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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
2020.04.28 05:35

(489) 스테파니 S. 리: 코로나 사태 '깡'으로 버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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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44) 자유와 일상

코로나 사태 '깡'으로 버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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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많이 배운게 탈이 아닌가 싶다"는 농담 섞인 푸념이 그저 우습지많은 않은 요즘이다. 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상식이라 믿었던 것들의 마지 노선이 어이없이 무너지고,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것같은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며,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불신이 분노가 되어 서로를 공격하고, 무식하고 목소리 큰 사람들의 ‘자유’가 지난 한달 참고 견뎌온, 그나마 할 수 있었던 ‘사회적 거리두기’란 대응을 무용하게 만든다. 남의 생명을 위협하는 행동은 자유가 아니라 범죄라는 것을 그들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작금의 상황이 불만스럽기 짝이 없지만 과연 이것이 누구 탓만 한다고 해결 될 수 있는 일일까?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의 잘못은 과연 하나도 없었던것일까… 그동안 존재하고 있었으나 드러나지 않았던 못난 면을 적나라하게 수면 위로 올린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인류 모두가 반성하고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다. 우리 모두가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성공신화, 돈이면 다 된다는 물질만능주의, 사람이 사람위에 군림하도록 허용한 권력. 모두 합심해 이런 신기루들을 쫒았으면서 이제와 누구탓을 하겠는가.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가진 자가 UV를 쬐고 콜로락스를 마시라는 상식밖의 말을 떠들어대도 그저 들을 수 밖에... 



1996 IMF


1996년 겨울 뉴욕에 온이후 IMF, 9/11, Blackout 까지 참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리고 올해는 COVID-19. 지난 큰 사건사고들도 무사히 넘겼는데, 이번엔 대체 무엇이 다른건지 전례없는 무기력증과 함께 한달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미국에 온지 2년 남짓 되었을 때, 많은 유학생들을 한국으로 돌아가게 했던 IMF로 인해 휴학을 해야했다. 미국 생활이 익숙치 않을 때였지만 재수하기 싫어 울며 겨자먹기로 떠나온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생각해보지도 않은 일이라 이곳에 남아 버티기로했다. 이민법상 학교를 다니고 있지 않은 유학생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야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심전도 검사에서 이상이 나와 장시간 비행이 위험하니 복학 전까지 미국 체류가 허용된다는 사유서를 제출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래도 당분간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해야했기에 한국신문에 난 구인광고들을 보며 일할 곳을 찾았다. 그때 ‘카페’ 라는 것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시간과 급여가 매력적인 카페 구인광고를 보고 주소를 찾아가보면 어김없이 커피숍이 아니라 룸까페였다. 무서워서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32가 한인타운에 그렇게 룸카페가 많은지 그때 알았다. 젊은 사람들이 가는 일반 호프집 구인광고도 꽤 보여서 인터뷰를 두어번 갔었지만 학생이 멋부리는 것을 죄악 시 여기는 보수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지라 어수룩하고 촌스럽기 이를데 없던 나는 다행히(?) 유흥업소에 어울리지 않아 퇴짜를 맞았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없어진 ‘맨하탄 몰’이라는 백화점 안에 있는 속옷 매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 해보는 사회생활이라 서러운 적도 더러 있었지만, 주인이 한국분이라 사정을 봐줘 현금으로 주급을 받으며 일할 수 있었다. 그 덕에 휴학 기간을 잘 넘기고 다시 복학할 수 있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그땐 어리고 쌩쌩해서 열심히 노동하고 신나게 놀기도 하며 즐겁게 보낸 것 같다. 학창시절 동안 만난 친구들은 다 한국으로 떠났으나 이때의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01 9/11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고 맨해튼 27가의 마케팅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출근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가을날 아침 직장동료한테 월드트레이드센터(WTC)가 무너졌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엔 왜 저렇게 법석을 떠나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잠시 후 펜타곤까지 공격당했다는 뉴스를 듣고는 정신이 번쩍들어 어서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그리 멀지 않은 24가에 위치한 학교에 다니고 있던 남편과 통화가 되어 학교와 회사 중간 지점인 25가 3rd Ave.에서 만나기로 하고 회사를 나왔다. 거리로 나오니 멀리에서 연기도 보이고 쏟아져나온 인파로 어수선한데다 전화까지 불통이라 길이 엇갈릴까 불안했지만, 다행히 만나기로 한 곳에서 무사히 남편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 25가에 살고있던 남편 지인과 연락이 닿아 그 분의 아파트에서 대중교통이 다시 개통될때까지 기다렸다. 저녁에서야 LIRR을 타고 퀸즈 우드사이드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연일 뉴스에서 보여주는 영화의 한 장면같은 붕괴 장면들을 보고나서 그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알았다.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에는 비할 것이 못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멋진 뷰와 라이브 재즈가 환상적이라 꼭 다시 가보고 싶었던 월드트레이드센터 꼭대기에 있던 Windows on the World 를 다시 못간다는 사실도 참 아쉽다. 



2003 Blackout


얼마 지나지 않은 2003년엔 대정전을 겪었다. 그때는 기차까지 끊겨 맨하탄에서 우드사이드 69가 까지 퀸즈보로다리를 걸어서 건너왔다. 그날따라 하필 왜 굽높은 샌들을 신고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사람들이 다 함께 걸어와서 그런지 처음 걸어본 길도 잘 찾았고 크게 힘들다는 생각없이 집까지 걸어왔다. 걸어오다 만난 한국분은 댁이 롱아일랜드쪽으로 한참 더 들어가야 해서 해떨어지기 전까지 걸어가기엔 너무 멀었다. 저녁에 차를 불러 타고가기 전까지 우드사이드에 있는 우리집에서 잠시 함께 지내기도 했다. 냉장고가 꺼져 음식이 상한게 좀 불편하긴 했어도 여름밤 촛불을 켜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나름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며 이 사태도 잘 지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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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 Virtue - Courage, Stephanie S. Lee, Vine black, natural mineral pigment and ink on linen, 25.5˝ (H) x 17˝ (W)


2020 COVID-19


느 하나 작은 사건들은 아니었지만, 금방 지나가서 그랬는지, 생활에 제약을 크게 받지 않아서 그랬는지 그리 힘들다는 생각 없이 잘 넘긴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 사태는 장기전인데다 활동 반경에 제약을 받아 일상생활이 불편해지니 그 여파가 큰 것 같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에게는 마늘과 쑥으로 백일을 버티면 사람이 된다는 기약이나 있었지, 이건 몇달, 몇년이 가도 속시원한 해결책이 없으니 미래가 불투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인에 대한 불신을 품게해서 심리적으로 더 불안한게 아닌가 싶다. 


지나고 보면 지난 모든 어려움 속에는 그래도 함께할 사람들이 있었다. 같이 일하던 친구들, 본인의 집에 우리를 잠시 쉬게 해준 지인, 거리를 나란히 걷던 사람들… 그런데 이번 사태는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없게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므로, 가족마저 멀리해햐 하는 몹쓸 병. 할머니가 손자들을 못보고, 가까운 이웃들도 초대할 수가 없다. 이마에 ‘감염자’라고 써 있으면 비감염자들끼리라도 교류를 할 수 있을텐데 이건 마피아 게임처럼 서로를 속이는 것도 아닌데 무증상 감염자들이 눈에 보이질 않으니 누구를 피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현재로선 별다른 방도가 없으니 떨어져 있는게 최선이라 외출과 접촉을 차단하며 지내고는 있는데 가정폭력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생긴다고 하고 ‘자유를 달라’는 사람들의 집단 농성까지 시작되고 있으니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격리 기간이 5월 중순까지 연장되었지만 이대로라면 한달 후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게 없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악착같이 한달을 버텼고, 또 한달을 꼼짝않고 버티려고 하는데 그것마저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 답답하고 허무한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격리 기간 중 바이러스와 사람들은 피했지만 그간 유기하고 유예했던 집안의 모든 것들과 마주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일주일에 한번씩으로 미루거나 방과 후 학교와 도우미분의 도움을 받던 아이 교육과 집안 일들, 설거지와의 한판승부, 빨래와 청소를 향한 정면돌파… 내가 먹을 밥, 내가 사는 곳을 깨끗이 하는 일, 내 아이를 가르치고 기르는 일, 내 물건을 처분하는 일…  모두가 남의 일도 아닌 내 일들이고, 어쩌면 오래전부터 당연히 내가 했어야 하는 일들을 하는 것인데, 어째서 이렇게 하기 싫고 힘들까. 그동안 마땅히 했어야 할 나의 일들을 얼마나 남의 손에 맡기며 살아 왔던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림과 책을 사랑하고,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내향적인 사람인줄 알았던 내가 실은 티비를 좋아하고 누가 시키지 않으면 한없이 퍼지는 의지박약한 인간이었구나 하는 뼈때리는 성찰도 하는 중이다. 시간만 생기면 해야지 했던 일들은 락다운이 해제되거든 해야지… 로 또 미뤄진다. 이대로 가다가는 5월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면 오히려 적응하지 못할까 걱정이다. 


사실 따지고보면 굶는 것도 아니고, 잠을 못자는 것도 아니다. 전기도 들어오고, 건물이 폭파된 것도 아니고, 느리지만 관공서도 운영되고 있으니 크게 변한 것도, 그다지 고통스러울 것도 없는데 왜 이리 물에 뜬 해파리마냥 사정없이 풀어지는지 모르겠다. 퍼지려거든 맘편하게 푹 퍼지던지, 막상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 머릿 속으로는 왜 또 자꾸 ‘해야지되는데, 해야지 되는데…’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일을 겪으며 자유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된다. 자유롭게 쓸 시간을 실컷 줬는데 집 청소 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밖에 나가겠다고 자유를 부르짖을 명분이 있나? 그것은 어쩌면 집안에서 해야 할 일을 외면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달남짓 퍼져있자니 일상이 무너지는것은 자유를 잃는 것 보다 치명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강제적 제약을 줘서라도 안간힘을 다해 지켜야 하는게 아닐까 싶다. 상도덕도 무너지고, 상식도 무너지고, 인간 사이 신뢰도 흔들리는데 일상마저 무너지면 무엇이 더 남겠는가. 규칙적인 일상이 있어야 자유도 의미있는 법이다. 


현대사회에서 성공하려면 이 여섯가지 덕목이 있어야 한다던데 요즘 같은 때는 끈도, 꾀도, 끼도, 꼴도, 꿈도 다 필요없고 용기를 내어 깡으로 버텨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Stephanie_100-2.jpg Stephanie S. Lee (김소연)/화가, 큐레이터 

부산에서 태어나 예술고등학교 졸업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프랫인스티튜트 학부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후 맨해튼 마케팅회사, 세무회사, 법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딸을 출산하면서 한동안 전업 주부생활을 했다. 2010년 한국 방문 중 우연히 접한 민화에 매료되어 창작민화 작업을 시작했다. 2014년 한국민화연구소(Korean Folk Art)를 창설, 플러싱 타운홀의 티칭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전시도 기획하고 있다. http://www.stephanies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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