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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샌프란시스코, 이철수 사건이 가르쳐주는 것 

인종차별, '정의 없는 자유' 속에서 살다간 한인 이민자의 비극적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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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Chol Soo Lee" directed by Julie Ha and Eugene Yi

 

이철수씨가 백인청년 찰스(Charles)였다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감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경원 대기자가 미국인이었다면, 퓰리처상을 수상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한인사회가 파워풀했더라면? 

이철수씨는 '센트럴파크 파이브' 피해자들처럼 배상금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철수 사건은 잊혀지지 말아야 한다.  

 

 

197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인 갱단 일원 살인누명을 쓰고 사형수로 10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난 한인 이철수씨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이철수씨에게 자유를(Free Chol Soo Lee)'이 2022 선댄스영화제(Sundance Film Festival, 1/20-30) 미 다큐멘터리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줄리 하(Julie Ha)와 유진 이(Eugene Yi) 감독이 공동으로 연출한 이 다큐는 이철수씨 석방을 위해 범아시안 캠페인을 전개했던 이철수구명위원회의 활동을 다루었다. 이철수씨는 1983년 자유의 몸으로 풀려났으며, 구명위원회는 미국내 소수계 민권운동의 모범사례로 평가됐다. 

https://festival.sundance.org

 

*선댄스영화제 2022 라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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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e Ha/ Eugene Yi

 

공동감독이자 제작자인 줄리 하는 UCLA 졸업 후 미주 한인잡지 코리암 저널(KoreAm Journal)의 편집장(2011-14)을 지냈으며, 유진 이는 브라운대 졸업 후 뉴욕타임스의 비디오 저널리스트, 영화 편집자로 일했다. '이철수에게 자유를'은 1월 21일부터 30일까지 온라인과 영화관에서 상영된다.

https://www.fcsl-film.com

 

 

1973년 샌프란시스코 이철수 사건 

누명 쓴 한인 이민자, 위대한 기자와 단합한 아시안 커뮤니티 

 

1973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빠졌고,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분쟁(욤키푸르 전쟁)으로 원유파동이 일어났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The Godfather)'가 아카데미상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으며, 호러영화 '엑소시스트(Exorcist)', 폴 뉴만과 로버트 레드포드의 '스팅(The Sting)', 스티브 맥퀸과 더스틴 호프만의 '빠삐용(Papillon)'이 흥행에 성공했다.

뉴욕에선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 빌딩이 세계 최고로 높은 빌딩으로 기록되며 개장했고, 뉴욕 프로농구팀 닉스가 NBA 챔피온을 차지했다.

그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도쿄에서 납치됐으며, 이소룡(Bruce Lee)과 파블로 피카소가 사망했다.   

 

 

#1 이철수씨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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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l Soo Lee

 

이철수(Chol Soo Lee, 1952-2014)씨의 삶은 한인 이민자의 악몽을 상징한다. 그는 6.25 전쟁 중 서울에서 미군 병사와 한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1964년 12살 때 엄마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주했다. 영어가 서투른 소년 Chol Soo는 부모도 지도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 공립학교를 다니던 그는 괴롭히는 학생을 때리고, 자전거를 훔쳐타고 달리는 등 비행으로 소년원을 드나들었다. 어느날 소년원에서 자살을 시도했다가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고 세인트메리의료센터의 맥올리협회에 입원했다. 이후 1966년 3월 나파주립병원에 입원 후 정신이상 판명을 받고 헤이워드의 위탁가정에 맡겨졌다. 하지만 그해 10월 위탁가정에서 가출해 체포되어 1967년 여름 캘리포니아청소년국으로부터 13개월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2 샌프란시스코 중국 갱 살인사건

 

사건은 1973년 여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이다. 당시 차이나타운은 중국청년 갱단 와칭(華青, Youth of China)과 조 보이즈(Joe Boys, 忠精義)가 대결하고 있었다. 6월 3일 저녁 거리에서 와칭의 자문이었던 입이탁(Yip Yee Tak)이 총에 맞고 사망했다. 범인은 도주했다.

 

입이탁의 시신을 해부한 결과 38구경 총알이 발견됐다. 경찰은 사건 전날 이철수씨가 렌트한 아파트에서 총성이 들렸다는 신고를 받고, 이씨의 창가에 대면한 벽에서 총탄을 제거했다. 이철수씨는 사건 당시 차이나타운 인근 페어몬트호텔에서 퇴근한 여자친구와 식사하던 중이었다. 

 

 

#3 이철수씨 체포와 유죄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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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경찰에 체포된 후 이철수씨의 머그숏

 

이씨는 6월 7일 밤  자신의 아파트에서 검거됐다. 당시 그는 콜트 파이톤(Colt Python) .357 권총과 38구경 총알 41발을 소지하고 있었다. 이씨는 경찰이 수갑을 채주자 "어서 나를 죽이시오.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어.(Go ahead and kill me. I would be rather off-I would be better off.)"라고 말했으며 호송 차에선 "당신들은 항상 날 지목하지. 저번엔 강도였고, 이번엔 살인이군. 난 내일 집(한국)으로 갈 예정이었어(You guys are always picking me up. Last time it was robbery. this time it's murder. And I was just going home(to Korea) tomorrow.)"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그는 절도 혐의로 1972년 선고된 180일 징역과 3년 집행유예기간이었다.  

 

11일 경찰서에서 5명의 백인 목격자 중 3인이 이철수씨를 살인자로 지목했다. 샌프란시스코 경찰국의 범죄학자는 이씨 아파트의 총알이 살인에 사용한 총알과 같다고 엮었지만, 독립 범죄학자가 일치하지 않음을 증명하자 철회했다. 이듬해 6월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철수씨는 1급 살인혐의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77년 10월 8일 이철수씨는 설상가상으로 감옥 마당에서 시비를 걸어온 백인 갱단원 출신 수감자 모리슨 니댐(Morrison Needham)을 살해한다. 이씨는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지만, 입이탁 살해 유죄판결로 인해 사형을 선고받는다.  

 

 

#4 이경원 대기자 K. W. Lee, The Great Journa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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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원 기자와 이철수씨

 

새크라멘토 유니언지(The Sacramento Union)의 원로기자 이경원(Kyung Won Lee/ K. W. Lee)씨는 이철수씨의 무죄를 믿었던 일본계미국인 3세 랜코 야마다(Ranko Yamada)씨의 간곡한 요청으로 1977년 6월부터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1978년 1월 29일 새크라멘토 유니온지엔 이경원 기자가 이철수씨의 입이탁 살해 평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를 발행했다. 이경원 기자는 이후 5년 동안 무려 120건에 달하는 연재기사를 써서 이철수구명위원회 설립, 재판을 다시 열고, 종국에 이철수씨 사형수 신분으로부터 석방시키는데 공헌하게 된다. 

 

이경원씨는 1928년 개성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50년 미국으로 이주, 웨스트버지니아대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후 일리노이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 주류 신문사에 고용된 최초의 아시안이었다. 이후 테네시주 킹스포트 타임즈-뉴스와 웨스트버지니아의 찰스톤 가젯에서 신문기자로 일했다. 1960년 페기 플라워스와 결혼한 후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 유니온에서 남부의 민권운동, 아팔래치안 광부 등을 탐사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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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W. Lee with Asian American youth at KW Center for Leadership.  https://www.kwleecenter.org

 

1979년 미국 내 첫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영자신문 '코리아타운 위클리(Koreatown Weekly)'를 창간했으며, 1992년 로드니 킹 사건 이후 한흑 갈등이 첨예화했을 때 LA에서 한국일보 영문판(The Korea Times)'를 창간하고 편집국장을 맡으면서 아시안아메리칸과 소숙{를 위한 인턴십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재미한인인협회(KAJA, Korean American Journalists Association)의 초대회장을 맡았으며, 캘리포니아대에서 유색인종 지역사회의 탐사보도에 관해 강의를 했다. 이경원 기자는 간암과 위암 생존자로 1992년엔 간이식 수술을 거쳤다. 

 

캘리포니아신문발행인협회 최우수 연재 기사상(1979), 아시안아메리칸저널리스트협회 평생공로상(1987), 프리덤포럼 Free Spirit Award(1994) 등을 수상했다. 2003년 그의 이름을 딴 비영리기구 KW Center for Leadership이 설립되어 LA의 차세대 리더들을 육성하고 있다. https://www.kwleecenter.org

 

 

#5이철수구명위원회 Free Chol Soo Lee Defense Committ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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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Chol Soo Lee" directed by Julie Ha and Eugene Yi/ “Free Chol Soo Lee” poster (1981) by Wes Senzaki

 

1978년 2월 이경원 기자의 탐사보도 첫회가 나간지 1개월만에 이철수구명위원회(Chol Soo Lee Defense Committee)가 결성되기에 이른다. 랜코 야마다씨와 UC 데이비스 로스쿨 졸업생 유재건(Jay Yoo) 전 국회의원, UC 데이비스의 교사이자 전 한미연합회장 그레이스 김(Grace Kim),코리안아메리칸 3세 게일 황(Gail Whang), 브렌다 백 선우(Brenda Paik Sunwoo) 등의 주도로 이철수 사건은 한인사회와 교회에 확산된다. 

 

그해 7월 제 1심에서 핵심 증가가 은폐되었다며 인신보호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은 입이탁이 3차례 강간 용의자로 지목됐으며, 살해되기 전 다른 이와 커피를 마신 후 말싸움을 했다는 점을 공개하지 않아은 것으로 드러났다.   

 

 

#6 재심 Ret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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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이경원 대기자와 이철수씨 석방 후 재회했다. 

 

1982년 8월 재심이 시작됐고, 그해 9월 3일 배심원단은 이철수씨의 무죄를 선고했다. 이듬해 1월 캘리포니아 항소법원은 이철수씨의 사형을 무효화했다. 

미국 최대이며, 캘리포니아주의 유일한 사형수 감옥인 샌 퀜틴주립 교도소(San Quentin's Death Row)에 수감됐던 이철수씨는 1983년 3월 28일 자유의 몸이 되었다. 

 

 

#7 석방 후의 삶

 

이씨는 10년 동안 수감됐었지만, 국가로부터 사과도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샌프란시스코에서 살았다. 1991년 이씨는 친구과 피터 정(Peter Chong) 소유의 집 방화 혐의로 체포되어 3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당시 그는 방화 실수로 전신 90% 이상에 3도 화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이씨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강연을 하면서 아시안아메리칸 지역사회에 참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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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수씨 사건을 다룬 영화 / 회고록/ 다큐멘터리 

 

#8 할리우드 영화 'True Believer/Fighting Justice(1989)'

 

이철수씨 사건은 1989년 조셉 루빈(Joseph Ruben) 감독이 제임스 우즈(James Woods)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Robert Downey, Jr.) 주연으로 영화 'True Believer/Fighting Justice(1989)'가 제작됐다. 영화는 아시안아메리칸 지역사회의 역할을 도외시하고, 변호인들의 법정 드라마에 치중했다. 이철수씨의 허구 캐릭터인 슈카이 김(Shu Kai Kim) 역은 일본계 배우 유지 오쿠모토(Yuji Okumoto)가 맡았다. 

 

 

#9 회고록 출간 Freedom without Justice 

 

이철수씨는 옥중 회고록의 초고를 집필했으며, 2017년 하와이대학 출판부에서 UC 데이비스 리처드 S. 김(Richard S.Kim) 교수 편집으로 '정의 없는 자유(Freedom without Justice: The Prison Memoirs of Chol Soo Lee)'가 출간됐다. 

 

 

#10 이철수씨 사망과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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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수씨 구명운동. "Free Chol Soo Lee" directed by Julie Ha and Eugene Yi

 

이철수씨는 2014년 12월 3일, 62세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위장 질환으로 세인트메리병원에 입원한 후 수술을 거부하고 생을 마쳤다. 

 

이철수씨 사건은 1970년-80년대 아시안아메리칸 커뮤니티 최대의 인권운동이자 아시안 인권재판에서 최초로 승리한 케이스로 평가되고 있다. 한인사회는 물론, 일본, 중국, 필리핀계에서 백인, 흑인, 히스패닉 등까지 합세한 인권운동이었다. 이로써 소수계 이민자들은 물론 타 인종과의 화합 및 협력의 중요성을 새로 인식시킨 사건이었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이후 이민자 학생들이 100인 이상인 공립학교에서는 의무적으로 이중언어교사를 채용해야한다는 조례가 제정됐다. 법원에서도 이민자가 관련된 형사사건 재판에는 문화를 이해해야한다는 관례가 생겨났다. 

 

이철수씨 사건은 2021년 주간 타임(Time)지의 '당신이 알아야할 아시안아메리칸 역사의 11가지 순간들(11 Moments From Asian American History That You Should Know)'에 꼽혔다. 

 
이철수씨가 백인청년 찰스(Charles)였다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경원 대기자가 미국인이었다면, 퓰리처상을 수상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한인사회가 파워풀했더라면? 이철수씨는 '센트럴파크 파이브' 피해자들처럼 배상금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철수 사건은 잊혀지지 말아야 한다.  
 
 
*센트럴파크 파이브(Central Park Five)
1989년 센트럴파크에서 조깅하던 백인여성 강간살인미수 사건으로 6-12년형을 선고받은 흑인과 히스패닉계 10대 소년 5인은 수감 중이던 진범이 범죄를 자백한 후 기소가 취소되어 2002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피해자 5인은 2014년 뉴욕에를 악의적인 기소, 인종차별 및 정신적 고통을 이유로 고소,  4천100만 달러의 배상금이 지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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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수씨에게 자유를 Free Chol Soo Lee
JANUARY 21: Sundance Online Premiere, 8:30 PM PST/ 11:30PM EST. Live Stream format with Q&A live following
JANUARY 23-24: 24 Hour Viewing Window, 7:00 AM PST/ 10:00AM EST. On-Demand format with 24 hour watch window
https://www.fcsl-fil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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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2.01.18 21:07
    세상에는 억울하게 형을 사는 사람들이 많지요. 한인사회와 미국 주요 언론에서 크게 다룬 이한탁씨 방화사건이 떠오릅니다. 모종교기관의 기도원에서 방화를 해서 딸을 죽게한 사건입니다. 방화를 해서 딸를 죽인 살인자로 재판은 끝났고, 이한탁씨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한인사회와 친지들의 끈임없는 도움으로 드디어 24년만에 무죄가 판명돼서 석방됐습니다. 보상금도 받아서 아주 잘 풀린 사건이 었습니다. 그런데 이철수씨의 사건을 읽으니까 가슴이 아렸습니다. 무죄로 풀려나서도 그간의 억울한 옥살이의 배상도 못 받고 살다가 암으로 사망한 그의 생애가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방황하지 말고 교회를 찾아가 목사님을 만나면 희망이 있지 않았을까?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