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링컨센터 필름소사이어티가 11월 25일부터 내년 1월 1일까지 왕가위 감독의 전작 11편을 상영하는 회고전 'World of Wong Kar Wai'를 연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1988년작 '열혈남아'부터 '아비정전' '중경삼림' '동사서독' '타락천사' '춘광사설' '화양연화' '2046' '에로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동사서독 리덕스' '일대종사'를 대부분 복원판으로 상영한다. 티켓: $12.

https://virtual.filmlinc.org/page/world-of-wong-kar-wai

 

NYFF58 (9/17-10/11) <5> 화양연화(In the Mood for Love)' ★★★★★ 

'영상의 마술사' 왕가위 감독은 어떻게 화면을 구성했나?

황홀한 슬픔의 로맨스, 고독과 갈망의 시네마

 

1.jpg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by Wong Kar Wai. NYFF58

*예고편 https://youtu.be/dWVDZ98AFhI

 

'탐미주의 영상의 귀재' 홍콩 감독 왕가위(Wong Kar-wai)의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가 나온지 20년이 흘렀다. 2020 뉴욕영화제에서 '화양연화'의 제작 20주년을 맞아 4K 디지털 복원판으로 리바이벌 상영한다. '화양연화'는 2000년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양조위)과 촬영(크리스토퍼 도일/ 이병빈)과 미술/의상디자인(장숙평)이 예술성취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그해 부산국제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상영된 바 있다. 

 

'화양연화'는 세기말적인 감성의 로맨스다. 1962년 홍콩에 사는 유부남 초모안(양조위 분)과 유부녀 소리첸(장만옥 분)은 1997년 중국 대륙에 이양될 홍콩의 운명처럼 결혼 자체가 불행해 보인다. 각 배우자가 불륜에 빠졌기 때문이다. 모안과 리첸은 1960년대의 관습을 따르기 위해 정절을 지키려 안간힘을 쓴다. 이들이 사는 좁은 아파트 사람들은 시끌벅적하게 어우러져 종일 마종놀이를 하면서 지낸다. 한편, 두 남녀는 이 좁은 공간에서 배우자들의 배신으로 인한 절망과 외로움으로 인해 감정적으로 폭발한다.  

 

 

'아비정전(Days of Being Wild /阿飛正傳, 1990)'에 이어지는 '화양연화'는  '2046'(2004)의 3부작으로 완결된다. '화양연화'는 영국 BBC에 의해 21세기 최고의 영화 #2위, 영국 가디언지에 의해 21세기 최고의 영화 #5에 선정됐다.

 

 

000001.jpg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by Wong Kar Wai. NYFF58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어 고개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 버렸다."

1962년 홍콩, 상하이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한 아파트에 두 가구가 이사온다. 신문사 편집기자 초모안(양조위/토니 륭 분)과 무역회사 비서 수리첸(장만옥/매기 청 분)은 결혼한 몸이다. 모안의 아내와 리첸의 남편은 바쁘다는 핑계로 이들을 외롭게 내버려 둔다. 

 

어느날 모완과 리첸은 핸드백과 넥타이로 자신의 부인과 남편이 불륜관계라는 것을 알게된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이들은 서로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게된 동기를 알고자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상황극을 연기하면서 서로 의지하게 된다. 신문에 무협연재 소설을 쓰고 싶은 모안과 영화를 좋아하는 리첸은 서서히 서로에게 빠져든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영화의 라스트 씬은 싱가포르 신문사에서 일하는 모안이 캄보디아 유적지 앙코르바트 사원의 벽 구멍에 비밀을 속삭이면서 리첸과의 비밀스러웠던 사랑을 봉인하는 장면이다. 모안을 위에서 어린 승려가 지켜보고 있었다. 

 

 

3.jpg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by Wong Kar Wai. NYFF58

 

할리우드 영화 '폴링 인 러브(Falling in Love, 1984)'의 로버트 드 니로와 메릴 스트립,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 County, 1995)'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 '언페이스풀(Unfaithful, 2002)'의 다이안 레인과 올리비에 마티네즈는 불륜에 촛점을 맞춘 영화다. 왕가위 감독은 대신, 불륜의 피해자인 남편과 부인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화양연화'에서 모안의 부인과 리첸의 남편은 뒷모습과 목소리로만 등장할 뿐이다. 관객은 불륜 커플의 얼굴을 모르는 채 이야기 속에서 이들이 일본에서 바람을 피우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게 된다. 배우자들의 부재(不在)와 불륜(不倫)은 모안과 리첸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 

 

왜 왕가위 감독은 1962년에서 시작했을까? 상하이에서 태어난 왕가위는 1962년, 다섯살 때 가족과 모택동의 문화혁명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국경이 봉쇄되는 바람에 누나, 형과 떨어져 10년간 이산가족이 됐다. 갑자기 새로운 도시에서 이민자로, 외아들로 자라면서 언어적, 문화적으로 외로움을 뼈저리게 느꼈던 시절이었다. 영국이 지배하던 자그마한 홍콩은 국가와 도시 사이에서 정체성이 불안정했다. 왕가위는 그 시기 자신의 가족처럼 상하이를 떠나 홍콩으로 이주해 살게된 커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화양연화' 미장센: In the Mood for Love, Mise en scène

 

t1.jpg 왕가위 감독, 뉴욕, 2013

 

그래픽디자이너 출신인 왕가위 감독은 모안과 리첸의 관계를 풍부한 시각적 언어로 그려낸다. 배우, 구성, 무대장치, 의상, 소품, 조명 등 카메라 앞의 모든 시각적 요소인 '미장센(mise en scène/ placing on stage)'를 통제하며 이야기를 보여준다. 당대 홍콩 최고 배우 양조위(Tony Leung)과 장만옥(Maggie Cheung)의 섬세한 연기와 함께 선(line), 색(color), 꽃(flowers), 의상(costume), 비(rain), 시계(clock), 거울(mirror), 빛(lighting)라는 팔레트를 구사한 촬영(camera)트에 감각적인 음악(music)을 입히면서 '화양연화'는 왕가위 특유의 멜란콜리하고, 고혹적이며, 황홀하면서도 슬픈 러브 스토리가 된다. 

 

그는  미장센의 거장이다. '화양연화'를 촬영, 조명, 미술, 의상, 음악을 중심으로 다시 보았다.  

 

 

#촬영 Cinematography: 구도 Composition/Framing 

 

framing1.jpg

Framing  for Secrets: 모안과 리첸을 둘러싼 공간들은 닫혀있다. 좁은 공간에서 배우자의 배신으로 인해 두 남녀는 더욱 더 소외감을 느낀다.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by Wong Kar Wai. NYFF58

 

'화양연화'는 배우자들에게 배신당한 유부남과 유부녀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다. 홍콩의 좁디좁은 아파트에서 같은 건물 아줌마, 아저씨들의 방해와 간섭 속에서 모안과 리첸은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왕가위와 전작('열혈남아', '아비정전', '중경삼림', '해피 투게더', '동사서독', '일대종사' 등)에서 함께 작업했던 호주 출신 촬영기사 크리스토퍼 도일(Christopher Doyle/ 두가풍)과 대만 출신 이병빈(Mark Lee Ping-bin)은 좁은 공간에서 두 남녀가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며 친밀해지는 과정을 훔쳐보듯 포착한다. 

 

 

framing2.jpg

Another Wall: 모안과 리첸은 자신의 배우자들처럼 불륜하지 않을 것을 스스로 맹세한다. 두 사람 사이엔 선이 있고, 두사람은 선이나 선육중한 벽에 갇혀있다.  

 

이병빈은 문을 열어놓고 관찰하는 화면구도를 애용했던 대만 감독 허우 시아오셴 감독의 콤비 촬영감독이다. 이들은 '동년왕사' '연연풍진' '희몽인생' 등에서 함께 작업했다. '화양연화'에서도 좁은 아파트 부엌과 공용 공간은 문에 의해 갖혀 있고, 카메라는 그들을 응시한다. 열린 문, 창문과 벽, 창틀 속에 갖힌 모안과 리첸을 포착한다. 이는 카메라의 관음주의(voyeurism)의 시선이자, 이웃에게 들킬까봐 두려워하게 되는 주인공 남녀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동시에 담고 있다. 

 
 
window.jpg
Window Frames: 창문은 모안과 리첸이 숨을 쉴 수 있는 장치다. 이들은 창틀에 갇혀있다가 그 창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마신다. 그 공기의 이름은 사랑이라고나 할까.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by Wong Kar Wai. NYFF58
 
 
solitude.jpg
Composition of Solitude/고독의 구도: 리첸과 모안은 결혼했지만, 불행하다. 배우자들의 불륜으로 절망과 고독에 빠져 있다. 그들의 트라우마는 서로를 향한 갈망으로 변해간다. 영국의 비평가 토니 레인스(Tony Rayns)는 '화양연화'를 '망설임과 후회의 영화"라고 썼다.
 
 
distancing.jpg
Distance/거리 두기: 물리적으로 친밀한 공간에서 정신적으로는 멀어져야 하는 관계. 감정은 이끌리지만, 이성적으로는 절제해야만 하는 모안과 리첸. 왕가위 감독은 슬로우 모션으로 둘의 관계를 왈츠처럼 우아하게 보여준다. 
 
 

#결혼과 관습이라는 감옥 Caged Birds 

 

lines.jpg

Caged Birds Singing: "우리는 그들과 다르잖아요." 새장 속에서 우는 새들.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by Wong Kar Wai. NYFF58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Parasite)'은 계단의 영화"라고 말했다. 박사장 부부는 김기사 가족이 선(line)을 넘어서는 것을 경계했다. 기생충은 계급사회의 욕망을 예리하게 보여준다.  

 

'화양연화'에서 모안과 리첸이 만나는 오픈된 공간은 한적한 골목길이다. 왕가위 감독은 이들의 모습을 감옥같은 창살을 걸쳐 찍음으로써 금지된 관계에 빠질 위험이 있는 남녀의 심리와 사회의 규범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결혼은 함정이며, 배우자에게 배신당한 심정은 창살 없는 감옥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 창살은 또한 관습이기도 하다. 새장 속의 새들은 외로움에 흐느껴 울고 있다. 창살 속에서 걷는 두 사람의 그림자는 거울과 같은 효과를 보여준다. 

 
"우린 그들과 다르잖아요." "저는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아요." 모안과 리첸은 바람을 피우는 배우자들과는 달리 선을 넘지 않려 안간힘을 쓴다. 불륜하는 배우자들이 '혼란(chaos)'를 상징한다면, 도덕주의자들로서 모안과 리첸은 질서(cosmos)'의 메타포일 것이다. 
 
 

#훔쳐보기 시선 Voyeurism 

 

back800.jpg

back2.jpg

Rear Shots: 인간의 뒷 모습엔 쓸쓸함과 외로움이 배여있다. In the Mood for Love, 2000) by Wong Kar Wai. NYFF58

 

'화양연화'의 카메라는 관음증(觀淫症, voyeurism)적이다. 스토커처럼 모안과 리첸의 뒷 모습을 따라 잡는다. 사실 우리가 볼 수 없는 뒷 모습은 우리의 진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깝다. 카메라는 양조위와 장만옥의 뒷모습으로 외로움을 극대화하며, 손과 발의 클로즈업으로 이들의 미묘한 감정을 표현한다. 

 

두 남녀가 도덕성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날지 감시하는듯한 카메라는 때로 눈(eye)의 윤곽으로 프레임된다. 그들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참견하기 좋아하는 아파트의 이웃의 시선처럼 지켜본다.   

 

 

back700.jpg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by Wong Kar Wai. NYFF58 

 

 

#거울 Mirrors 
 
mirrors800.jpg
Mirror Images: 도덕적인 나, 감정에 충실한 나, 타자의 시선에서 보여지는 나, 다른 세계의 나까지 모안과 리첸의 복잡한 심리를 보여주는 거울 장면. 
 
독일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Rainer Werner Fassbinder, 1945-1982) 감독은 실내 드라마에서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특히 거울을 즐겨 비치했다.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에서는 문과 창틀, 벽에 갖히고, 거울에 의해 분리된 두 남녀가 등장한다.  
 
이 닫힌 공간은 배우자들의 불륜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결혼의 관습에서 탈출할 수 없는 도덕성과 함께 모안과 리첸의 순수한 만남마저 주위 시선에 감시되는 속박의 상황을 보여준다. 여기에 왕가위 감독은 거울을 비치해 모안과 리첸의 2중, 3중 모습을 담아낸다. 
 
거울은 나를 인식하는 나르시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의식, 남들에게 보여지는 이미지, 그리고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문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거울에 포착된 모안과 리첸은 정조를 지켜야하는 배우자로서의 갈등과 감정에 충실하고 싶은 욕망, 그리고 사회의 가십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분열되어 보인다. 
 
왕가위 감독이 미술감독을 맡았던 2015년 메트로폴리탄뮤지엄 패션 특별전의 타이틀은 'China: Through the Looking Glass'였다.  
 

 

#클로즈 업: 감정의 극대화 Close-up 

 

cu2.jpg

cu800.jpg

 

"인생은 클로즈업으로 보여지면 비극이요, 롱숏으로는 코미디다."

-찰리 채플린-

 

영화는 연극과 달리 감독이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을 강조할 수 있다. 배우의 얼굴 연기야말로 가장  심리를 표현하는 방법이지만, 손가락이나 담배, 혹은 다른 소품을 클로즈업함으로써 인물의 감정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왕가위 감독은 리첸의 핸드백과 모안의 넥타이로 배우자들의 불륜을 알아채게 만들었다. 또한, 두 남녀의 내면적 갈등을 클로즈업을 통해 표현한다. 골목길 어귀에서 서로의 배우자가 불륜을 시작하게 된 상황극을 하면서 리첸은 손가락으로 건드리는 장면, 반지 낀 손의 망설일듯하다 만지는 손, 전화기를 잡은 손, 리첸의 흔적이 남은 담배 꽁초...  어느 대사보다 효과적인 이미지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할리우드 영화가 대사 중심인 반면, 왕가위 감독은 이미지로 전달하는 시네포엠으로 승화한다. '화양연화'를 무성영화로 보는 것도 근사할듯 하다. 단, 음악은 흘러야 한다.  

   

 

clocks.jpg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사랑은 기억에 관한 것이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올려졌던 윌리 데커(Willy Decker) 프로덕션의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에서는 초대형 시계가 죽어가는 주인공 비올레타의 운명을 암시했다. '화양연화'에서 사무실과 아파트의 커다란 시계가 종종 잡힌다. '화양연화'가 인생에서 꽃과 같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라는 뜻이기에 왕가위 감독은 30대의 두 남녀가 불행한 결혼 속에 구속되어 인생의 황금기를 허송세월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염려를 하게 만든다. 시간은 흘러가는데...감정은 깊어가는데... 카메라의 패닝은 공간의 이동과 함께 시간의 경과를 담아낸다. 

 

 
lighting4.jpg

 

'화양연화'에는 실내 장면과 밤의 골목, 계단 장면이 많다. 전반적으로 로키(low-key) 조명으로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주인공들의 외로움을 전달한다. 하지만, 곳곳에 흔들리는 전구와 가로등의 불빛은 밤 하늘의 달처럼 모안과 리첸의 관계를 지켜보고 있다.    

 

 

#음식남녀 Eat, Drink, Man, Woman

 

food4.jpg

국수와 스테이크: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by Wong Kar Wai. NYFF58

 

원래 왕가위 감독이 '화양연화'를 구상했을 때는 홍콩의 음식과 사람들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었다. 왕가위는 3개의 에피소드로 #1 국수집에서 만난 남녀가 서로 배우자의 불륜을 알게 된 후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친밀해져가는 이야기, #2 패스트푸드 스토리 #3 유괴자와 피해자로 구성했다. 제목도 'A Story of Food'였다. 촬영하면서 첫 에피소드가 장편이 되었다. 늘 완성된 시나리오 없이 촬영하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왕가위는 결국 음식보다 러브 스토리로 전환하게 된다.  

 

당연히 음식은 '화양연화'에서 중요한 모티프다. 리첸은 남편이 출장간 사이 청삼을 차려입고 홀로 국수를 사러 나간다. 아내가 바람 피우는 사이 모안도 홀로 식사를 한다. 나 홀로 식사 장면은 배신당한 이들의 외로움을 증폭한다. 모엔과 리첸이 배우자들의 불륜을 확인한 후 상황극을 할 때 이들은 비로소 타자가 되어 스테이크를 게걸스러울 정도로 맛있게 먹는다. 모안은 리첸의 스테이크에 부인이 늘 먹는 겨자 소스를 떠주며 "매운 거 좋아하세요?"하고 묻는다. 모안의 부인은 매운 음식을 좋아하고, 자유로운 영혼일 터이다. 하지만, 리첸의 입맛은 다르며, 도덕관도 차이 난다.  

 

모안과 리첸이 억제했던 성욕은 식욕으로 폭발한다. 식사는 이들의 욕망과 갈증을 해소하며, 외로움을 잊을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이들이 방안에 갇힌 채 국수를 나누어 먹는 장면은 러브 씬처럼 로맨틱하다.      

 

 

#의상: 21벌의 청삼/치파오 Chaeongsam

 

2.jpg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by Wong Kar Wai. NYFF58

 

왕가위 감독은 2015년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의 중국패션 특별전 'China: Through the Looking Glass, 5/7-8/16)'의 아트 디렉터로 전시를 총지휘했다. 그때 한 섹션에서 '화양연화' 속 장만옥의 의상을 편집한 비디오가 소개됐다. 

 

'화양연화'의 장숙평(William Chang Suk-ping/ 張叔平) 미술감독(편집도 겸한다.)은 리첸 역의 장만옥에게 중국전통 의상 청삼(Cheongsam/ 치파오/ 旗袍)를 무려 21벌이나 입혔다. 리첸은 무역회사 비서로 일하지만, 집 안에서도, 국수 사러 나갈 때도 청삼을 차려 입는다. 집 주인도 청삼을 입지만, 리첸의 화려한 플로럴 패턴이나 기하학적 문양의 청삼은 고혹적으로 아름답다. 

 

 

3.jpg

 

청삼은 몸의 라인을 강조하며, 높은 칼라에, 슬릿이 깊게 파인다. 문화대혁명 때 사상, 문화, 풍속, 관습의 4가지 구습 타파(파사구, 破四舊)가 휘몰아치게 된다. 리첸에게 청삼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결혼이라는 몸을 조이는 관습의 상징으로 보인다.

 

 

012.jpg

 

한편, 모안의 부인은 뒷목이 깊게 파진 붉은 톤의 원피스를 입고 등장한다. 리첸이 단정한 올림 머리 차림인 반면, 모안의 처는 단발 커트다. 의상과 헤어스타일이 두 여인의 캐릭터를 드러낸다. 리첸은 전통, 보수, 순수, 과거 지향적인 인물로, 모안의 부인은 자유방임형의 인물이다. 모안은 가볍게 불륜이라는 선을 넘었다. 

 

'화양연화'의 제목처럼 리첸이 노란 꽃이 활짝 핀 꽃 청삼을 입고, 꽃 벽지로 장식되고, 꽃 전등에 생화가 꽃힌 화병이 있는 아파트 거실에서 서서 차를 마시는 모습은 리첸의 젊은 날, 인생의 황금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는 불행할 뿐이다. 때문에 거실의 빛이 어둡다.  

 

 
57.jpg
 
청삼이라는 전통의상은 아름다운 옷이지만, 기능성에서는 떨어진다. 모안의 부인은 활동이 편한 빨간색 플레어 원피스로 등장한다. 우리는 뒷모습 밖에 볼 수 없지만. 모안의 부인이 감정을 따라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 바람을 피웠다면, 리첸은 꽃처럼, 청삼 차림의 인형처럼 그 자리에 서 있다. 
 
리첸이 싱가포르 호텔에서 하이힐 대신 슬리퍼를 챙기는 것은 그녀가 기능성, 즉 자유로움을 선택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적색 Color Red

 

reds.jpg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by Wong Kar Wai. NYFF58

 

중국인들에게 붉은 색은 기쁨의 색이다. 사업, 미모, 스타에 붉을 홍(紅)이 들어간다. 서양에서 붉은 색은 정열, 사랑의 상징이다. 하지만, 흰색과 검은색은 죽음을 암시한다. 

 

리첸이 모안이 일하는 호텔로 찾아가는 격정의 장면에서는 빨간색 레인코트 속에 흰 바탕에 검은 꽃이 박힌 청삼을 입고 있다. 리첸의 불타오르는 심정과 타버린 꽃을 은유한 의상이다. 호텔 복도에 휘날리는 붉은 색 커튼은 욕정의 암시한다. 영화 프롤로그와 엔딩 타이틀 배경도 붉은 색이다. 

 

모안이 묵고 있던 호텔방은 2046호. 홍콩반환(1997) 50주년을 즈음한 해이며, '화양연화'의 속편 '2046'(2005)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는 왕가위 감독이 '화양연화'를 홍콩의 반환으로 인한 정체성 혼란을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초록색 모자(뤼마오즈/ 绿帽子)는 바람난 아내를 둔 남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모안과 리첸이 식당에서 만나 배우자들의 불륜을 확인할 때 흐르는 냇 킹 콜의 노래가 "초록색 눈(Green Eyes(Aquellos Ojos Verdes)"인 점은 우연일까? 계산된 것일까?

 

 

# 음악 Music: 유메지의 테마, 냇 킹 콜, 마이클 글라쏘

 

music1.jpg

'화양연화' 사운드트랙 https://youtu.be/XJiJYB2_m_s

 

왕가위 감독은 '중경삼림(Chungking Express, 1994)'에서 1960년대 미국 그룹 마마즈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와 90년대 그룹 크랜베리(The Cranberries)의 "Dreams"을 삽입하며 음악적 감각을 입증했다. '화양연화' 역시 왕가위가 영상의 마술사일 뿐 아니라 음악성이 뛰어난 감독임을 확인할 수 있다. 

 

'화양연화', 그 제목은 1930-40년대 상하이에서 인기를 누렸던 주선(Zhou Xuan)의 '화양적연화(花樣的年華, Hua Yang De Nian Hua)'에서 따왔다. 영화 후반부에 모안이 부인의 생일날 라디오 신청곡으로 흘러나온다. 노래 도입부에 "Happy Birthday to You"로 시작한다.  

 

테마 음악 'Yumeji's Theme(夢二のテーマ)'은 사실 일본 스즈키 세이준(Seijun Suzuki) 감독의 영화 '유메지(Yumeji/ 夢二, 1991)'에서 재활용한 곡이다. 우메바야시 시게루(Shigeru Umebayashi/ 梅林茂)가 작곡한 이 곡은 4인을 비유하듯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베이스가 어우러진다. '화양연화'의 로맨스는 3각 관계가 아니라 4각 관계. 리첸의 마음을 대변하는듯한 구슬픈 바이올린의 선율은 첼로와 베이스 탱고 리듬이 시사하는 엄격한 사회의 관습과 윤리를 상징하는듯한 탱고 리듬의 불협화음이 흐른다. 그래서 바이올린의 슬픔은 더 증폭된다. 우메바야시는 '화양연화'의 속편 격인 '2046'(2004)에서 다시 왕가위 감독과 작업하게 된다. 

 

 

music3.jpg

'화양연화' 사운드트랙: '유메지의 테마', '화양적연화', 그리고 냇 킹 콜의 스페인 음반.

 

로맨틱한 저음의 냇 킹 콜(Nat King Cole) 노래가 3곡이나 흐르는 것도 주목할만 하다. 스페인어로 부른 볼레로풍의 "Green Eyes(Aquellos Ojos Verdes)" "I Love You(Te Quiero Dijiste)" "Perhaps, Perhaps, Perhaps(Quizás, Quizás, Quizás)"는 이국적이다. 왕가위 감독이 자라던 60년대 홍콩에는 필리핀 이주자들이 많았고, 때문에 라틴 음악도 유행했다. 왕가위는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한 향수로 냇 킹 콜을 택했다. 

 

'중경삼림'의 테마곡(Baroque)을 작곡했던 마이클 갈라쏘(Michael Galasso)의 '앙코르 와트 테마(Angkor Wat theme)'는 '유메지'에 대응하듯이 바이올린과 첼로의 듀오인데, 탱고 리듬이 완화되고 두 악기가 부동켜안고 서러워하는 느낌이다. 엇갈린 사랑,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영어 제목이 된 브라이언 페리(Bryan Ferry)의 "I'm in the Mood for Love"는 예고편에 사용됐다.  

 

 

000poster.jpg

In the Mood for Love

September 28 at 8pm@Queens Drive-In

September 28 at 8pm-October 3 at 8pm @Virtual Cinema 

https://www.filmlinc.org/nyff2020/films/in-the-mood-for-love

 

 

*영화 '화양연화'와 청삼의 매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