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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감독의 '벌새'(House of Hummingbird) ★★★★☆ 

1994년 서울, 열네살 김은희 "제 삶도 언젠가 이 날까요?"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제너레이션 14+), 트라이베카영화제 국제극영화상, 여우주연상, 부산영화제 관객상, 백상예술대상 감독상, 대종상 신인감독상, 청룡영화제 각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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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Hummingbird' Trailer ('벌새' 예고편)


코로나 팬데믹 직전까지만 해도 한국문화는 K-Pop, K-Drama, K-Film, K-Beauty, K-Food 등 한류의 파고가 높았다. 올 2월 9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Parasite)'이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과 국제극영화상(외국어영화상)을 석권하면서 한국영화는 역사상 최고점에 올랐다. 코로나19으로 문화생활도 동면 중이지만, 김보라(Bora Kim) 감독의 데뷔작 '벌새(House of Hummingbird, 2018)는 다시 한국영화의 힘을 느끼게 해주는 걸작이다. 


'벌새'는 올 6월 26일 인터넷을 통한 버추얼 시네마로 미국 내에 개봉됐다. 극장에 가는 대신 랩톱이나 스마트폰으로, 혹은 TV 모니터에 캐스트해서 볼 수 있다. 티켓은 $12이며, 5일간 무제한으로 감상이 가능하다. 

https://kinomarquee.com/film/house-of-humming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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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Hummingbird' directed by Bora Kim


"엄마 문 열어줘!"

아파트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는 소녀의 뒷모습이다. 대답없이 굳게 잠겨있는 문. 소녀는 자신의 집이 아닌 것을 깨닫는다. 계단을 올라가 아파트 벨을 누른다. 이번에는 엄마가 나온다. 하지만, 엄마의 관심은 소녀가 사온 파가 시들었다는 것과 가게 아줌마에 있다. 소녀는 지친 모습으로 무심한 엄마를 바라본다. 멜란콜리한 피아노 음악(마티야 스트르니자이 작곡) 흐르며, 카메라(강국현 촬영)는 소녀의 아파트에서 줌 아웃되어 황량한 단지를 보여준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1994년 여름 서울, 열네살 소녀 김은희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한다. 아파트 철문이 상징하는 소통이 단절된 가족관계, 아파트 단지로 대표되는 한국의 획일화한 삶. 그 속에서 소녀 김은희는 성장통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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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Hummingbird' directed by Bora Kim


벌새는 벌처럼 작은 새이며, 벌처럼 윙윙댄다. 영어로는 '허밍 버드(humming bird)'. 1초에 80회 정도 끊임없이 날개짓하며 꿀 찾아 다니며 4년을 살다가 죽는다고 한다. 가능성으로 충만해야할 사춘기 소녀 김은희는 그 벌새처럼 자그마한 존재이며, 그녀의 말과 생각은 한국사회에서 '윙윙' 소리처럼 무시된다.


자전적 시나리오를 쓴 김보라 감독은 여중생 김은희의 일상 공간인 집, 학교, 학원, 병원 등지를 동반하며 1994년 서울의 모습을 담는다. 미국 월드컵, 김일성 주석의 사망, 그리고 성수대교의 붕괴가 발생했던 1994년이다. 


만화 그리는 것이 취미인 은희는 주입식 공부에는 관심이 없다. 학교 담임교사는 회초리를 들고 교복 입은 학생들을 위협한다. 왼쪽/오른쪽의 이분법, (담배 피고, 연애하고, 노래방 가는) '날나리' 색출작업,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라는 가르침, 슬로건이 된 '서울대 가기' 등 군대식, 독재식, 획일화한 한국 교육 시스템을 보여준다. 은희는 교복 속에 갇혀지고, 회초리라는 폭력에 노출된 연약한 새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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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Hummingbird' directed by Bora Kim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는 자식 교육을 두고 싸움을 벌이고, 밤중에 예고없이 방문한 술취한 외삼촌은 동생(은희 엄마)가 교육받지 못한 것에 대한 하소연한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저녁식사는 늘 아버지의 스트레스 풀이와 난폭한 설교, 학업에 대한 잔소리, 그리고 기도로 이어진다. 오빠는 늘 만만한 은희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부모는 아들의 구타를 당연시 여긴다. 엄마는 은희가 여대생이 되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를 원한다. 


은희의 언니는 반항하며, 은희는 방황한다. 은희는 단짝 지숙과 일탈 행위(좀도둑질, 노래방, 클럽행)를 하며,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여자 후배의 관심에 호의를 느낀다. 체면이 중시되는 유교적 전통의 한국 사회에서는 "부모 망신"은 최대의 협박 중 하나다. '질풍노도의 시기' 사춘기 소녀 은희의 일상은 고요하게 균열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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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Hummingbird' directed by Bora Kim


은희의 유일한 탈출구는 한문 학원이다. 한문 교사 김영지는 주변 인물들 중 유일하게 은희의 말을 들어주는 인물이다. 그는 벌새같은 은희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여준다. 수업 시간 자기 소개에서 "좋아하는 게 뭐예요" "왜 좋아해요?"라고 물어주며, 관심을 보인다. 모두들 귀를 닫고 있지만, 영지 교사의 귀는 열려있다. 부잣집 딸인 그녀가 노동운동을 한 것도 억압된 계층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영지 교사는 처량한 민중가요 '잘린 손가락'를 부르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보라고 말한다.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모두들 목표를 향해 허공으로 질주하는 가운데, 영지 교사는 은희에게 몸과 손가락을 이야기해 준다. "이제 맞지마.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오빠의 폭행에 반항하고, 부모에게 알렸지만 은희는 무시당했었다. 김영지 교사와 '명심보감(明心寶鑑)'은 방황하는 은희의 삶에 다가온 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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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Hummingbird' directed by Bora Kim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마음의 문을 열고 소통할 수 있는 '우롱차 한잔의 여유'를 지닌 김영지 교사는 은희에게 멘토이자 테라피스트같다. 교사와 은희가 왼손잡이라는 것도 공통점이다. 이들이 명작소설('적과 흑'), 스케치북, 차(tea), 떡, 그리고 시간을 나누는 모습은 비정한 도시에서 따뜻한 정이 담긴 장면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잔인하게도 은희에게 마음의 언덕이 되어주었던 영지 교사를 앗아간다. 


1994년은 참으로 잔인했다. 은희는 귀밑 혹 수술을 했고, 성수대교 붕괴 뉴스를 접했다. 성수대교 붕괴는 단순한 부실 시공과 관리 부재의 참사만은 아니었다. 일류지향, 졸속주의, 결과주의, 소통의 단절, 분단 등 한국사회의 치부와 부조리함을 드러낸 비극이었다. 성수대교를 보는 은희와 언니, 그리고 언니 남자친구의 모습은 입시위주 교육에 창의성을 말살당한 청소년 세대와 그들의 암울한 미래를 상징한다. 한국사회 곳곳에 확산되고 있던 균열이 붕괴로 이어진 것이므로. 그리고, 은희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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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Hummingbird' directed by Bora Kim


'벌새'의 마지막 장면은 경주로 수학여행 가는 은희와 여학생들의 싱그럽게 들뜬 모습을 포착했다. 살아남은 이들의 삶은 계속된다. 이 수학여행은 20년 후 닥쳐올 세월호의 비극(2014. 4. 16)을 연상시키며 섬짓하게 만든다. 


하지만, 김보라 감독은 영화를 김영지 교사의 편지글로 긍정적으로 마무리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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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Hummingbird' directed by Bora Kim


가부장 의식에 젖은 은희 아버지가 집에서 뽕짝 "여러분"(윤복희 노래)를 틀고 홀로 볼룸 댄스 스텝을 밟는 모습이 은희에게 들킨다. 그때 아버지는 "테니스 스윙 연습"이라며 변명한다. 그 역시 깊은 가슴 속에서는 가사처럼 소통하고, 의지할 수 있는 형제, 친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Stand By Me.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게/ 네가 만약 음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 하고 쓸쓸할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오/ 나는 너의 친구야 오/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여/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벌새'는 은희 역을 맡은 신예 박지후의 섬세한 연기가 압권이다. 박지후는 뉴욕 트라이베카영화제 최연소 여우주연상, 영화평론가협회 신인여우상을 거머쥐었다. 김영지 교사 역을 힘주지 않은 채 열연한 김새벽은 백상예술대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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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베를린영화제에서 제너레이션 14+ 심사위원대상 수상 후 배우 이승연(왼쪽부터), 박지후, 김보라 감독, 김새벽.


동국대 연극영화과 졸업 후 컬럼비아대학원 영화과에서 수학한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에선 영화 거장들에 대한 오마쥬가 엿보인다. 은희가 귀밑 혹 제거 진단을 받고, 수술 입원하게 되는 이야기는 아그네스 바르다(Agnès Varda, 1928-2019)  감독의 클레오를 연상시킨다. 암 선고를 받은 여가수가 파리를 배회하는 이야기를 담은 흑백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Cleo from 5 to 7, 1962)'에서 클레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가득했지만, '벌새'의 여중생 은희는 무덤덤하게 수술에 임한다. 그녀에게 병원은 집보다 더 편안한 곳이다. 은희가 남자 친구 지완과 데이트하는 장면, 가족 식사 장면들은 대만 출신 에드워드 양(Edward Yang, 1947-2007)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Yi Yi, 2000)을 떠올린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서울, 1964년 겨울'(1965)엔 월부판매 외판원, 대학원생, 구청직원의 세남자가 포장마차에서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벌새'의 1994년 서울의 여중생 김은희는 또한 조남주의 베스트셀러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떠올린다. 가부장적인 한국사회에서 평범한 여자로 살아가면서 겪는 부당한 대우와 성차별을 폭로한 김지영과 1981년생 김은희는 동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이다. 김보라 감독과 조남주 작가는 어두운 기억의 저편에서 길어낸 자전적 이야기로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성차별과 부조리에 반기를 든 페미니스트들이다.   

     

김보라 감독은 장편 데뷔작 '벌새'로 백상예술대상 감독상, 대종상 신인감독상, 청룡영화상 각본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감독상, 부산국제영화제 관객상,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 대상(Grand Prix of the Generation 14plus International Jury for the Best Film), 트라이베카영화제 국제극영화 부문 최우수 영화, 여우주연, 촬영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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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HUMMINGBIRD, 2018, 139m

Directed by Bora Kim

Language: Korean with English subtitles

https://kinomarquee.com/film/house-of-humming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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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0.08.06 22:11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서 작품상, 여우주연상, 촬영상을 거머쥔 이 영화 '벌새'를 보고싶네요. 트라이베카 영화제는 혹시 영화배우 로버트 드 니로가 창설한 영화제가 아닌가요? 저 예산으로도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김보라 감독에게 큰 박수를 드립니다.
    -Elaine-
  • sukie 2020.08.06 22:15
    네, 맞습니다. 선생님. 트라이베카 영화제는 9/11 참사 다음해 2002년 로어맨해튼을 복구하기 위해 배우 로버트 드 니로 주축으로 창설한 영화제입니다. '벌새'가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서 국제극영화 부문상을 휩쓴 셈이지요.
    따뜻하고, 섬세한 영화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