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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
2020.09.07 22:30

(528) 스테파니 S. 리: 상실의 계절

조회 수 496 댓글 1

흔들리며 피는 꽃 (48) 살아남은 이들의 슬픔

상실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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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새로운 생활 리듬에 어느정도 익숙해지나 했더니, 어느새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가을이다. 일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게 아쉽지만 올 한해는 쉬어가는 한 해라 맘편히 생각하고 아프지 않고 무사히 겨울을 나기를 빌어본다. 

 

봄, 가을은 참 좋은 계절이다. 중간의 계절.

누가 우스개 소리로 그랬다. 요즘엔 정치성향도 극좌파 극우파로 나뉘어 중간이 없고, 사회도 극빈층과 수퍼리치로 점점 나뉘어져 중산층이 설 곳이 사라지고, 이상 기온으로 계절마저 겨울과 여름의 중간이 점점 사라지는듯 하다고. 맞는 말인것 같다. 


전엔 모든 면에서 선명한 것, 좀 더 분명한 것을 찾으려 노력했다면 요즘엔 ‘중도(中道,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 도리)’ 의 의미를 새삼 귀하게 여기게 된다. 민화의 채색기법인 ‘바림’ 이 강렬한 오방색의 사이를 조화롭게 이어주며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시키듯 뭐든 중간층이 두터워야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주위에서 부고 소식도 많이 들린다. 일주일에 한번 집 청소를 도와주던 도우미분을 3월 이후로는 뵙지 못했는데 며칠전 다시 연락이 닿으니 남편이 코로나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코로나 때문은 아니지만 아는 작가의 아버님도 건강하셨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하고, 동네 사는 지인은 아버지가 지병이 있어 걱정하고 있던 차에 생각지도 않던 어머니가 급작스레 돌아가셨다 한다. 어떤 죽음이든 죽음이란 아무리 준비해도 갑작스럽게 느껴지는게 아닐까. 특히나 장례식장도 구하기 힘들다는 요즘에 맞이하는 가족의 죽음이란 배로 더 힘들겠다 싶었다.


가까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순 없지만 어렴풋이 짐작해보자면 아마도 힘든 순간은 모든게 어느 정도 정리된 후 찾아오는게 아닐까 싶다. 예기치 못한 일상생활 속에서 문득 좋았던 추억이 생각나거나 생생하게 기억이 떠올라 부재를 실감하게 될 때가 아마 가장 슬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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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미상, 모란괴석도(2첩 병풍 중 한폭), 19세기, 종이에 채색, 45.25” H x 18” W


머니 할아버지와 어린시절을 많이 보내서 그런지 아니면 아직 가족중 돌아가신 분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뿐이라 그런지 나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추억들이 그렇다. 19살에 미국으로 떠나온 후에는 자주 만나지 못했으니 얼마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도 실감을 잘 못했다. 그런데 어느날 불쑥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를 때면 울컥한다. 외할아버지 흔들의자에 같이 올라타 놀던 기억. 할아버지 배 위에 얼굴을 대고 누워 할아버지가 배를 부풀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쉴때 마다 오르락내리락 하며 깔깔거리던 기억같은게 생생하고 따뜻하게 떠오르면 할아버지의 부재가 그제서야 속 깊은 곳으로부터 뭉클히 젖어든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신지는 벌써 수년이 지났는데 어느날 자려고 누었다가 문득 친할머니가 참 외로우셨겠구나 싶은 생각이 확 밀려오며 눈물이 난 적도 있다. 아빠한테 잘해주라고 당부하셨는데… 할머니는 그게 마지막 통화가 될 걸 아셨던걸까. 안부전화 중에 뜬금없이 나에게 아빠한테 잘해주란 말을 여러번 하셨더랬다. 


친할머니 댁이 중학교 가는 길목에 있어 늘 말썽이던 편도선이 부어 조퇴할 때면 아무도 없는 집에 가 있기가 싫어 할머니 댁에 가서 자다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가곤 했다. 외할머니와 다르게 무뚝뚝하신 친할머니는 내가 가면 별 말 없이 그저 안방을 내 주시고 마루에서 성경책을 필사하시거나 혼자 화투를 치셨다. 하지만 조용히 잘 수 있어 좋았고 연락없이 불쑥 찾아가도 늘 문을 열어주는 할머니가 계시니 아플때도 안심이 되었다. 


말년에 치매를 앓으셨던 할아버지와 단둘이 아파트에 이사와 지내시며 할머니는 하루종일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한참을 그 집에서 혼자 사셨는데 난 왜 할머니가 심심하거나 외로울 거란 생각을 여태 하지 못했을까… 시간이 훌쩍 지난 이제서야 아플 때만 찾아가지 말고 더 자주 가서  좋은 곳도 같이 다닐걸… 왜 더 살갑게 해드리지 못했을까 마음이 아린다. 


제일 먼저 세상을 떠난 친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치매를 앓으셨지만 내 기억 속 할아버지는 늘 내 손을 잡고 앞뒤로 크게 흔들며 같이 걷던 활력 넘치는 할아버지다. 치매가 걸리셨을 때도 할아버지 댁에서 우리집으로 걸어갈 일이 있어 같이 걷다 걱정이 되어 손을 잡으니 다 큰 내 손을 잡고 앞 뒤로 크게 흔드셨다. 할아버지 회사가 유치원 바로 근처라 유치원이 끝나고 회사로 찾아가면 바쁜 중에라도 꼭 로비 매점으로 내려가 골라보라며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더랬다. 펀치바와 쌍쌍바가 내 단골 메뉴였는데 할아버지와 쌍쌍바를 부숴 하나씩 나눠 먹던 순간들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아직도 나를 미소짓게 한다. 


다행히도 외할머니는 아직 살아계시지만, 요즘 그 건강하고 씩씩하시던 할머니가 자꾸 약한 소리를 하셔서 불안하다. 엄마가 직장생활을 하고 아빠가 해외출장을 자주 다녔을 때 아파트 뒷동에 사시던 할머니가 오빠와 나를 길러주셨다. 수를 세는 법, 시계를 읽는 법, 검은 콩이 건강에 좋다는 것등 실생활에 유용한 많은 것들을 모두 할머니에게 처음 배웠다. 무엇보다 할머니는 저축과 건강관리등 본인이 실행함으로서 보여주는 교육을 하신 분이라 더 존경스럽다. 증손녀와 손녀가 보고싶다하셔서 올해는 꼭 가서 함께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보려했는데 코로나로 예약했던 항공권을 다 취소시키고 내년을 기약했다. 부디 오래도록 건강히 계셔서 할머니와의 즐거운 추억을 더 많이 만들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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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백림사 회주 개산 서혜성 스님, 중도실상 – 만물의 실상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비유비공의 중도, 2015(왼쪽)/ 중도-유무의 양극단(있는 것과 없는 것)을 떠난 것, 2015


경에는 없지만 천주교에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지점인 연옥이라는 개념이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천국으로 가기엔 아직 미흡해 정화의 시간을 거치는 영혼들이 머문다고 한다. 이승에서 기도해주면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그 기도의 도움을 받아 천국으로 빨리 갈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쩐지 늘 천국에 갈 확신이 없는 나에겐 위로가 되는  곳이다. 따지고보면 반드시 천국에 갈 수 있을만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할머니 할아버지만 해도 그렇다. 친할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셨지만 엄마에게 호된 시집살이 시키신 것으로 보아 바로 천국으로 가진 못하셨을 것 같고, 친할아버지도 나한텐 더없이 다정하셨지만 살아생전 할머니 속을 많이 썩이셨다하니 연옥에 좀 머무르셨을 듯 하다. 가장 최근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도 나무랄데 없이 존경스러운 분이지만 침묵 뒤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는 아무도 알 길 이 없고 술을 엄청나게 좋아하셔서 할머니가 애를 많이 먹었으니 아직은 연옥에 계시지 않을까 싶다. 


이승에는 없지만 생생하게 기억의 파편으로 남아 순간순간 어딘가에 살아있는 사람들. 작지만 따뜻한 추억으로 가슴에 남은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건 좋았던 기억을 자주 떠올리며 기도해 천국에 가길 빌어주는 것 뿐이지만 그래도 이런 중간 지점이 있다는 것이, 죽음 너머의 누군가에게 살아있는 내가 뭔가 할 수 있는게 있다는 게 마음에 큰 위로가 된다. 


얼마 전에 엄마를 잃은 지인도 아빠의 보험 정보를 업데이트하다가 Emergency contact에서 엄마 이름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그 이름을 기록에서 지울때 비로소 엄마의 죽음이 실감나 많이 슬펐다고 한다. 아직 미혼이고, 그 집도 우리처럼 딸 하나라 아빠의 보호자로 자기 이름을 대신 적어 넣었다고 담담히 말하는데 나는 딸 아이 생각이 나 무척 짠했다. 안그래도 가족들이 다들 떨어져 있는데 아이를 하나만 낳은 것이 이럴 때는 많이 후회스럽다. 


여튼 이렇게 계절이 바뀌고 한 해가 간다. 미래를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지금같은 상황에 우리는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고 중간 지점에 기대 위안과 위로를 받으며 기도하는 수 밖에. 그렇게 한 해 한 해 누군가를 기억해주고, 또 다른 누군가의 기억 속에 좋은 추억으로 남기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수 밖에…



Stephanie_100-2.jpg Stephanie S. Lee (김소연)/화가, 큐레이터 

부산에서 태어나 예술고등학교 졸업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프랫인스티튜트 학부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후 맨해튼 마케팅회사, 세무회사, 법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딸을 출산하면서 한동안 전업 주부생활을 했다. 2010년 한국 방문 중 우연히 접한 민화에 매료되어 창작민화 작업을 시작했다. 2014년 한국민화연구소(Korean Folk Art)를 창설, 플러싱 타운홀의 티칭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전시도 기획하고 있다. http://www.stephanies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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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0.09.11 10:34
    스테파니씨가 민화의 즐거움을 알고, 민화를 배우고, 민화교실까지 열었다니 부럽네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열중해서 살 수 있다는 게 행복임을 스테파니씨는 일찍 찾아서 행복한 여인입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나도 내가 재미있고 좋아한 것을 열심히 찾아서 할려고 하는데~ 그게 뭘까가 확실하게 떠오르지를 않네요.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