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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등대 (52) 기억의 서랍을 열다 

 

이제 배롱나무(Crepe Myrtle)가 눈에 들어온다

 

배롱나무와염소.jpg

Sue Cho, “Landscape with Crepe Myrtle”, 2022, Digital Painting

 

“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

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놓고는

가녀린 자태로 소리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나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

배롱나무 -도종환 시집 '부드러운 직선'(1998)-

 

코비드로 한국에 나가지 못하다가 지난 여름 4년 만에 한국에 다녀왔다. 이제 미국 생활이 거의 40년 되어가는데, 한참 동안은 한국에 간다고 하면, 가기 전의 설렘과 와서의 그리움으로 감정 소모가 힘들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한국의 기억을 의식의 서랍 속에 저장하여 미국에 오면 다른 세계 속에 덤덤하게 살게 된다. 그렇게 살금살금 살다가 기억이란 묘해서 하나가 건드려지면 나의 의식에 전혀 없었던 기억들까지 끄집어 올린다.

 

동네 산책길에 종종 들르는 제퍼슨 마켓 가든(Jefferson Market Garden, 10 Greenwich Ave.)은 10월까지도 아름다운 꽃들이 피는 그리니치빌리지의 오아시스 같은 정원이다. 좀처럼 빈 의자를 찾기가 어려워 몇 바퀴를 돌다가 배롱나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들어오는 입구 양옆으로 그리고 정원 안에도 두 그루나 있었다. 내가 찾던 배롱나무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고 무수히 스쳐 지나갔는데 알아채지 못했다. 이 배롱나무가 지난 여름 그리고 그 너머 기억의 서랍을 열게해준다. 

 

 

배롱나무3.jpg

 

서울 도착 이튿날 새벽 3시경에 눈이 떠져 그때부터 배가 고팠다. 뉴욕은 저녁 시간인데… 생각보다 아침에 여는 식당이 많지 않았다. 아침 7시에 여는 곰탕집 하동관(여의도점)을 우연히 찾았다. 평소 곰탕을 좋아하진 않는데 긴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고 속이 편안한 게 보약같이 느껴졌다. 후에 “음식점 찾다 찾다 식성 까다로운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 친구에게 듣고 “웬 행운인가” 웃었다. 

 

식당을 열기 전 시간이 남아 근처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한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의외로 나무도 많고 국회 산책로가 걷기 좋았다. 친절하게 나무 이름을 써서 붙인 팻말들을 본다. 소나무, 양 살구나무, 산딸나무, 이팝나무, 배롱나무…. 아니 배롱나무? 

 

전에 길목인(*사회적협동조합 길목 소식지) 연재에 실린 '일곱째 별의 전원일기'에 낫으로 가시나무 사이에 질식하는 배롱나무를 구출하는 글을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나비 날개보다 보다 더 얇은 꽃잎은 촘촘한 레이스처럼 오글오글”한 배롱나무의 꽃은 무얼까 무척 궁금했었다. 아 바로 이나무를 구출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구나. 이제 그 글에서의 느낌을 오롯이 감지할 수 있어 뿌듯했다. 

 

 

여의도 배롱나무 3.jpg

 

국회의사당 '사랑재'라 불리는 전통적인 한옥 앞에도 제법 큰 배롱나무가 있는데 석마와 동자석을 배경으로 운치가 있다. 나무가 자라면서 줄기 껍질이 벗겨지고 시내몬 빛깔의 매끈한 줄기를 들어내고 있다. 한여름 7월에 꽃이 피기 시작해서 꽃이 백일을 간다고 백일홍 나무, 목백일홍이라 불리우는데 줄여서 배롱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꽃잎이 얇은 크레이프 종이 같아 영어 이름은 Crepe(Crape) Myrtle이다. 한여름 땡볕에 꽃나무가 많지 않을 때 이렇게 화사한 꽃을 백일동안 보여주다니. 

 

배롱나무를 알고부터는 배롱나무가 어디 가나 보인다. 서울역이 보이는 구름다리 위의 화분 정원이나 주변의 아파트 마당에도 배롱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희한하다. 전혀 나의 기억에 없었던 배롱나무가 의식의 수면에 떠 올랐다. 오래전 여름 가족들과 함께 소쇄원, 백련지 등 남쪽 지방을 갔을 때이다. 식물에 대해 많이 아는 새언니가 가로수에 쭉 나지막하게 피어있던 꽃나무를 보고 목백일홍이라고 했던 장면이 선명하게 사진처럼 기억된다. 지금은 아련하기만 하던 엄마의 모습도 함께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나는 오래 전부터 배롱나무를 만났었다. 

 

나무를 안다는 것은 그 이름을 불러주고, 사계절 모습을 기억하고, 그 나무를 만났을 때 반갑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 배롱나무를 알게 되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

늘 다니던 길에 오래 전부터 피어 있어도

보이지 않다가 늦게사 배롱나무를 알게 된 뒤부터

배롱나무에게서 다시 배웁니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

늘 거기 함께 있는 게 눈에 보인다고”

 

배롱나무 -도종환 시집 '부드러운 직선'(1998)-

 

 

까치와 배롱나무.jpg

Sue Cho, “Crepe Myrtle and Mapie”, 2022, Digital Painting

 

 

홍영혜/가족 상담가  

서울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 대학, 대학원 졸업 후 결혼과 함께 뉴욕에서 와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이후 회계사로 일하다 시카고로 이주, 한동안 가정에 전념했다. 아이들 성장 후 학교로 돌아가 사회사업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Licensed Clinical Social Worker, 가정 상담가로서 부모 교육, 부부 상담, 정신건강 상담을 했다. 2013년 뉴욕으로 이주, 미술 애호가로서 뉴욕의 문화예술을 탐험하고 있다.  
 

수 조(Sue Cho)/화가 

미시간주립대학에서 서양화와 판화를 전공하고, 브루클린칼리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뉴욕주 해리슨공립도서관, 코네티컷주 다리엔의 아트리아 갤러리 등지에서 개인전, 뉴욕한국문화원 그룹전(1986, 2009), 리버사이드갤러리(NJ), Kacal 그룹전에 참가했다. 2020년 6월엔 첼시 K&P Gallery에서 열린 온라인 그룹전 'Blooming'에 작품을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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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2.11.07 14:51
    얇은 종이같은 꽃이 피어있어서 가까이 가서도 보고 만져도 보곤 했는데 이 나무가 배롱나무였군요. 목백일홍의 준말이 배롱나무라고 하니까 친근감이 갑니다. 산책을 하면서 많이 봤지만 이름을 몰라서 지나쳤습니다.
    이제 배롱나무를 확실히 알았습니다. 마음에 눈을 갖고 배롱나무를 감상해야 겠습니다.
    홍영혜씨의 배롱나무를 읽으니까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Elaine-
  • 장신전 2022.11.09 11:04
    저도 배롱나무 사귐으로 찾아 나아갈거에요.
    너무 꽂 나무를 보고도 그냥 이름도 모른체 무심한 내 자신이 속상했는데 LA 에 꽂 피는 나무들이 넘 많아 언젠간 하나하나 이름 찾기에 나설거에요.
    가끔 홍영혜 동생벌 친구가 생각납니다. 같이 같던 Brooklyn Museum, coffee shop 또 East Village 일본식당 등등 좋은 추억이지요. 항상 멋진 삶을 그리고 추구하는 생활 존경해요!
  • 현동 2022.11.10 01:48
    나무도 사람도 이름을 불러주면 존재의 의미가 달라지는군요. 맨해턴의 배롱나무를 배롱나무라 불렀을때 그 나무의 의미는 또 더 넓어졌을것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