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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한혜진: 죽일까요? 살릴까요?
에피소드 & 오브제 (9) 컷, 컷, 컷!
죽일까요? 살릴까요?
미용실을 나서면서도 다시 잘라야 할 것들을 생각한다. 이는 손톱과 발톱뿐만이 아니다. 내 마음 속에 마치 또아리 틀고 앉아 있는 뱀처럼, 치렁치렁해진 욕심의 끄나불들. 나태의 잔재들이 아닐까? 자르자. 잘라야 한다. 그것들도 …컷, 컷, 컷.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 1953)
나무의 가지치기를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가벼워진 형체하며, 산뜻해진 기분, 그리고 짧아진 가지 끝에 걸리던, 새롭게 뻗어나올 가지에 대한 기대감을 말이다. 미장원에 가는 기분도 이와 흡사한 것같다. 어느 날, 갑자기 더부룩해진 머리칼이 마치 개운하지 않은 뱃 속처럼 거북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는 것이다.
이런 기분을 알아차린 것일까? 어느 미용실의 상호가 ‘머리하는 날’이란 것이 재치가 느껴진다. 날을 잡지 않아도, 그런 날 여자들은 미용실에 간다. 집과 나무, 여자는 가꾸기 나름이니까. 그리고, 머리칼은 가장 효과가 큰 가꾸기의 대상이기도 하고.
여자들의 머리형태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여자들의 나이와 머리 길이는 대체로 반비례한다. 나이가 적을수록 긴머리를 선호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머리길이는 올라간다. 보통 말하는 커트 머리가 대세이다. 오랫동안 긴 머리, 그리고 틀어올리는 머리를 고수했던 나도, 어느날 미용사의 실수, 아니면 계획된 의도에 의해서 짧은 머리로의 변신을 하고 말았는데, 얼추 그 스타일이 나이와 맞아들어가는데에 놀랐다.
그러면서 ‘컷의 묘미’를 알게 되었다. 몇 올의 머리카락이라 할지라도 왼쪽으로 치우치느냐, 오른쪽으로 가게 하느냐에 따라서 효과는 매우 다르지 싶다. 효과란 다름아닌 평평한 얼굴도 갸름하게 보이도록 할 수 있고, 납작한 뒤통수도 어느정도는 튀어나와 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일까요? 살릴까요?” 라는 질문에 여자가 과감하게 대답할 수 있는 곳이 미용실이다. “거기는 죽여야죠.” 여자란 자기의 아름다움을 위해선 이렇게 용감해질 수 있는 것이다.
로마의 휴일
며칠 전, 미장원에 갔다. 남자 미용사가 묻는다. “그 때 자르고 지금 오시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인내심이 강하시군요.” 나를 잘 알지는 못할텐데, 그가 나의 머리 손질에 관한 습관을 잘 안다는 듯이, 되돌려주는 나에 대한 요약이다. 말도 상황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인내심이 강하다는 칭찬조의 말이 머리를 가꾸지 않는다는 뜻의 게으름과 동의어가 되고 있다.
하기사, 미용실에서 몇 시간을 죽쳐야(?) 되는데에 나는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한다. 한 두달 그냥 그렇게 지내는 인내심이 나에겐 더 쉬운 경우에 속하는 것이다. 모처럼의 미용실 방문이라 그런지 권유도 많다. 커트만 하려 했더니 하이라이트에다 코팅도 하란다. 다른 언니들도 다하는 것이라나. 예전, 미용실에 가는 것을 ‘머리 볶으러 간다’고 했다. 여자들은 머리를 가만두지 못한다. 그만큼 만만하다. 머리갖고 놀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조금만 만지작거려도 변신이 가능하고, 때때로 그 속에는 터닝 포인트를 꿈꾸는 의미심장한 결심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컷, 컷, 컷. 머리를 쳐내는 여자의 모습,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긴머리의 오드리 헵번이 상큼한 커트머리를 택한 것은, 소녀에서 숙녀로, 그리고, 공주로서는 가질 수 없었던 평범한 자유의 획득을 말해주고 있는 건 아니었는지.
로마의 휴일
머리가 완성된 건 세 시간이 지나서였다. 약속했던 시간은 한시간 반 정도였으나, 초과도 엄청 초과이다. 잘해주려고, 예쁘게 나오게 하려고 그렇게 됐다고 대꾸하는데야 할 말이 없다. 미용실에서 적용되는 시간의 법칙이 있다나. 두배 정도는 봐야하나보다. 아름다움을 잡아먹는 건 시간이다.
그런데, 시간을 잡아먹어야 아름다움이 산다는 아이러니. 여자들은 이 아이러니에 초연해지지 못한다. 그래서, 미용실은 붐비고 미용사는 머리와 씨름을 한다. 그 씨름의 결과 판정은 여자의 마음에 달렸다. “썩, 괜찮은데.” “달라보여. 머리하길 잘했어.” 아니면, ”아까 그 사람은 괜찮던데. 나는 왜 이렇게 나왔지?” 미용실에 들어 설 때, 수십 갈래였던 마음의 가닥이 하나로 잡히길 바랬으나, 아직도 머리모양과 함께 자기에 대한 긍정 아니면, 자신에 대한 불만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럴 때, 미용사가 얼른 비위를 맞춰주기도 한다. “한 달만 있다 오세요.” “내가 다음엔 젊게, 펑키하게 해드릴테니까.” 머리가 새롭게 자라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머리에 관한 한, 나에게도 미용사에게도 거듭날 기회는 그대로, 고스란히 주어진다는 것과 함께. 혹시 했었는데, 오늘도 역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머리를 잘랐다고 해서 나의 있던 모습이 크게 달라지진 않는 것이다. 달라지기 위해서 잘라야 할 건 그대로 남아 있다.
미용실을 나서면서도 다시 잘라야 할 것들을 생각한다. 이는 손톱과 발톱뿐만이 아니다. 내 마음 속에 마치 또아리 틀고 앉아 있는 뱀처럼, 치렁치렁해진 욕심의 끄나불들. 나태의 잔재들이 아닐까? 자르자. 잘라야 한다. 그것들도 …컷, 컷, 컷.
*Audrey Hepburn Gets Haircut in 'Roman Holiday' (YouTube)
한혜진/수필집 '길을 묻지 않는 낙타' 저자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후 결혼, 1985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한양마트 이사로 일하면서 김정기 시인의 권유로 글쓰기와 연애를 시작, 이민 생활의 균형을 잡기위해 시와 수필을 써왔다. 2011년 뉴저지 리지필드 한양마트에 갤러리1&9을 오픈, 한인 작가들을 소개했으며, 롱아일랜드 집 안에 마련한 공방에서 쥬얼리 디자인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