로 일찍 죽도록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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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abel Lee back cover and page 5, pen and pencil on paper, 8x11 inches, 1994

어느 날 애너벨리를 그리다가 도덕 선생님에게 들켜 엄청 맞았다. 나는 집에서 꽤 많이 맞았기 때문에 웃기지만, 맞는 거엔 자신 있었다. 선생님은 나를 벌하기 전에 이미 다른 학생을 혼내고 열받은 상태였고, 내 반응에 못마땅해 했다. 그 당시 나는 중2병이 최고로 달해 뇌에 필터를 장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리는 선생님에게 "이제 좀 적당히 하시지요?"라고 말을 해 매를 더 벌었다. 왜 그랬을까! 선생님은 뺨을 때리기 시작했고, 나는 맞는 도중에 "지금 당신은 도덕 선생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말해버려서 일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렸다. 선생님은 이성을 잃어버리고 급기야 발길질까지 할 정도로 꼭지가 돌아버렸다. 적하반장으로 나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린 것이다.  

교실에 있던 모두는 순간 얼음이 되어버렸고, 선생님은 내가 잘못했다고 빌 때까지 우리 반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애너벨리가 그려진 연습장을 찢어버리고 교실을 나갔다. 그때 내가 유연하게 대처했더라면, 미국에 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때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고, 선생님들과 소통이 그렇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던 국어 선생님과 교무실에서 치킨도 먹고, 한문 선생님과는 등교도 함께 했었다. 하지만, 가정 선생님과 수학 선생님에게는 '꼴통 문제아'로 찍혀 있었다. 나에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교장 선생님께 불려간 부모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수 없지만, 나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 나는 시카고 근처 카톨릭 여자고등학교로 혼자 유학을 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으로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의 나는 갑자기 홀로 기숙사에 남겨져 버렸다. 아는 사람도 없고 영어도 한마디를 할 줄 모르니, 내 세상이 뒤집어진 것 같았다. 친구들은 다들 미국으로 간다고 부러워하고, 세살 어린 여동생도 미국에 오고 싶어 난리를 쳤지만, 정작 나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억울했다. 

다행히 미국 친구들은 내게 잘해주었다. 내가 그린 그림은 언어를 몰라도 그들은 대단하게 생각해 주었고, 학교 신문에 정규 만화 코너도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학교 성당에서 미사를 할 때 쓰는 안내 책자 표지도 내가 그리게 되었다. 나의 별 볼일 없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실력도 순진한 미국 친구들에겐 괜찮게 보였나 보다. 나의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성격은 180도 달라져 매일 영어 사전에 있는 단어를 쓰지도 않을 거면서 200개씩 외우며 잘 웃고 진취적으로 변했다. 그때가 1994년이라. 하…세월이 너무 빠르게 간다. 

이렇게 내 얘기를 한글로 쓰는 건 사실 너무 오랜만이라 저절로 그 때 당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느덧 나도 추억을 곰씹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까? 나이가 들면 현명해질줄 알았지만, 다들 그런 건 아닌가 보다. 

2년 후엔 동생도 미국에 오게 되고, 가족 모두가 이민 비자를 받았다. 나는 공립학교로 옮겼다. 2002년엔 의도치 않게 시민권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 인터뷰를 나보다 먼저 한 동생은 애너벨리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자기 이름을 애너벨로 지어버렸다. 나도 이쁜 이름 갖고 싶었는데 선수를 치다니! 당시 떡을 너무 좋아하던 나는 인터뷰 끝난 후 내 이름을 그 자리에서 '위대한 찹쌀떡(greatmochi)'으로 정했다.  

내가 미국으로 온 계기가 된 도덕 선생님과의 사건을 돌이켜보면, 당시 아마 서른 중반쯤이었을 그녀에게도 학생이 한 말은 상처였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고, 정말 세상 일은 모를 일이다. 그때 막 나가던 꼴통 중딩이 지금 뉴욕에서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면, 그 선생님은 내게 무어라고 하실까. 얼마 전 동창 친구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내가 중1 때 담임 선생님이 지금 친구 아들의 담임 선생님이라고 연락이 왔다. 그 선생님은 25년이 지났고 한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는데 기쁘게도 나를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다면서 우리는 같이 '오마이갓'을 연발했다. 당시엔 심각했는데 지금도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생각하니 난 이상한 애였다. 

 
Bae_Kate_2.jpg
Kate Bae, Pattern Beta 3, Acrylic on canvas, 7x7 inches, 2019

이 작품은 지금 브롱스에 있는 웨이브힐(Wave Hill) 썬룸 프로젝트 스페이스(Sunroom Project Space)에서 전시중인 그림중 하나다. 내가 아이덴티티를 정립하는 데부터 시작한 것이라 할말이 무척 많아 다음 컬럼으로 써야 할 것 같다. 9월 2일까지 전시되는데, 프로젝트에는 소원을 적는 부분이 포함되어있다. 혹시 궁금하시다면 가서 자신이 원하는 소원을 적어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https://www.wavehill.org/arts/artists/kate-bae


이제 막 제대로 작품을 시작하는 나에겐 초심을 다시 잡으며 뉴욕 스토리 칼럼을 쓰게 된 계기를 갖게 되어 기쁘고 감사하다. 오랜만에 한글로 쓰는 거라 횡설수설했지만, 앞으로 쓸 나의 글이 읽는 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져본다. 다들 좋은 여름이 되시길. 


kate 100.jpg 케이트 배 Kate Bae/ 화가
1979년 부산에서 태어나 남천여중 재학중 미국으로 이민,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SAIC)와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RISD)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2010년 졸업 후 뉴욕으로 이주, 현재 맨하탄에서 거주하며 웨이브힐 전시 등 작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https://www.kateisaweso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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