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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자 메이 알코트의 자전적 소설 리메이크

그레타 거윅 감독, 서샤 로난 주연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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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Women(2019) directed by Greta Gerwig

 

*'작은 아씨들' 예고편

 

어릴 적 명화극장(KBS)인가, 주말의 명화(MBC)인가에서 보았던 흑백 영화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1933)'에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아씨 한명이 있었다. 네자매중 조(Jo)다. 왈가닥 루시같은 성격의 조가 숏컷으로 나타난 장면은 잊혀지지 않았다. 아마도 마음 속에서 조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었나 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조 역할을 맡은 배우는 연기파 캐서린 헵번이었다. 영화 '작은 아씨들'은 미 대공황기 중 여성영화 전문 조지 쿠커 감독이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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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자 메이 알코트와 막내 메이 알코트가 삽화를 맡은 '작은 아씨들' 초판(1868).

 

루이자 메이 알코트(Louisa May Alcott, 1832-1888)가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쓴 자전적인 소설 '작은 아씨들'은 미국 소녀들에게는 필독서다. 여러 여성작가들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소설로 꼽기도 한다. 할리우드에서만 무성영화(1917)를 비롯, 7편이 영화로 제작됐으며, TV, 연극, 뮤지컬, 오페라까지 나왔다. 

 

1949년엔 머빈 르로이(애수, Waterloo Bridge) 감독이 컬러로 연출했을 때는 16살의 엘리자베스 테일러(에이미 역), 19살의 자넷 리(메그)가 출연했다. 페미니즘운동이 한창이던 1970-80년대는 건너 뛰었고, 1994년에야 호주의 여성감독 질리안 암스트롱이 위노나 라이더(조 역), 크리스틴 던스트(에이미 역), 클레어 데인스(베스 역), 그리고 수잔 사란돈(엄마 역)의 호화 캐스트로 리메이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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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영화(1917)부터 2019 버전까지 할리우드에서 7회 영화화된 '작은 아씨들' 

 

그리고, 25년 후 할리우드에서 가장 촉망받는 여성 감독으로 부상한 배우 출신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이 메거폰을 잡은 2019년판 '작은 아씨들'이 제작됐다. 그레타 거윅은 2017년 연기파 서샤 로난(Saoirse Ronan, 조 역)이 여고생으로 분한 감독 데뷔작 '레이디버드(Lady Bird)로 찬사를 받은 후 다시 로난과 '작은 아씨들'로 재회했다. 그레타 거윅이 직접 시나리오까지 쓴 '작은 아씨들'은 크리스마스에 개봉된 후 호평을 받으며 흥행에도 순항 중이다. 서샤 로난은 1월 5일 열릴 골든글로브상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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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Women(2019) directed by Greta Gerwig

 

'작은 아씨들'의 첫 장면은 1868년 뉴욕의 한 잡지사다. 손가락에 잉크 자국이 묻은 조(조세핀) 마치(서샤 로난 분)는 편집자 대쉬우드에게 친구의 원고라며 보여주고 있다. 긴장 끝에 출판이 결정된다. 대쉬우드는 "도덕이 안팔리는 세상"임을 강조하면서 "소녀들이 끝에 가서는 결혼하거나, 죽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출판도 하고, 돈도 벌게 된 조는 거리를 질주한다. 여성은 투표권도 없었으며, 여성 작가의 출판이란 낙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웠던 시기, 원작자 루이자 메이 알콧은 'A. M. Barnard'라는 필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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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Women(2019) directed by Greta Gerwig

 

스토리는 7년 전, 네자매의 10대 시절로 돌아간다. 에이브라함 링컨의 노예해방 정책을 두고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시대,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 사는 가난한 마치 가문의 네자매(메그, 조, 베스, 에이미)는 각자 재능을 키우며 살고 있다. 아버지 참전으로 엄마(로라 던 분)가 생계를 꾸려나간다. 첫째 딸 메그(엠마 왓슨 분)는 배우 지망생이지만, 결혼으로 커리어를 포기하고, 남자로 태어났다면, 남북전쟁에 참전했을 것이라는 조는 작가로서의 성공을 꿈꾼다. 병약하고, 수줍은 베스(엘리자 스캔렌 분)는 피아노가 특기며, 당돌한 막내를 에이미(플로렌스 푸 분)는 화가로서, 여성으로서 야망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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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웃의 부잣집 청년 로리(티모시 샬라메 분)는 조에게 매료되지만, 독신주의자인 조는 그의 구애를 거절한다. 대신 로리를 짝사랑해오고, 언니 조에 질투를 느껴온 막내 에이미가 그를 낚아챈다. 메그는 로리의 선생인 가난한 존과 결혼하고, 병약하던 베스는 로리의 할아버지로부터 피아노를 선물받지만 죽고 만다. 

 

콩코드의 딸부자집 마치 가족은 아버지의 부재로 모계사회같다. 가난 속에서 아둥바둥 살지만, 각자의 재능을 갈고 닦으며, 자매애가 애틋하다. 한편, 이웃의 부유한 로렌스 저택에서는 엄격한 할아버지와 자유를 갈망하는 손자 로리가 살고 있다. 로리의 부모가 사고로 사망했기 때문. 이 두 가족은 각각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결핍되어 있으며, 남녀의 균형이 깨져 있다.   

진 시노다 볼린(Jean Shinoda Bolen)의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Goddesses in Everywoman)'에 적용하면, 네 자매는 그리스 여신들을 닮아 있다. 첫째 메그는 관습에 따라 결혼하는 여신 헤라 형이며, 결혼 대신 작가로서의 성공이 인생이 목표인 조는 '사냥과 달의 수호신'이자 페니미스트에 가까운 아르테미스 타입이다. 수줍은 피아니스트 베스는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 형, 그리고 화가 에이미는 사랑과 미의 수호신 아프로디테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루이스 메이 알코트는 자신의 자매들에서 영감을 받아 소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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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Women(2019) directed by Greta Gerwig
 
네자매의 엄마는 조가 분노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평생 거의 매일 분노하고 있다"고 말한다. 당시 여자의 운명을 상상케 하는 대사다. 한편, 막내 에이미는 "위대해지던가, 아무 것도 아니던가 둘 중 하나"식의 태도를 보이면서 작업실에서 로리에게 당시 여자의 운명에 대해 호소한다. "재능을 닦아서 기회가 되면, 사회의 장식품이 된다. 지금 사회에서 여자의 유일한 희망은 결혼이다. 결혼은 여성에게 가치를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는 자식까지도 소유하게 된다"며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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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Women(2019) directed by Greta Gerwig

 

주인공 조는 소설 '작은 아씨들'에서 독신으로 남는 '문학의 노처녀(literary spinster)'를 원하지만, 편집자 대쉬우드의 요구에 따라 교수 프레디와 결혼하는 해피 엔딩으로 바꾸어버린다. 조가 기차역으로 달려가 프레드와 우산 속에서 나누는 키스씬은 작위적이면서도 코믹하다. 소설에서도 할리우드에서도 해피 엔딩이 정석인 것이다. 대쉬우드는 말했다. "소녀들은 결혼으로 끝나야 해! 아니면, 죽던가!"라고 충고했다. 사실 이 엔딩이 남북전쟁 시대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와 현대 할리우드 '게임의 규칙'을 농축시킨 상징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한 장면이다. 

 

조는 '작은 아씨들'을 출판하기로 하고, 잡지사 사장과 계약에서 저작권을 자신이 소유한다. 당시 여성작가의 책이 잘 팔릴 것이라는 기대가 없었기에 이 계약은 성사됐고, 조의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며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는 경제력이 생기게 된다. 이와 함께 스릴 넘치는 부분은 19세기에 활자, 인쇄, 제책,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은 시퀀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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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Women(2019) directed by Greta Gerwig

 

그레타 거윅 감독은 원작의 연대순 내러티브를 뒤죽박죽해서 과거로 플래시백한다. 현재와 과거를 교차해서 간혹 관객을 혼돈시키기도 한다. 오프닝과 엔딩이 책커버처럼 맞는 수미쌍관법은 주인공 조가 작가로서 성공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서술구조로 잘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베스의 장례식 후 바로 메그의 결혼식에 네자매가 등장하면, 관객은 헷갈리게 된다. 대하 소설을 영화로 축소할 때 생략되는 디테일은 감수하는 수 밖에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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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Women(2019) directed by Greta Gerwig

 

'신세대 메릴 스트립' 서샤 로난은 능숙하고, 섬세한 연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최근 너무 많은 영화에 출연해서 식상한 느낌을 줄 위험성도 있다. 조와 부딪히는 에이미 역의 플로렌스 푸는 당대 여성의 한계 속에서 화가로서의 열망, 언니 조와의 경쟁심을 무난하게 연기한다. 하지만, 용모와 허스키 음색까지 막내 에이미와 나이 차이가 너무 많다. 

 

엄마 마미역의 로라 던은 캐릭터에 깊이 몰입하지 못해 아쉽다. 로라 던은 그레타 거윅의 약혼자인 노아 나움백 감독의 신작 '결혼 이야기(Marriage Story)'에서 이혼 전문 변호사 역으로 맛깔스러운 연기를 보여준다. 이 시대 최고의 연기파 메릴 스트립이 서너 장면에 카메오처럼 나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한편,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Call Me By Your Name)'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티모시 샬라메는 그리스 조각상 다비드와 같은 신비스러운 마스크로 호연한다. 특히, 그가 책상 위에 올라가 창 밖의 에이미를 발견하는 장면은 사회계층의 상징하면서도 그 자신은 조각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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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Women(2019) directed by Greta Gerwig

 

그레타 거윅 감독은 '작은 아씨들'을 회화적인 이미지로 구사했다. 프랑스 출신 촬영기사 요릭 르 쏘(Yorick Le Saux)는 파리 거리 장면은 르노아르, 비치 장면은 윈슬로우 호머, 언덕은 모네의 회화, 그리고 주택가 장면은 쇠라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인상주의 화풍의 이미지를 포착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 콩코드의 설경은 마치 카드 그림을 보는듯이 운치있다. '작은 아씨들'은 시각적으로 매력적일뿐만 아니라 모차르트, 베토벤, 비발디, 브람스 등의 음악이 깔리며 귀도 즐겁다. 

 

'작은 아씨들'은 남북전쟁 당시 네 자매의 이야기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잠재해 있는 남녀차별과 여성에 대한 기대, 결혼과 커리어의 선택 문제 등 관통하는 주제가 흐른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지만, 종종 지뢰처럼 터지는 가부장적인 사고들의 봇물. 그래서 그레타 거윅의 2019판 '작은 아씨들'은 여성들에게 아직도 어필하는듯 하다. 1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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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Women(2019) directed by Greta Gerwig

 

 

*배우 출신 그레타 거윅의 감독 데뷔작 '레이디 버드(Lady Bird)' ★★★★

*아네트 베닝, 서샤 로난 출연 '갈매기(The Seagull)' ★★★

*'브루클린(Brooklyn)' 옛날옛적 뉴욕, 이민자들의 초상 ★★★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Call Me By Your Na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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