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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rtist & Muse <12> Egon Schiele & Wally 

'비엔나의 모나리자' 발리 노이칠(Wally Neuz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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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n Schiele, Self-portrait, 1910/ Portrait of Wally, 1912

 

2010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1천900만 달러의 합의금을 지불하고 뉴욕에서 되찾아간 한 여인의 초상화가 미술계의 화제였다.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의 뮤즈 '발리의 초상(Portrait of Wally/ Porträt von Wally, 1912)'이었다.  

 

1997년 10월 10일 뉴욕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서 에곤 쉴레 특별전 'Egon Schiele: The Leopold Collection'이 개막됐다. 쉴레의 작품만 250여점, 총 5천400여점을 소장한 오스트리아의 안과의사 아트 컬렉터 루돌프 레오폴드(Rudolf Leopold)의 컬렉션에서 대여해온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였다. 전시가 시작된 후 '발리의 초상'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인물이 나타났다. 그리고, '발리의 초상'은 소송 분쟁으로 인해 12년간 뉴욕 법원에 묶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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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n Schiele: The Leopold Collection, 1998, Museum of Modern Art, NY

 

원래 '발리의 초상'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아트딜러 리아 본디(Lea Bondi)가 소유했던 그림이었다. 유대인 학살로 하루 빨리 피신해야했던 본디는 아트딜러 프레드리히 벨츠(Friedrich Welz)의 협박으로 그림을 넘기게 된다. 벨츠는 유대인 치과의사이자 아트컬렉터 하인리히 라이거 박사에게 수용소로 이송되기 전 소장하고 있던 쉴레의 그림들을 팔 것을 강요했다. 라이거 박사는 1942년 10월 수용소에서 살해당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군은 벨츠를 체포, '발리의 초상'을 비롯 그가 전쟁 중 수집한 그림들을 회수해 오스트리아 정부에 넘겼다. 오스트리아국립갤러리는 '발리의 초상' 출처를 라이거의 상속인으로부터 구입한 것으로 밝혔지만, 오류로 판명된다. 오리지널 소유자인 리아 본디는 1946년 벨츠에게 연락해 '발리의 초상'이 비엔나미술관으로 넘어갔다고 전했으며, 1953년엔 런던에서 루돌프 레오폴드에게 '발리의 초상'을 회수하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레오폴드는 이듬해 직접 뮤지엄으로부터 '발리의 초상'을 구입하게 된다. 본디는 발리를 되찾지 못한 채 196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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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pold Museum, 2008, Vienna, Austria <Wikipedia>

 

1994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레오폴드 박사가 소장한 '발리의 초상'을 비롯, 5천400여점을 5억 달러에 매입, 2001년 비엔나에 레오폴드뮤지엄을 개관했다. 1998년 뉴욕에서 본디의 상속인들은 '발리의 초상'은 나치 전리품으로 부적절하게 획득한 그림이라며 레오폴드뮤지엄을 상대로 소유권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분쟁으로 '발리의 초상'은 12년간 뉴욕법원에 보관됐다. 

 

2010년 7월, 양측은 1천900만 달러의 합의에 도달, 레오폴드뮤지엄 소장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발리의 초상'은 '비엔나의 모나리자'가 되었다. 한편, 레오폴드 자신은 2010년 6월까지 뮤지엄의 종신 관장으로 일하다가 발리를 다시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에곤이 감옥으로 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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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n Schiele, Self-portrait with Physalis, 1912

 

세상과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채색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달리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쉴레는 추악함에 더 매료됐다. 특히 그는 자신의 누드를 포함하여 육체를 과장되며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했다. 그는 1918년 10월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했다. 그 사흘 전엔 그의 부인 유디트 쉴레가 임신 6개월에 스페인 독감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해 2월엔 쉴레의 멘토였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3-1918)가 세상을 역시 스페인 독감으로 눈을 감았다. 28세에 요절한 쉴레가 남긴 회화 300여점과 종이작품 3천여점에는 그의 슬픈 육체와 욕정, 염세적인 인생관이 담겨있다. 

 

 

0033.jpg Gustav Klimt and Egon Schiele

 

1890년 툴른에서 태어난 에곤 쉴레의 아버지는 철도역장이었다. 어릴 적부터 기차를 그리곤 했지만, 아들을 철도 기술자로 키우고 싶었던 아버지는 그의 스케치북을 찢어버리곤 했다. 15살 때 아버지는 매독으로 사망하고, 엄마는 매정했다. 쉴레는 철로에서 일하던 외삼촌 집에서 자라게 된다. 

 

16살에 비엔나미술공예학교에 입학했지만, 3년 후 보수전통적인 수업에 불만을 품고 중퇴했다. 쉴레는 같은 뜻을 품고 있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막스 오펜하이머(Maz Oppenheimer)와 함께 뉴아트그룹(Neukunstgruppe)을 결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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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n Schiele, Lovers (Self-portrait with Wally), 1915

 

1907년 17세의 쉴레는 45세의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났다. 클림트와 쉴레는 아르누보와 에로스에 집착한 화가였다. 클림트만큼 쉴레도 플레이보이 화가였다. 쉴레는 8개월간 작업실에 180명의 여인이 거쳐갔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클림트는 쉴레의 멘토가 되어 그의 그림을 사주고, 모델과 후원자를 소개하고, 분리파 워크숍에도 추천했다. 

 

1911년 쉴레는 모델을 구할 돈이 없었다. 클림트는 자신의 모델이자 애인이었던 발리 노이칠을 쉴레에게 소개해주었다. 21살의 쉴레와 17살의 노이칠은 이후 4년간 불꽃튀는 연인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비엔나의 모나리자, 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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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n Schiele, Woman in Underclothes and Stockings(Wally Neuzil), Detail, 1913

 

발리 노이칠은 1894년 오스트리아 남부의 타텐도프에서 태어났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어릴 적 별세하면서 발리 가족은 가난에 쪼들려 이 마을 저마을을 전전하면서 살았다. 발리는 판매원, 캐셔, 가게 마네킹 등을 하다가 클림트의 모델이 됐다. 당시 비엔나 부르조아들의 눈에 화가의 모델은 매춘부와 별 차이가 없는 하찮은 직업이었다. 

 

1911년 에곤 쉴레를 만난 발리는 비엔나를 떠나 쉴레 엄마의 고향 크루마우(현 체코 공화국)에서 동거하기 시작했다. 쉴레는 마을 10대 소녀들을 꾀어다 그림을 그리고, 보헤미안 라이프 스타일로 주민들의 원성을 샀고, 1년만에 쫓겨나게 된다. 노이렝백으로 이사한 후에는 소녀 유괴 혐의로 옥살이까지 했다. 작업실에서 발견된 100여점의 드로잉이 미성년자들을 모델로 한 포르노 그림이라고 판정된 것. 판사는 법정에서 그림을 태우게 만들었고, 결국 쉴레는 24일간 수감되기에 이른다. 쉴레가 감옥살이를 할 때 발리는 음식과 미술도구를 가져다주며 뒷바라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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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n Schiele, Cardinal and Nun (Caress), 1912/ Egon and Wally, 1913

 

발리는 쉴레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주었다. 발리는 쉴새 없이 그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녀는 또한 쉴레의 수입을 비롯, 아트 콜렉터, 화랑 주인, 고객들을 관리하는 매니저 역할까지 했다. 심지어는 직접 그림 배달까지 도맡았다. 물론 가정부 일에 애인 노릇까지 했다. 발리와의 동거 시절(1911-1915)은 쉴레가 창작욕을 불태웠던 황금기로 걸작들이 쏟아졌다. 훗날 쉴레는 "가까운 지인들 중 아무도 내가 최근에 만난 발리처럼 대해주지 않았다. 발리의 행동은 너무도 고귀했고, 나는 매료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쉴레는 곧 변심한다. 사랑을 버리고 야망을 껴안은 것이다. 1915년 비엔나의 작업실 건너편에 살고 있던 부잣집 딸 에디트 하름스(Edith Harms)를 만난 쉴레는 그녀와 결혼을 계획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매춘부로 먹고 살았던 발리, 스승의 애인이었던 발리를 배신하고, 에디트에게 청혼하고, 두달 후엔 결혼했다. 쉴레는 결혼 후에도 바람끼를 버리지 못했다. 에디트의 동생 아델을 모델로 그리면서도 외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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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n Schiele, Death and the Maiden, 1915 

 

쉴레는 발리를 차버릴 수 없었다. 어느날 쉴레는 카페에서 발리에게 편지 한통을 건냈다. 매년 에디트를 빼고 단둘이 여름휴가를 보내자는 제안이었다. 발리는 자존심이 상해 그 자리를 떠났다. 소리 지르지도 않았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발리는 복수하듯 클림트에게 돌아가 모델로 활동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크로아티아에서 적십자의 간호원으로 복무했다. 1917년 크리스마스, 발리는 성홍열에 걸려 사망한다. 그녀 나이 23세였다. 

 

10개월 후엔 쉴레 부인 에디트가 스페인 독감으로 죽었고, 쉴레는 사흘 후 눈을 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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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레오폴드뮤지엄에서는 쉴레의 발리 노이칠을 집중 조명하는 특별전 'WALLY NEUZIL. Her Life with EGON SCHIELE'을 열었다.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슈베르트 작곡 '죽음과 소녀(Death and the Maiden)'에서 영감을 받은 동명 회화(1915)다. 쉴레는 발리의 사망 소식을 들은 후 이 그림의 원래 제목 '남자와 소녀'에서 '죽음과 소녀'로 바꾸었다. 

 

2016년 오스트리아 디에터 베르너(Dieter Berner) 감독이 연출한 영화 '에곤 쉴레: 죽음과 소녀(Egon Schiele: Death and the Maiden)'가 나왔다. 

 

 

#에곤의 부인, 에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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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n and Edith, her nephwe/ Egon Schiele, Egon and Edith Schiele: Seated Couple, 1915

 

발리의 저주였을까? 1915년 쉴레와 에디트의 결혼식 나흘 후 쉴레는 징집됐다. 쉴레는 군복무를 위해 에디트와 함께 프라하로 갔다. 에디트는 호텔에 머물렀다. 

 

스페인 독감이 번지기 시작하던 1918년 2월 6일 스승 클림트(55)가 세상을 떠났다. 다음날 쉴레는 비엔나의 병원 시체실로 가서 스승의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취한 아티스트, 드물게 심도깊은 사람, 그의 작품은 성소(sanctuary)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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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n Schiele, The Family,1918. Belvedere, Vienna, Austria

 

1918년 쉴레는 떠오르는 작가로 주목받게 된다. 비엔나 분리파 화가협회와 개인전을 열었으며 작품이 잘 팔려나갔다. 이즈음 에디트가 임신하자 쉴레는 가족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에디트는 누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은 뒤에 배치했다. 그리고, 조카 토니를 모델로 가족의 초상을 그렸다. 그림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해 10월 쉴레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에디트는 8일 전 스페인 독감에 걸려서 지금 폐렴으로 고통받고 있어요. 에디트는 6개월 임신 상태입니다. 이 질병은 격심하고, 위태로워요. 저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어요." 

 

에디트는 10월 28일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쉴레는 사흘 뒤 10월의 마지막날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스페인 독감과 화가들 <1> 에드바르트 뭉크

*스페인 독감과 화가들 <2> 구스타프 클림트

*스페인 독감과 화가들 <3>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

*Voyeur from Vienna: The naked truth of Egon Schiele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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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0.09.24 12:48
    구스타프 클림트는 알았지만 에곤 쉴레와 발리 노이칠은 몰랐습니다. 이 둘을 알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스트리아에 또 갈 기회가 생기면 이들의 그림을 볼껍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