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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신축년(辛丑年) 하얀 소의 해

민족화가 이중섭(Lee Jung-seob, 1916-1956)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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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흰 소, 1954. 이중섭은 그림에 'ㅈㅜㅇㅅㅓㅂ' 이라 사인했다.



"소의 커다란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저 행복하다."

-이중섭-


2021년 신축년(辛丑年)은 하얀 소의 해다. 육십간지 중 38번째로 신(辛)이 백색, 축(丑)이 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흰소는 예로부터 신성한 기운을 지닌 신비하고,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졌다. 한국의 농민들은 우직하고, 성실하며, 힘이 세지만 온순하고, 끈질긴 기질의 소를 가축이라기보다 식구처럼 생각했다. 은근과 끈기의 우리 민족성과도 닮은 것이다. '황소 걸음'으로 느긋하게 노력해 성공에 이르는 소의 이미지는 또한, 여유와 평화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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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황소, 1953


이중섭(李仲燮, Lee Jung-seob, 1916-1956)은 '소의 화가'로 불리운다. 이중섭은 어릴 적부터 소에 매료됐다. 그림 그릴 때는 하루종일 소를 바라보았다. 소를 응시하다가 소도둑으로 오해받아 도망친 경험도 있었다고 한다. '황소' '흰소' '싸우는 소' '움직이는 흰소' '소와 어린이' 등 그가 소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중섭은 우리의 농경문화에서 충실하고, 우직하고, 강인한 소에게서 근면하며, 성실하며, 희생적인 조선인의 민족성을 발견했다. 특히 흰소는 백의민족이었던 조선인의 상징이었다. 말라깽이 소는 한국전쟁 당시 굶주렸던 한인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즉, 소는 일제 강점기 자신과 한민족의 자화상이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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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결혼식(1945)


이중섭은 1916년 평남 평원에서 지주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8살 때부터는 상공회의소 회장이었던 평양의 외조부 집에서 성장했다. 당시엔 평양 일대에서 고구려 고분벽화 발굴 사업이 진행 중이라 이중섭은 직접 벽화를 볼 수 있었다. 그 체험이 작가생활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측된다. 


미술은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서양화가 임용련(1901- ?)에게 배웠다. 임용련은 3.1운동에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와 예일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유학파였다. 그는 유럽여행 후 귀국해 미술교사로 재직했으며, 6.25 때 북한군에게 끌려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중섭은 임용련에게 배우면서 일본의 미술전에 '황소'를 출품했다. 황소는 조선인의 이미지로 이중섭의 민족주의 성향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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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싸우는 소, 1954


이중섭은 1936년 도쿄로 유학, 제국 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한 후 도쿄문화학원(분카무라)으로 옮겨 공부했다. 1941년엔 도쿄에서 유학 중이던 이쾌대, 진환, 최재덕 등과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했다. 유학시절 이중섭은 미남에, 운동과 노래에도 재능이 있는 인기 학생이었다. 


1945년 고향 평원으로 돌아와 유학시절 만났던 야마모토 마사코와 혼인했다. 이중섭은 부인에게 '남쪽에서 온 덕 있는 여인'이라는 뜻의 한국 이름 '이남덕(李南德)'을 지어주었다. 이후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로 가르쳤으며, 그해 박경수, 구상 등이 가담한 원산문학가동맹의 광복기념 시집 '응향'의 표지를 제작, 필화 사건에 말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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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1954 

  

6.25가 발발한 후는 부산, 통영, 진주, 대구, 제주도, 서울 등지를 옮겨다니며 살았다. 1951년 서귀포에서 11개월간 머무를 때 바닷 게를 잡고, 한라산에서 부추를 캐면서 생활했다. 가난했어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이듬해 장인이 별세하자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으로 갔다. 이중섭은 1953년 부두 노동자로 일해 번 돈으로 선원증을 마련해 일본으로 가서 가족과 상봉했다. 하지만, 신분 때문에 1주일만에 한국으로 돌아간 후 이산가족이 된다.     


그동안 이중섭은 막노동으로 생계를 잇다가 건강 악화로 그만 두고, 그림 재료 살 돈이 없어서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리기도 했다. 이 가난한 미술가의 혼이 담긴 은지화는 주한 미대사관 문정관 출신 아서 맥타가트(Arthur McTaggart)가 구입했고,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신문을 읽는 사람들' '도원(낙원의 가족)' '동화의 땅' 등 3점을 기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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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은지화 '두 아이', 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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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은지화 '부부', 1950년대 


이중섭의 첫 전시는 1955년 서울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열렸다. 그림은 많이 팔렸지만, 전쟁 통에 그림값의 수금이 어려웠다. 이에 이중섭은 자괴감에 빠져 거식증과 조현병 증세를 보였다. 그해 봄 대구 미국공보관에서 연 두번째 개인전 실패 후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이중섭은 행려병자처럼 살다가 황달, 간염, 영양실조 등이 겹쳐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시신은 무연고 처리되어 3일 동안 방치되었다가 시인 구상이 주도해 장례식을 치렀으며,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구상은 이중섭에 대해 "나는 이토록 삶과 예술이 일체되는 예술가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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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춤추는 가족, 1950년대/ 가족과 비둘기, 1956 


2002년 제주도 서귀포에 이중섭 가족이 살던 집이 박물관으로 설립됐다. 매년 9월엔 이중섭 예술제가 열린다. 2007년 가수 김광섭, 싱어송라이터 김현성 등이 참가한 이중섭 추모 앨범 '그 사내 이중섭'이 출반됐다. 2012년 4월 10일 탄생 96주기엔 구글 두들이 '흰소'를 로고로 올렸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중섭 탄생 100주년 회고전 '백년의 신화'가 열렸으며, 기념 우표도 발행됐다. 같은 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리틀 포레스트'의 임순례 감독이 이중섭 전기영화를 연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2018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소'(연대미상)이 47억원에 낙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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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서울옥션에서 47억원에 팔린 이중섭의 '소'(연대미상) 


1951년 제주도 피난살이 중 방 벽에는 시 '소의 말'을 써서 붙여놓았다. 이 시를 본 조카가 "삼촌 시도 써요?" 하고 물었더니 이중섭은 "그냥 소가 말한 걸 옮겨 적었지. 조선의 소(牛)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소의 말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남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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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ite Cow, Google Doodle,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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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1.01.04 19:58
    신축년 새해에 다시 컬빗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중섭 화가를 소개하셨군요. 가슴뭉클한 얘기가 많네요. 손바닥 보다 조금 클까한 담배갑 은종이에 그린 바닷가재를 사진으로 보고 바닷가재가 살아움직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늘 컬빗에서 그의 황소그림을 보여주어서 찬찬히 봤습이다. 사람들이 힘이 센 사람을 황소같다고 하는 표현을 이 그림들이 여실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화폭이 좁아서 튀어 나올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천재 화가가 오래 살아서 서구에서 전시회를 했었으면 동양의 반 고흐라는 명칭을 받았음이 분명할 겁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