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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영우(Raining in the Mountain/ 空山靈雨, 1979)' ★★★★★

해인사, 불국사, 종묘 담은 호금전 감독 걸작

2K 디지털 복원판 10월 30일부터 Film Forum 버추얼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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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국 명나라를 배경으로 한 '공산영우'의 주 무대는 부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고려대장경'을 소장하고 있는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전이다. 

 

2000년 주윤발, 장지이, 양자경 주연, 대만 출신 이안(Ang Lee) 감독의 무협영화 '와호장룡(卧虎藏龙,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은 개봉 후 미국에서만 1억2천800만 달러, 세계에서 2억1천350만 달러의 입장료 수입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외국어 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이었다. '와호장룡'은 뿐만 아니라 이듬해 아카데미상 최우수 외국어영화상까지 석권했다.

 

2004년, 중국의 장예모 감독은 유덕화와 장지이 주연의 무협영화 '연인/ 십면매복(十面埋伏, House of Flying Daggers)'으로 9천290만 달러의 흥행기록을 세웠다. 1973년 브루스 리(Bruce Lee, 이소룡)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종지부를 찍었던 무협영화가 근 30년만에 세계적으로 부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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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금전 감독에게 경의를 표한 영화들. 왼쪽부터 '와호장룡' '연인/십면매복' '킬 빌 2'.

 

'와호장룡'과 '연인/ 십면매복'은 1960-70년대 중국 무협영화의 대부 호금전(胡金銓, King Hu, 1932-1997)에게 빚을 졌다. 이안과 장예모 감독은 특히 '협녀(俠女/ A Touch of Zen, 1971)'의 공중 곡예 대나무숲 무술 장면에 오마쥬(헌사)를 표했다. 호금전, 그는 두 감독 외에도 홍콩의 서극, 오우삼, 왕가위 감독과 대만 차이밍량감독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감독 퀜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는 '킬 빌(Kill Bill 1, 2, 2003, 2004)'에서 호금전 감독에게 경의를 표했다. 

 

*'와호장룡' 대나무숲 결투 장면

*'연인/십면매복' 대나무숲 결투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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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객잔(龍門客棧/ Dragon Inn, 1967)/ 협녀(俠女/ A Touch of Zen, 1971)

 

'무협영화의 거장' 호금전 감독의 1975년 '협녀(俠女/ A Touch of Zen, 1971)'는 중국영화 사상 최초로 칸영화제에서 기술대상을 수상했다. 그 호금전의 걸작 '공산영우(空山靈雨/ Raining in the Mountain, 1979)'가 대만영화협회의 2K 디지털 기술로 복원되어 뉴욕에 왔다. 필름포럼(Film Forum)은 10월 30일부터 '공산영우'를 버추얼시네마/ 온라인으로 상영한다. 

https://filmforum.org/film/king-hus-raining-in-the-moun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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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미술, 편집, 각본, 감독을 겸한 호금전(胡金銓/ King Hu, 1932-1997) 

 

주목할만한 점은 '공산영우'는 '산중전기(山中傳奇, Legend of the Mountain, 1979)'와 함께 한국에서 올 로케이션 촬영됐다는 점이다. 명나라 이야기인 '공산영우'와 송나라 배경의 '산중전기'는  해인사, 불국사, 종묘, 설악산, 남한산성 등지에서 로케이션 촬영됐다. '산중전기'는 이영우 감독과의 위장 합작영화로 등록, 한국어 더빙 후 '사문의 승객(死門의 僧客)'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바 있다. 

 

왜 호금전은 한국에서 중국 무협 이야기를 촬영했을까?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황금기였다. TV 대중화 이전 한국영화계는 유현목, 김기영, 신상옥 감독과 신성일, 김지미, 신영균, 김진규 등 스타들과 함께 전성기를 누렸고, 홍콩 영화계와의 교류도 활발했다. 특히 중국 역사극의 거장 이한상(李翰祥, Li Han Hsiang) 감독은 '양귀비'(1962) '무측천'(1963)등을 한국에서 촬영했고, 호금전은 그의 조감독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유신 독재가 본격화하면서 한국 영화계는 암흑기에 들어갔다. 제작자들은 외화 수입권을 얻기 위해 '방화'를 제작했다. 한국영화 3편 제작에 외화 1편 수입권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외화로 돈 벌기 위해 함량미달의 한국영화를 만드는데 혈안이 됐다. 검열을 피하고, 관객을 끌기 위해 호스테스 영화를 앞다투어 제작하는 한편, 홍콩과 위장합작 영화도 성행했다. 오우삼 감독(영웅본색), 정소동 감독(천녀유혼) 등 홍콩감독, 배우 성룡도 이 시절 영화촬영 차 한국을 드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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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전기(山中傳奇, Legend of the Mountain, 1979)'

 

1979년 '병태와 영자' 'O양의 아파트' '꽃순이를 아시나요' '내가 버린 남자' '불행한 여자의 행복' '아침에 퇴근하는 여자' 등 에로영화들이 제작될 즈음, 호금전 감독은 한국을 누비며 중국 무협영화 '공산영우'와 '산중전기'를 찍고 있었다. 두 영화가 한국의 국보이자, 훗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될 해인사, 불국사, 그리고 종묘를 담은 것이다. 

 

뉴욕에선 2014년 브루클린아카데미오브뮤직(BAM)에서 호금전 회고전(All Hail the King: The Films of King Fu)'를 열었으며, 2016년 '협녀'는 필름포럼, '용문객잔'은 링컨센터에서 상영됐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 '공산영우'가 돌아온 것이다. '협녀''용문객잔'은 예술영화 전문 스트리밍 서비스 크라이테리온(CriterionChannel)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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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디자이너였던 호금전 감독은 '공산영우'를 중국 산수화처럼 찍었다. 자연 속의 미미한 인간, 여백은 때로 포그로 채운다.

 

*'공산영우(Raining in the Mountain)' 예고편

https://youtu.be/Gsq6wKpfUjY

 

'빈 산에 내리는 신령의 비'라는 뜻의 '공산영우'는 단순한 불교 무협 영화가 아니다. 명나라 시대 주지 스님의 열반을 앞두고 주지 후보자들이 자신을 지지해줄 인사(부자, 장군, 대사)를 사찰로 초대한다. 여기에 이 절의 보물인 '대장경'을 훔치려는 도둑 일당도 끼어 있다. 주지라는 영적인 스승이자 권력을 둘러싼 암투와 고귀한 부처의 말씀 대장경을 탈취하려는 음모가 동시에 진행되는 가운데, 무고한 전과자가 속죄하기 위해 절로 들어간다. 고요한 사찰에서 부패한 인간들의 야심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제목의 '공(空)'이 불교의 '일체개공(一切皆空, 만유의 모든 현상은 그 성품으로 보면 다 공하다)', 즉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의 비는 인간들의 부질없는 욕망과 야심일지도 모른다. '공산영우'에서 결국 주지 스님 자리는 예상치 않았던 이가 맡게 되고, 대장경은 모든 이들에게 배포된다. 권력과 지식 혹은 보물에 대한 집착이 공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이즈음, 인터넷으로 정보가 공유화한 오늘날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지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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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영화라 하기보다는 시네포엠(Cine Poem), '공산영우'의 장면 장면은 회화같다. 

 

'공산영우'는 무엇보다도 한국의 자연과 사찰을 배경으로 한 영화라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호금전 감독은 전통 산수화의 여백처럼 거대한 자연 속에서 미미한 인간의 존재를 포착하고, 한국의 사찰 건축물을 병풍으로 배경으로 부질없는 인간들의 욕망을 트래킹 숏으로 담아낸다. 

 

영화는 3인조가 석양 속, 들판을 거쳐, 산길을 지나 절로 들어가는 서정적인 시퀀스로 시작한다. 이들의 모습은 이만희 감독의 '삼포 가는 길'(1975)와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1984)에 나오는 3인조를 연상시키지만, 로드무비가 아니라 서부극의 총잡이처럼 어느 공간('공산영우'에선 사찰)에 도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3인조가 해인사 문으로 들어선 후 마중나온 스님과 함께 불국사 자하문 계단으로 올라간다. 호금전 감독의 정교한 로케이션 헌팅 감각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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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영우' 시작 14분경부터 25분경까지 거의 대사없이 발자국 소리와 중국 전통음악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서스펜스. 해인사, 불국사, 종묘가 모두 등장한다. 

 

특히 영화 초반에서 대장경이 보관된 서고를 찾는 도둑 남녀가 스님들의 시선을 피해 사찰을 헤매는 약 11분에 달하는 시퀀스는 숨이 멎을 정도로 압권이다. 호금전 감독은 해운사 장경판전, 불국사 경내, 그리고 종묘의 담벼락을 배경으로 두 남녀의 움직임을 한국 사찰의 컬러풀한 단청, 우아한 기와 문양, 그리고 문살 등을 배경으로 두 도적의 움직임을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의 호흡과 여백으로 그려냈다. 

 

대사는 거의 절제됐으며, 북, 징, 생황, 단소 등 중국 전통 악기가 내는 스릴감 넘치는 배경 음악으로 알프레드 히치콕을 방불케하는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킨다. 이 시퀀스에서 한국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포착하는 카메라와 배우들의 움직임, 그리고 리드미컬한 편집은 경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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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장면 느티나무가 즐비한 합천 해인사 입구와 해인사의 해인범종과 법고 장면.

 

호금전 감독은 1979년 대만 촬영팀과 한국의 국보이자 미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해인사와 불국사, 그리고 종묘를 누볐다. 그는 한국의 사찰 건축 뿐만 아니라 불상, 탱화 및 단청, 문살, 도자기 등 한국 전통문화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깔았다. 

 

경상남도 합천 가야산 중턱에 자리한 해인사(海印寺)는 8세기 신라 애장왕 때 지어진 사찰로 거친 산세 덕에 임진왜란 등 숱한 전쟁에서 큰 피해는 없었다. 해인사엔 13세기 고려 고종 때 새겨진 팔만대장경을 비롯 고려대장경판(국보 제 32호, 2007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소장되어 있다. 

 

게다가 이 대장경이 보관된 도서관 '장경판전(국보 제 52호, 1995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5칸에 이르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이 남북으로 건축된 쌍둥이 건물로 2017년 프랑스 르 피가로(Le Figaro)지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10'의 7위로 선정됐다. 이 영화에는 해운사의 대적광전 비로사나삼존불상, 해탈문, 해인범종과 법고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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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불국사 장면 1 석가탑과 다보탑, 대웅전의 불상과 

 

호금전 감독은 국보가 집중된 불국사(佛國寺)로 가서 불상과 탱화, 다보탑과 석가탑, 반야연지의 해탈교 등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경주 토함산에 자리한 불국사(佛國寺)는 신라 경덕왕 10년(751)때 김대성이 창건했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여러차례 복원을 거쳤다. 다보탑(국보 제 20호), 석가탑(삼층석탑, 국보 제 21호), 영화교, 칠보교(국보 제 22호), 청운교, 백운교(국보 제 23호),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 26호),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 27호) 등 문화재가 있으며, 1995년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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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장면 2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 26호, 위 왼쪽),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 27호), 자하문.

 

'공산영우'의 피날레는 스님들이 종묘(宗廟, 국보 제 227호, 1995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정전(正殿) 장면으로 맺는다.  

서울의 종묘는 조선 역대 국왕과 왕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하는 유교사당인데, 불교 영화의 로케이션이 된 셈이다. 그의 걸작 '협녀'의 영어 제목이 'A Touch of Zen'이었으니, 호금전은 불교, 유교, 선사상까지 모두 융합하려는 시네아티스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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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장면 서울 종묘의 웅장한 정전(正殿)이 무대가 됐다.

 

호금전은 무술 감독은 아니었지만, 공중을 훨훨 나는 무사들의 다이나믹한 액션을 절묘하게 짜맞춘 편집자이기도 했다. 물론 호금전의 장기인 스펙터클한 무술 장면을 놓칠 수 없다. 한국인 엑스트라들로 보이는 수십명의 비구니들이 계곡에서 날아다니는 무예 장면은 '공산영우'의 클라이맥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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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에서 발레까지, 호금전 영화의 무술 장면은 예술의 경지를 보여준다.

 

호금전의 칼날같은 편집이 무술을 곡예와 발레, 그리고 마술처럼 만든다. 등장인물들의 무술은 발레나 곡예에 더 가깝다. 여기에 북경 오페라와 중국 전통음악에 기조한 음악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사실 '공산영우'는 무협영화라기 보다는 산수화가 이어지는 시네포엠같다. 

 

 

호금전 감독은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고귀한 대장경은 사찰의 독점이 아니라 만인이 공유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산영우'에서 주지 스님은  무고하게 전과자가 됐던 인물, 즉 아웃사이더를 새로운 주지로 추대함으로써 사찰의 부정과 부패, 음모를 제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함깨 '대장경'을 노리고 사찰에 들어갔던 3인조 중 살아남은 도둑녀(화이트폭스)가 비구니가 되는 장면은 인과응보(因果應報), 즉 권선징악(勸善懲惡), 사필귀정(事必歸正)의 결말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사찰과 자연을 담은 '공산영우'는 산수화같은 장면들, 무용같은 무술 장면들, 그리고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철학 도서같다. 2020년 다시 보아도 의미 심장한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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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이 풍부한 무협영화. 호금전 영화의 시그내쳐는 회화같은 이미지다.

 

'영웅본색' '첩혈쌍웅'의 홍콩 감독 오우삼(John Woo)은 호금전 감독의 데뷔작 '대지아녀'에서 엑스트라로 데뷔했다. 그는 사부 호금전을 "영화의 시인, 영화의 화가, 영화의 철학자"라고 말했다. 오우삼 감독의 말이 정확했다. 그리고, '공산영우'는 이를 입증하는 걸작이다. 

 

'공산영우'는 대만의 아카데미상인 제 16회 금마상(Golden Horse Awards) 감독상, 미술감독상, 촬영상, 음악상, 음향녹음상을 수상했다. 1980년 홍콩 대표 영화로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출품했지만, 독일 볼커 쉴렌도르프 감독의 '양철북(The Tin Drum)'에 돌아갔다. https://filmforum.org/film/king-hus-raining-in-the-moun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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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0.10.22 12:51
    불국사, 해인사, 종묘, 설악산-한국의 문화유산과 천혜의 자연풍광을 지면으로 보면서 한국에 가면 꼭 가봐야지 하고 마음에 다짐을 합니다. 이런 훌륭한 유산들을 얼마든지 가서 감상을 하고 느낄 수 있었는데 소홀히 한 것이 후회가 됩니다. 불국사는 먼 옛날 고등학교 시절에 수핫여행을 갔었습니다. 석가탑, 다보탑, 석굴암, 안압지, 첨성대 등등을 걸으면서 신라 천년의 역사를 되새겨 보았고 감탄을 했던기억이 살아납니다. 토함산을 새벽에 올라가서 해돋이를 바라보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경주 법주를 사서 가져다가 외할아버지를 드렸던 기억도 생생하네요.
    컬빗은 자주 타임머신을 내게 선사해주면서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나게해 주네요. 해인사, 불국사, 종묘, 설악산을 누비며 한국의 문화유산을 촬영한 무협영화 감독 호금전께 저도 감사를 드립니다.
    무협영화에 관심이 없어서 못 봤는데 컬빗이 소개를 해주셔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게 됐습니다. 아는 게 힘이다를 컬빗을 통해 쌓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