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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린 송 감독 데뷔작 전생(Past Lives) ★★★★ 

골든글로브 작품, 각본, 감독, 여우주연, 외국어영화상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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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Past Lives) by Celine Song

*예고편 Trailer https://www.youtube.com/watch?v=kA244xewjcI

 

'소년, 소녀를 만나다(Boy meets girl)'는 로맨스 영화에서 반복되는 고전적인 주제다. 남녀가 처음 만나 서로에게 끌리고, 어려움을 극복해 사랑을 완성한다. 로브 라이너 감독의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 1989)', 게리 마샬 감독의 '프리티 우먼(Pretty Woman, 1990)' 등 할리우드 영화에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Decision to Leave, 2022)'이나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Fallen Leaves, 2023)'까지 수많은 러브 스토리가 나왔다. 

 

희곡작가 출신 셀린 송(Celine Song, 송하영)은 감독 데뷔작에서 할리우드의 관습과 상투적인 러브 스토리, 그 게임의 규칙와 결별하고 자전적인 스토리를 스크린에 펼쳤다. '전생(Past Lives)'은 소녀가 소년을 떠나다(Girl Leaves Boy)에서 시작해 12년만에 연락이 닿고, 그로부터 또 12년만에 만났다가 헤어지는(이번에는 소년이 소녀를 떠나는) 가슴아픈 러브 스토리다. '전생'은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됐고, 독립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고담상(Gotham Awards) 최우수 극영화상을 수상했으며, 골든글로브상 작품, 감독, 각본, 여우주연, 외국어영화상 등 5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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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Past Lives) by Celine Song

 

서울에 살고 있는 12살 소녀 나영은 성적 1, 2위를 다투는 소년 해성과 친구 사이다. 어린 마음에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다. 나영은 영화감독 아버지와 아티스트 엄마, 여동생과  토론토로 이민, 노라 문(Nora Moon)이라는 새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로부터 12년 후, 뉴욕의 대학에서 희곡작법을 공부하던 노라는 인터넷으로 해성을 검색하던 중 그가 아버지 영화(넘버 11) 페이스북에 자신을 찾고 있다는 글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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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Past Lives) by Celine Song

 

이를 계기로 노라과 해성은 스카입과 이메일을 통해 연락을 주고 받기 시작한다. 해성과 연결되면서 어린 시절과 서울에 대한 그리움도 밀려온다. 나영은 글쓰기에 집중하기 위해 해성에게 당분간 연락을 끊자고 제안하고, 몬탁의 거주 작가 프로그램에 들어가 유대계 작가 아서를 만난다. 한편, 공학을 전공한 해성은 중국에 교환학생으로 가서 연애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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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Past Lives) by Celine Song

 

그로부터 12년이 또 지났다. 나영은 영주권을 받기 위해 아서와 급히 결혼, 이스트빌리지에서 희곡작가로 살고 있다. 애인과 소강 상태인 해성은 노라을 만나기위해 뉴욕에 온다. 노라와 해성은 모처럼 브루클린브리지파크를 거닐고, 서클라인 크루즈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을 보며 회포를 푼다. 그리고, 노라 남편 아서까지 한 여자와 두 남자는 저녁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아서는 어린시절의 한 챕터를 공유한 두 한인 사이에서 아웃사이더로 소외감을 느낀다. 이제 해성이 떠나야할 시간, 노라와 해성은 거리에서 우버 택시를 기다리며 침묵의 시간을 갖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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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Past Lives) by Celine Song

 

노라는 서울을 떠나 토론토를 거쳐 뉴욕으로 왔다. 이제까지 그녀의 인생은 3막인듯 하다. 노라에겐 야망이 있다. 10대의 꿈은 노벨상, 20대의 꿈은 퓰리처상, 30대의 꿈은 토니상이다. 보수적인 가정의 외아들 해성은 공학을 전공한 평범한 회사원으로 과거에 집착한 인물처럼 보인다. 해성은 절실하게 나영을 찾았고, 노라는 장난삼아 우연히 해성을 발견한다.

 

12살의 나영과 해성이 헤어질 때 나영은 계단길을 올라가고, 해성은  완만한 비탈길을 걷는다. 영화의 결말에서 노라는 계단에서 기다리던 남편 해성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며 계단을 올라 아파트로 들어간다. 해성이 탄 택시를 타고 브루클린 브리지를 수평으로 지나가고 있다. 감독은 계단으로 떠나는 소녀, 꿈이 큰 소녀 노라와 남는 자의 슬픔을 간직한, 과거에 집착하는 소년 해성, 두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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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Past Lives) by Celine Song

 

"옷깃만 스쳐도 인연(因緣)이다"라고 했다. 갑작스런 해성의 등장은 노라에게 서울에서의 삶(전생, Past Life)을 돌이켜보고, 해성과의 추억을 생각하며, 서울을 그리워하는 계기가 된다. 영화는 12살 즈음의 나영이 서울을 떠나 토론토로 이민가던 , 24살 즈음 뉴욕에 살며 해성과 인터넷으로 연결되던 시절, 그리고 36세 즈음 해성의 뉴욕 방문과 헤어짐까지 3개의 큰 챕터로 진행된다.  

 

셀린 송은 죽음 대신 12지(十二支,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로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보인다. 문나영은 12살 때 토론토 이민 후 노라 문으로 살아갔고, 뉴욕에선 백인 소설가와 결혼한 극작가로 새로운 챕터를 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페이지가 모여서 한 챕터를 만들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전생의 페이지들이 쌓이는 한권의 책일 수도 있다. 12간지는 전생+전생+전생일 수도 있다. 해성이 마지막에 질문하듯, 그들의 현재 역시 다음 생의 전생일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두 남녀의 무거운 침묵과 흐느껴 우는 노라의 슬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세에 이들의 러브 스토리가 해피 엔딩으로 진입하기를 기대할 수도 있다. 지금의 삶은 일장 춘몽일 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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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Past Lives) by Celine Song

 

이민자들은 고국을 떠나며, 낯설은 언어와 문화 속에 뿌리 내리고 새로운 챕터에 들어간다. 고국에서의 삶이 전생인 셈이다. 사람들과의 만남, 관계 역시 회자정리의 단계를 거치는 전생과 전생을 이어가는 것일까?   

 

'전생'의 멜란콜리한 배경음악(Christopher Bear와 Daniel Rossen)은 은 인연이 깊은 두 남녀의 심리를 반영한다. 영화 초반부 나영 부모의 서재에서 흐르는 레오나드 코헨의 "Hey, That’s No Way to Say Goodbye"와 나영과 해성이 동네 비탈길을 걸을 때 흐르는 김광석 노래(류근 시인 작사)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전생'에서 못다 이룰 사랑을 음악으로 예고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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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Past Lives) by Celine Song

 

어린 나영과 해성이 데이트하는 과천 현대미술관 야외 조각공원의 조각들은 소박한 영화에 시각적으로 풍부한 상징성을 제공한다. 이일호 작가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응시(New Gazing at Being, 1994)"는 두 남녀의 얼굴에 비어있는 공간을 통해 기억과 망각의 세계와 소통의 의미를 보여준다. 그 빈 자리는 상실한 것, 그리움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한편, 조나단 브로프스키의 조각 '노래하는 사람(Singing Man, 1994)'은 거대해졌지만, 무기력해진 인간의 비명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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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Past Lives) by Celine Song

 

오프닝에서 우리는 셋이 바에 앉아 있고 그들의 관계를 추정하는 남녀의 대사를 들려준다. 오른쪽의 노라와 아서가 커플이고, 노라와 해성은 오누이일 것이라는 추측, 노라와 해성이 부부고, 아서는 미국인 친구 혹은 투어 가이드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다. 어느 것이던 노라와 해성은 오누이나 부부처럼 보인다는 것. 

 

'전생'의 엔딩은 대만 감독 차이밍량Tsai Ming-liang의 '애정만세(愛情萬歲/ Vive L'Amour, 1994,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킨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애정만세'에서 부동산 중개사 여인(메이)이 타이페이의 빈 아파트에서 낯선 남자와 만난 후 새벽에 혼자 공원을 걷다가 벤치에 앉아 오래 통곡하며 끝난다. '전생'은 '애정만세' 이후 가장 인상적인 라스트 시퀀스다.   

 

미스테리한 질문으로 시작한 '전생'은 노라와 해성이 헤어지는 무거운 침묵의 장면까지 서서히 감정을 축적하며 마음을 찡하게 울린다. '전생'은 우리를 현재의 삶과 예전의 기억, 지나온 길의 후회와 열망과 좌절, 마음 깊이 묻어두었던 상실감과 그리움을 건드리며 오랫동안 긴 여운을 남긴다. 이민자들은 상실의 시절을 곰씹으며 살아가는 유목민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생이 있는, 드라마가 있는 삶이란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1시간 46분.

 

뉴욕 시네마빌리지  https://www.cinemavillage.com

애플 TV https://tv.apple.com/us/movie/past-l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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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셀린 송(송하영): 1988년 한국에서 태어나 12살 때 캐나다 온타리오주로 이민해 성장했으며, 퀸즈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후 컬럼비아대에서 희곡작법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아버지는 시나리오 작가/ 감독 송능한씨(각본: 수렁에서 건진 내딸, 태백산맥, 각본-감독: 넘버 3)이며, 삼촌 송길한씨는 시나리오 작가(임권택 감독의 짝코, 만다라, 안개마을, 길소뜸, 티켓, 씨받이)다.

#그레타 리(이지한): 1983년 LA에서 태어나 노스웨스턴대에서 연극을 전공한 후 배우가 되기 위해 뉴욕에 왔다. 무명시절 데이빗 장의 모모푸쿠 계열 식당에서 웨이트리스 로 일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러시안 인형(Russian Doll, 2019-)'과 애플TV+의 '모닝쇼(The Morning Show)'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프로듀서/작가/배우 러스 암스트롱과 사이에 2남을 두었다.

#테오 유(유태오): 본명은 김치훈, 독일 쾰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부와 어머니는 간호사로 알려졌다. 농구선수를 지망했지만, 무릎 부상으로 접었다. 뉴욕의 리스트라스버그연극영화인스티튜트와 런던의 드라마예술로열아카데미에서 연기를 배웠다. 2008년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로 데뷔, 2018년 요절한 러시아의 한국계 록스타 빅토르 초이의 전기영화 '레토(Leto)'의 주연을 맡았고, '헤어질 결심'에선 이주임으로 나왔다. 2021년 전계수 감독의 '버티고'로 청룡영화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2006년 뉴욕에서 만난 11살 연상의 사진작가 니키 S. 리와 결혼했으며, 여동생 김안나는 모델로 활동 중이다.

 

(*그레타 리와 유태오씨는 무명시절 이스트빌리지 거주자들이었다. 그레타 리는 이스트빌리지 타이 식당 위의 작은 아파트에서 세명의 룸메이트와 살았고, 유태오씨는 애브뉴A와 세인트마크플레이스(6스트릿)의 피자리아 윗층에서 살았다.)


#조 마가로: 1983년 오하이오주 아크론에서 유대계 이탈리안 가정에서 태어났다. 피츠버그의 포인트파크대에서 연극을 전공한 후 영화 '빅 쇼트(The Big Short)', '캐롤(Carol)' '퍼스트 카우(First Cow)', 넷플릭스 시리즈 'Orange Is the New Black'에 출연했다. 한국계 패션디자이너 재니스 홍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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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3.12.27 17:20
    '전생: 떠나온 자의 그리움, 남은 자의 슬픔'을 읽었습니다. 묘한 여운이 남습니다. 남녀의 사랑이 그리움과 슬픔을 자아냅니다. 사랑을 큰틀 속에서 보면, 만났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 헤어지고 그래서 그리워하고 슬퍼하고 하다보면 세월이 흘러 추억을 만들어 줍니다.
    셀린 송 작가/감독은 이런 사랑의 감정을 세밀하게 잘 나타냈네요. 12살의 어린 나이에 노라와 해성이 만나서 노라가 이민을 가기때문에 헤어졌고 12년후에 성인돼서 만나는 설정이 사랑이 출렁입니다. 그들의 사랑의 완성은 서로 합치는 게 아니라 헤어짐으로써 완성이 됨을 느꼈습니다. 그들의 그리움과 슬픔은 티없이 맑고 깨끗해서 하늘에서 떨어진 보석같은 느낌입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