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
2020.09.28 12:05

(532) 스테파니 S. 리: 10년 후

조회 수 504 댓글 0
흔들리며 피는 꽃 (49) 10 Years After
10년 후 

Relaxation & Ambition.jpg
   Resting & Dreaming | Stephanie S. Lee | 2018 | Vine Black, natural mineral pigment and ink on linen | 18.5” H x 15.25” W each

이가 태어난 지 10년이 흘렀다.  
10년, 강산도 변한다는 시간.  그 사이 아이는 세상에 나와 걷고, 말하고, 용변을 가릴줄 알게 되었다. 언어소통을 하기 시작하고부터는 천만 다행으로 덜 울었고, 그림을 그리고 글자를 쓰기 시작했으며, 이가 빠지고 새로운 이가 나는 동안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거치며 나름의 사회생활도 한다. 10살이 된 후 최근 몇개월 사이에는 몸도 사고도 비약적으로 성장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사람의 뼈 조직도 10년이면 완전히 다른 조직으로 바뀐다고 하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영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부모의 입장에선 적응할 만 하면 새로운 난제가 주어지는 것 같아 버겁고 혼란스럽지만, 인간대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한 인간의 성장기를 아주 가까이서 관찰하는 신기하고 경이로운 경험이다. 
아이가 갓난쟁이일때는 아이와 언어소통도 안되는데다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고 끝이 보이지 않아 누구에게 맡기지 않고 혼자 아이를 기르는 것이 왠지 내 인생을 손해보는듯 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와 그 시절 사진들을 돌아보니 눈물 콧물 다 빼긴 했어도 다시 오지 않을 아이의 귀여운 모습들을 놓치지 않고 곁에서 볼 수 있었던 게 다행이다 싶다.
 
자다 일어나 두시간 마다 한번씩 우유를 타서 먹이던게 엊그제 같은데 십년이 지나니 이제는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설거지까지 한다! 자식 키운 보람이 있다. 참치 주먹밥, 김치 볶음밥에 이어 계란 후라이, 비빔라면, 팬케잌과 프렌치 토스트, 가르쳐 주지도 않은 스팸 볶음밥까지 할 줄 아는 요리도 점점 늘어가고 있다.

허나 아이는 더이상 예전처럼 천진하게 웃어주지도, 엄마를 찾지도 않는다. 포즈 잡고선 찍어달라 할 때가 있었는데 이젠 같이 사진을 찍는것도 쉽지 않아졌다. 요즘엔 내가 자기를 bother 한다고 종종 짜증을 낸다. 그래놓고 조금 있다 돌아와서 미안하다고 안아주긴 하지만 아마 그것도 몇년 지나면 하지 않겠지.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곧 무서운 사춘기가 올거라고들 경고하지만 아직은 아쉬움이 더 크다.

아이가 이렇게 변하는 동안 나는 무얼 했나… 아이를 낳으면서 모든것을 리셋하고 나도 다시 한살부터 시작해 정신없이 지나온 것 같다.
출산 후 10년이 되니 이제야 몰아치던 정신이 조금 되돌아오는 듯 하고 몸의 붓기가 빠지는 듯 하다. 일년에 1키로씩 성실하게 쪘는지 아직도 몸무게는 딱10키로 더  빼야 하지만 그래도 십년이 되니 바람빠진 풍선 같던 살들도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 오는 듯 하다. 똥배는 아직 여전하지만 배도 조금 꺼진것 같다. (예전에 라디오에 누가 산후 10년이 다 되도록 붓기가 안빠져 고민이라는 사연을 보냈다는 말에 10년동안 안빠졌으면 그게 살이지 붓기냐며 깔깔웃었었는데 아, 이말이었구나. 산후조리 잘못하면 평생 간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로구나;) 

그런데 붓기가 좀 빠지는가 싶으니 때아닌 여드름이 시작된다. 아무거나 막 바르며 신경쓰지 않고 살았는데 사춘기때도 여드름이 나지 않던 볼에 오돌도돌 여드름이 올라와 사춘기 소녀마냥 신경쓰인다. 피부 하나는 타고 났다며 자만했는데… 딸아이 이마에도 여드름이 하나 둘 나기 시작해서 둘이서 얼굴을 맞대고 여드름 연고를 나눠 바르고 있다. 

발과 무릎이 불편해 힐은 신지못한지 오래고, 머리 숱 없는것이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흰머리까지 신경써야 한다. 지성이던 피부가 건조해져 당기질 않나, 생전 안나던 땀이 흐르질 않나, 산후 10년이 지나 이제 몸이 좀 회복되는건가  싶으니 갱년기가 시작 될 모양이다. 갱년기가 사춘기를 이긴다고 하니 늦게 아이를 낳아 시기가 겹치는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건가…

어쨌든 편안하고 조금은 느슨한, 늙은 모습이 자연스러운 할머니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건만 막상 닥치니 젊음에 집착하지 않고 나이를 먹는다는 게 쉽지 않은 것 같다. 출산과 육아에서 회복될만 하니 노화까지… 사회적, 정신적 변화를 차치하고라도 여자들이 몸으로만 겪는 변화만 해도 스펙트럼이 이렇게나 넓다.

Resting & Dreaming-poster.jpg
   Relaxation & Ambition | Stephanie S. Lee | 2019 | Vine Black, natural mineral pigment and ink on linen | 20” H x 20” W each/ Drawing Room's 8th group exhibition "Interweaving" poster 

난 10년 어쩌다 보니 그림도 다시 그리게 되었다. 임신 초기에 태교겸 집에만 있지 말고 뮤지움 다니며 그림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자 싶어 무턱대고 헤이 코리안에서 ‘드로잉 룸’이라는 모임을 찾아 가입했다. 다른 ‘맛집멋집’ 같은 모임보다는 사람 수가 적어서 번잡스럽지 않아 좋았고, 미술과 관계된 모임이 거의 없는 와중에 ‘드로잉’ 이라는 이름이 반가웠다. 보통 온라인 모임은 청춘남녀가 짝을 찾으러 나가는게 대부분인지라 유부녀에 임산부가 나왔으니 당황스러웠을 법도 한데 너그러이 받아주시고 어울려 주셔서 만삭이 되도록 맨하탄을 누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명색이 ‘드로잉 룸’ 인데 마냥 먹고 놀러만 다니지 말고 뭐라도 그려야되지 않겠나싶어 주제를 내고 주제에 맞게 그림을 그려 포스팅을 하다가 이렇게 끄적이지만 말고 모아서 전시를 해 보자! 하고 일을 벌여 2013년에 첫 전시를 한 것이 올해로 여덟번째 그룹 전시를 한다. 그간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사금을 캐듯 세월은 사람도 가라앉히고 뜨물에 날리며 금같은 사람들만 남게 해 주는 것 같다. 쉽지않은 예술계에서 서로 의지하고 공감하며 그림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이 되어주는 사람들을 만나 함께 할 수 있어 즐겁고, 든든하고, 감사하다. 

지난 10년, 뱃속에 있던 아이는 이제 사춘기로 접어들고, 나는 갱년기로 접어들고, 드로잉 룸은 10주년을 맞아 8번째 그룹 전시를 한다. 
앞으로의 10년은 늙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여유가 생기길 꿈꿔본다. 비록 몸매 자랑하는 딱 붙는 옷은 못입겠지만 멋스럽고 고상한 차림에, 흰머리도 단정하게 잘 어울리는, 외모도 생활도 단촐하고 깔끔해 품위있는 할머니로 늙을 수 있길. 

그리고 그렇게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주는 사람들과 즐겁고 고상하게 그림을 그리며 함께 할 수 있길…소란스럽지 않게,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게, 작지만 찬찬히 또박또박 인생길을 예술과 함께 걸어가 앞으로도 좋은 사람들과 20년, 30년 함께 전시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Stephanie_100-2.jpg Stephanie S. Lee (김소연)/화가, 큐레이터 

부산에서 태어나 예술고등학교 졸업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프랫인스티튜트 학부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후 맨해튼 마케팅회사, 세무회사, 법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딸을 출산하면서 한동안 전업 주부생활을 했다. 2010년 한국 방문 중 우연히 접한 민화에 매료되어 창작민화 작업을 시작했다. 2014년 한국민화연구소(Korean Folk Art)를 창설, 플러싱 타운홀의 티칭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전시도 기획하고 있다. http://www.stephaniesle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