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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의 그림자 밖에서 

박래현(1920-1976) 화백 탄생 1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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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 노점, 1956(왼쪽)/ 이른 아침, 1956


코로나 팬데믹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서울의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에서는 한창 박래현 회고전(Park Rehyun Retrospective, 9/27-11/9)이 열리고 있었을 것이다. 


근대 화가 우향 박래현(雨鄕 朴崍賢, 1920-1976)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으로 기획된 것이다. 박래현은 남편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 화백의 빛에 가려졌다가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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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 화백/ 근원A, 동판화


'비오는 마을(우향/雨鄕)' 박래현 화백은 1920년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정라북도 군산에서 자랐다. 일본인 미술교사 에구치 게이시로의 지도를 받았으며, 경성관립여자사범학교 졸업 후 순창공립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1940년 일본으로 유학,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장(粧/Makeup)'으로 대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1943년 도쿄에서 유학한 신여성 박래현 화백은 초등학교 졸업에 청각장애자인 '구름 남자(雲甫)' 김기창 화백을 만나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혼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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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 장(粧/Makeup), 1943


박래현 화백은 전통적인 동양화의 재료를 기반으로 서구적인 구도에 감각적인 색채와 대담한 해석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하면서 1남 3녀를 낳아 길렀다. 


1940년대엔 리얼리즘에 입각한 인물화에 집중하다가 1950년대엔 입체파(큐비즘)의 영향을 받은 작업을 했다. 1956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과 대한미술협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1960년대부터는 추상적 동양화로 화풍이 바뀌었다가 1970년대엔 판화를 통해 독자적인 세계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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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 회상, 1972 / 회상A, 동판화


1967년 브라질 사웅차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한 후 판화에 매료되어 1969년 49세에 뉴욕의 판화가 로버트 블랙번의 판화 워크숍(Robert Blackburn Printmaking Workshop)과 프랫 그래픽 아트센터(Pratt Graphic Art Center)에서 동판화와 태피스트리를 공부했다. 맷방석, 부채, 엽전, 하회탈, 불상 등 한국적 소재를 기하학적으로 해석한 추상판화로 독자적인 세계를 보여주었다. 귀국 후 신세계미술관에서 연 판화전으로 화단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김기창-박래현 부부는 1947년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에서 한국 최초의 부부 작가 전시회를 연 후 1971년 펜실베니아주 알렌타운미술관(Allentown Art Museum) 부부전까지 17회의 듀오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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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 달밤, 1953


박래현 화백은 1975년 다시 판화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왔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한 후 1976년 1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운보 김기창-우향 박래현 부부가 살던 서울 성북동 한옥은 1976년 호 앞자리를 따서 지은 운우미술관이 되었다. 김기창 화백은 아내를 잃은 슬픔을 딛고, 조선 민화를 파격적인 구도로 변형한 화풍의 '바보 산수'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다. 197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박래현 유작전이 열렸으며, 2020년 8월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박래현 탄생 100주년 회고전이 열릴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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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 화백 가족

 

나의 아내 박래현


-운보 김기창-

 

아! 아! 우향

예술을 위해 가시밭길을 밟고

지금은 십자가를 진 당신.

나와 아이들을 위해 또 한 개의

십자가를 지고 간 당신.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그대여!`

내 못다 운 울음을 우느냐

겨울 뜨락은 

그대 제일로 아픈 공허에 찬 심장에

내 부르는 소리만 메아리쳐 되돌아 오는

그런 서러움으로 나날을 채우며

되씹어야 하는가…

나는 한 번 더 소리쳐 불러 보오. 

나의 영원한 아내 박래현! 

나의 소중했던 와이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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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0.09.16 22:38
    박래현 화백을 컬빗 덕에 오래간만에 만나게 됐습니다. 50년대 여학교시절에 미술 선생님께서 단체로 우리를 인솔해서 국전에 데리고 갔습니다. 국전이 경복궁에서 열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 미술 선생님이 대통령상을 탄 그림이라고 설명을 해주셔서 그 그림앞에서 한참을 서서 본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림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냥 그림만 봤죠. 대통령상이라고 해서 뚫어져라고 보고 또 봤습니다. 뭔지 추상적인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처음으로 박래현이란 이름을 알았습니다.
    그후로 김기창 화백도 알게되었고 부부라는 사실도 알게됐습니다. 남편을 향한 뼈를 깎는 헌신에 탄복을 했습니다. 박래현씨가 '남편을 사랑해서'라기엔 표현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사랑 외에도 예술을 사랑하는 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됩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