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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길 Bad Roads ★★★★

우크라이나 전쟁과 인간성 상실의 시대 

2020 베니스영화제 비평가 주간, 2022 아카데미 국제극영화상 출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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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Roads directed by Natalya Vorozhbit

 

*Bad Roads  예고편 

https://youtu.be/MSqVUZToIqg 

 

지금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전쟁 3개월째 접어들었다. 우크라이나는 2022 아카데미상 국제극영화상(구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전쟁의 후유증을 그린 나탈랴 보로즈비트(Natalya Vorozhbit) 감독의 '나쁜 길(Bad Roads)'을 출품했었다. 이 영화는 오스카상 후보에 오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2020년 베니스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됐으며, 우크라이나영화아카데미(Ukrainian Film Academy Awards) 최우수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각본상, '올해의 발견상'을 수상했다.  

 

2007년 희곡 '나쁜 길(Bad Roads)'을 발표했던 여성작가 나탈랴 보로즈비트는 2017년 런던의 로열코트시어터(Royal Court Theater)에서 연극으로 공연해 찬사를 받았다. '나쁜 길'은 보로즈비트 자신이 4개 에피소드의 옴니버스 시나리오로 각색하고,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연극에서 무대에 제한된 시간과 공간은 영화에서 무제한으로 확장될 수 있다. 하지만, 보로즈비트 감독은 시공간의 확장보다 클로즈업이라는 시네마 툴로 극적인 긴장감을 더욱 강화한다. 또한, 연극 무대에서 기량을 갈고 닦은 배우들의 열연과 음악을 배제한 음향디자인으로 연극 이상의 리얼함과 팽팽한 긴장감을 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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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Roads directed by Natalya Vorozhbit

 

'나쁜 길(Bad Roads)'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와 돈바스(Donbass) 침공을 배경으로 4가지의 이야기가 진행진다.  

 

첫번째 스토리는 반테러작전(ATO) 검문소에서 벌어지는 교장의 이야기다. 황량한 사막같은 검문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술 취한듯 어리버리한 학교교장은 신분증 제시 요구를 받는데, 부인의 여권이 나온다. 보초병과 지휘관은 남자를 무자비하게 심문한다. 이들은 교장의 트렁크 속 짐을 하나하나 까발린다. 부인에게 전화 한통화를 사정하던 교장은 한순간 벙커에서 여학생을 봤다며 자신이 교장이라는 것을 믿어달라고 호소한다. 지휘관은 "우리는 여기서 싸우지 않아 일광욕을 하고 있지!"하며 너스레를 떤다. 결국 무력감에 빠져 돌아가던 교장은 다시 검문소로 돌아온다. 운전석 바닥에 떨여졌던 여권을 들고서.

 

전쟁은 이 사회에서 가장 신뢰할만한 인물 중 하나인 교장마저 불신의 늪으로 빠트린다. 보로즈비트 감독은 거친 도로에 교장의 차를 등장시키면서 그를 자동차 창문의 프레임 속에 가두어놓으며, 전쟁이 인간성을 구속시키는 것을 시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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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Roads directed by Natalya Vorozhbit

 

두번째 스토리는 한밤중 버스 정거장에서 벌어진다. 10대 소녀 세명(1편에서 교장의 학생들로 연결되는듯) 이 담배 피우며, 스마트폰을 쓰며 샴푸와 선물, 첫사랑에 대해 수다를 떤다. 병사와 사귀는 친구가 떠나고, 홀로 남은 소녀는 씨앗을 씹어먹으면서 군인 애인을 기다린다. 버스가 왔지만, 애인 대신 할머니가 내린다. 할머니는 손녀에게 집에 가자고 설득하지만, 손녀는 완강하다. 엄마의 죽음으로 집(Home)은 더 이상 가정이 아니며, 군인 애인에 집착한다. 실갱이하다가 할머니의 수프를 먹는 소녀, 밤하늘에 포탄 소리가 시작되고 개들이 짖는다. 할머니가 손녀에게 다가와 집으로 가자고 하자, 손녀는 집 대신 셸터(방공호)로 가자고 제안한다.  

 

우크라이나 밤하늘의 총성은 불꽃놀이의 유희가 아니라 전쟁이다. 소녀의 기다림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처럼 부조리하다. 할머니와 손녀 사이 어머니, 한 세대가 실종됐다. 전쟁은 부재(absence)를 야기한다. 엄마는 사망했고, 군인 애인은 생사불명이다. 일상의 기다림이 설레임과 행복이라면, 전쟁중의 기다림은 불안감과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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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Roads directed by Natalya Vorozhbit

 

세번째 에피소드는 길다. 적군의 벙커로 사용되고 있는 폭파된 스파시설에서 포로가 된 여기자와 세 병사의 이야기다. 전쟁 중 여성은 더 무력해지고, 무기와 성기를 가진 남자는 여기자를 성적으로 학대한다. 그녀는 처음에 공포에 떨다가 굴욕, 이후엔 체념하고, 마지막엔 분노로 엽기적인 힘을 발휘한다. 사람들이 벌거벗고 긴장을 푸는 장소였던 스파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병사들의 성적 배출구의 공간이 된다. 여기자는 포로 위안부가 되어야 한다. 그녀가 더러운 욕조에서 잠을 자고, 어둠 속에서 조용이 울부짖는 소리는 인간의 존엄성이 바닥으로 추락했음을 시사한다. 

 

감독은 수돗물 떨어지는 소리와 욕탕의 에코 음향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병사의 휘파람과 소변을 휘갈기는 소리는 그 자체가 소름끼친다. 스파의 폐허는 여기자의 몸과 마음의 폐허로 이어진다. 전쟁은 인간성과 인간의 심신을 폐허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자는 자신이 예전에 운전하다가 닭을 죽여 보상하게된 이야기를 들려주고, 병사는 자신이 죽인 목숨과 몸값을 무게로 환산한다. 닭 이야기는 다음 에피소드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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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Roads directed by Natalya Vorozhbit

 

네번째 이야기는 여기자의 플래시백처럼 설정됐다. 외딴 농장 인근 밤길 운전하던 젊은 여성이 농장의 암탉을 실수로 죽인다.그녀는 농장주를 찾아가 사과하는데, 부부는 과도한 보상을 요구한다. 자기네 암탉은 매월 30개씩의 알을 낳으며, 2년 동안 달걀의 가치는 2,400 흐리우냐(우크라이나 화폐 단위)라는 것. 부부는 마침내 그녀의 팔찌와 애인으로부터 선물받은 금목걸이를 갈취하고 핸드백을 뒤지며, 푸조 자동차까지 노린다.

 

그러나, 이웃의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며, 이들은 탐욕으로부터 정신 차리고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전쟁은 지속되고 있으며, 병사와 민간인이 사망했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중이다.  감독은 귀뚜라미 소리, 개짖는소리, 아기 울음소리, 그리고 물방을 떨어지는 소리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불안감을 증폭한다. 

 

"정직은 과연 최선의 방책일까?(Is honesty the best policy?)" 네번째 스토리는 특히 '블루(Blue)' '화이트(White)' '레드(Red)' 컬러 3부작 시리즈(1993-94)로 유명한 폴란드 감독 크르지스토프 키예슬로프스키(Krzysztof Kieślowski, 1941-1996)의 '십계(Dekalog,1989)'를 연상시킨다. 도덕적 딜레마는 전쟁 속에서 더 혼란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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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길'은 또 다시 전쟁의 포화 속에서 분투 중인 우크라이나 사람들에 대해 연민을 느끼게 만드는 영화다. 감독은 첫 에피소드의 검문소부터 개와 닭들을 배치하면서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개와 닭을 등장시키며, 전쟁으로 마모된 인간성을 동물의 세계와 비교시킨다. 우리 모두 인생의 길에서 예기치 않는 재난과 사고와 사람들을 만나지만, 전쟁처럼 비인간적인 상황이 또 있을까?

 

러닝타임 105분. 4월 29일 LA의 Laemmle Theatres, 팜스프링스(CA)의 Palm Springs Cultural Center, 그리고 몬타나주 보즈먼의 Bozeman Film Society에서 개봉되며, 버추얼 시네마로도 볼 수 있다.

https://www.filmmovement.com/bad-ro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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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2.04.27 09:28
    여성감독 나탈야 보로츠비트의 나쁜 길을 읽고 전쟁이 인간의 따뜻한 마음을 페허로 만든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두번째 얘기가 뇌리에 많이 와 다았습니다.
    엄마가 죽어서 없는 집은 더 이상 집이아니다고 말하는 소녀의 심정이 애틋해 지네요. 전쟁으로 엄마를 잃었겠지요? 할머니가 집에가자고 하니까 집대신 벙커로 가자고하는 소녀의 심리가 전쟁의 무서움을 느끼게 합니다.
    전쟁은 꼭 해야만될까? 골돌히 생각해 봤습니다. 어쨋거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빨리 끝나서 사람들이 평화로웠던 옛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나쁜 길에 나오는 소녀도 벙커가 아닌 할머니가 계신 집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