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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의 전설 신성일(1937-2018. 11.4)씨가 11월 4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9년 11월 뮤지컬 홍보대사로 뉴욕 뮤지컬 페스티벌에 참가했던 신성일씨와의 인터뷰를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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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in Seong-il at the 2009 New York Musical Theater Festival  Photo: Sukie Park

 ‘뮤지컬 전도사’로 변신한 신성일씨
"내 인생의 영화는 '만추'"
 
<뉴욕 중앙일보,  2009/11/24>

“현재 한국에서 가장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장르가 뮤지컬입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을 세계적인 축제로 만들고 싶어요.”

‘은막의 스타’였던 신성일(73)씨가 뮤지컬 전도사가 되어 뉴욕을 방문했다. DIMF의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신씨는 22일 맨해튼 에디슨볼룸에서 열린 뉴욕뮤지컬시어터페스티벌(NYMF)의 시상자로 무대에 올랐다.


IMG_8821.jpg  Shin Seong-il, 2009

신씨는 이 자리에서 “올해부터 NYMF과 제휴하고 재능있는 작품과 예술가를 발굴하고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그 첫번째 열매로 NYMF에 출품한 초대 한국산 뮤지컬 ‘마이 스케어리 걸’이 최우수 신작 뮤지컬상을 수상했다. 한편 DIMF는 뉴욕산 뮤지컬 ‘아카데미’에 제작상을 수여했다.

신씨가 뮤지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3년 뉴욕을 방문했을 당시 ‘42번가’와 ‘코러스라인’을 본 후부터. 이후 뉴욕에 올 때마다 브로드웨이를 찾았고, 지난해에는 ‘아이다’도 보고 갈 정도로 뮤지컬 매니아가 됐다.

“뮤지컬에는 노래, 춤, 화려함, 이야기가 있잖아요. 요즈음 영화에는 너무 욕지거리에 폭력이 난무합니다.”

IMG_8837.jpg Shin Seong-il, 2009

대구에서 태어나 판사나 의사를 꿈꾸던 신씨는 경북고 졸업 후 돈을 벌기 위해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후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 ‘만추’ 등 무려 주연으로만 506편에 출연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이만희 감독의 ‘만추’다.

“이 감독의 ‘만추’에는 로맨티시즘과 휴머니즘이 서려있어요. 영화는 TV 연속극처럼 대사로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영상미가 중요하지요."

1970년대 뮤지컬풍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그건 너’ 등 4편의 감독을 맡았던 신씨는 1989년 ‘성일시네마트’ 설립 후 제작자로도 활동했다.

“70∼80년대 가장 불만이었던 것이 정부의 문화정책이었어요. 반공을 강조하고 검열도 심했지요.”

신씨는 2000년엔 정치에 입문,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가 4년 후 정치자금 수수혐의로 수감되어 옥살이를 했다.

“2년 동안 감옥에서 열심히 운동하며 잠도 실컷 잤고 ‘열국지’에서 클린턴까지 책을 무척 많이 읽었어요. 난 불교신자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책은 삶의 지혜가 담긴 ‘탈무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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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뉴욕뮤지컬페스티벌(NYMF) 시상식에서 신성일(오른쪽부터)씨와 뉴 뮤지컬상을 수상한 '마이 스케어리 걸(My Scary Girl)'의 작곡가 윌 애런슨, 대본, 작사가 강경애씨, 그리고 아이작 호로비츠 NYMF 집행위원장. 

출소 다음날, 신씨가 달려간 곳은 미장원이다. ‘베토벤 파마’로 파격적으로 변신한 ‘왕년의 스타’는 어지러운 세상과도 화해한 듯하다. 지난해엔 경북 영천에 한옥집 ‘성일가(星一家)’를 지었다. 올해엔 영화인생을 인터뷰로 담은 책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도 펴냈다.

“영화는 나를 키워준 영양소입니다. 다음에 하고 싶은 일은 영천 집앞에 성일영화박물관을 마련하는 것이지요.”

신씨는 데뷔작 ‘로맨스 빠빠’에 출연했던 배우 엄앵란씨와 1964년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다.

박숙희 기자 sukie@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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