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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 Muse <6> Édouard Manet & Three Muses 

에두아르 마네의 뮤즈들:빅토린, 수잔느, 베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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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douard Manet, Berthe Morisot with a Bouquet of Violets, 1872/ Victorine Meurent, Le Déjeuner sur L'herbe, 1863/ The Reading(Suzanne Manet), 1868 

 

모더니스트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는 19세기말 프랑스 화단에서 스캔달의 중심에 서있었다. 인상적인 마네의 뮤즈 세명 중 두명은 화가 빅토린 뫼랑과 베르트 모르소, 한명은 아버지의 애인이었던 부인 수잔느 마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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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douard Manet, Manet A La Palette,1878-79

 

 

에두아르 마네는 1832년 파리의 상류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귀스트는 판사였고, 스웨덴 황태자 샤를 베르나도트(스웨덴과 노르웨이 왕/ 칼 14세 요한 왕, Charles XIV John)가 어머니의 대부였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법관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에두아르와 동생 외진은 화가의 길을 나서게 된다. 특히 삼촌 에드몽 푸르니에르는 조카를 루브르 뮤지엄에 데리고 다니며 화가의 꿈을 키워주었다. 

 

마네는 토마스 쿠튀르를 사사하면서 루브르에서 거장의 그림을 베끼면서 소일했다. 16살엔 배 타고 리우데자네이루에 갔으며, 20대 초반엔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를 여행하며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즈, 프란시스코 고야, 프란스 할스 등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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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Fantin-Latour, A Studio at Les Batignolles, 1870

 

마네의 '팔레트를 든 자화상'(Manet A La Palette,1878-79)은 2010년 런던 소더비에서 작가 최고가인 3천300만 달러에 팔렸다. 앙리 팡탕-라투르(Henri Fantin-Latour)가 그린 바티뇰 스튜디오에서 마네는 붓을 잡고 있으며, 오귀스트 르노아르(모자 쓴 이), 모네(뒷짐 진 이), 소설가 에밀 졸라(손에 안경 쥔 이)가 담겼다. 

 

1856년 작업실을 마련한 마네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게 된다.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버리고, 느슨한 붓놀림과 디테일을 생략하면서 인상주의의 시조가 된다. 형식 뿐 아니라 주제면에서도 마네는 앞서갔다. 일상에서 소재를 얻은 마네는 1863년 파리 살롱 낙선전(Salon des Refusés)에서 정장 차림의 두 남성과 나체 여인의 피크닉을 묘사한 '풀밭 위의 점심 식사(Le Déjeuner sur L'herbe)'로 스캔달에 휩싸였다. 같은 해 나체의 매춘부가 등장하는 '올랭피아(Olympia)'로 화단에 폭풍을 일으켰다. 이 두 회화에 등장한 악명높은 모델이 빅토린 뫼랑이다.

 

 

#모델/화가 빅토린 뫼랑 Victorine Meu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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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douard Manet, Le Déjeuner sur L'herbe, 1863. Musée d'Orsay

 

 

마네의 걸작 '풀밭 위의 식사'(1863)와 '올랭피아'(1863)의 모델이 된 빅토린 뫼랑(Victorine Meurent, 1844-1927)은 청동 착색공 아버지와 모자 디자이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빨간 머리에 자그마한 체구로 별명이 '새우(La Crevette)'였던 뫼랑은 16살 때 마네의 스승 토마스 쿠튀르의 스튜디오에서 모델일을 시작했다. 1862년 마네를 만나 두점의 걸작에 등장하게 된다.  

 

파리 살롱에서 낙선한 '풀밭 위의 식사'는 숲 속에서 신사 두명과 피크닉 중인 누드 여인이 관람객을 응시하는 모습을 담았다. 이 그림은 당시 관람객들에게 쇼킹한 사건이었다. 마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 조르지오네(Giorgione)와 그의 제자 티치아노(Titian)의 그림 '전원 콘서트(Pastoral Concert, 1510-11, 루브르 소장)'과 라파엘로(Raphael) 작 '파리의 심판(Judgement of Paris, 1515)'를 패러디했다. 

 

이 그림은 역사적 사건이나 신화, 성경의 이야기가 아닌 현실 인물들의 묘사로 충격을 주었다. 정장한 부르조아 남성들 옆에 벌거벗은 여인은 고전 속의 여신이 모델이나 매춘부로, 그녀의 시선은 도발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마네는 당시  파리의 불로뉴 숲에 성행했던 매춘과 부르조아의 위선을 풍자했을지도 모른다. 여신이 아니라 매춘부는 갤러리에서 보기에 불편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누드 여인은 빅토린 뫼랭이며, 오른쪽 남자는 마네의 형제 외진(Eugène)과 구스타브 마네(Gustave Manet)를 조합했으며, 왼쪽 남자는 처남인 네덜란드 조각가 페르디난드 린호프(Ferdinand Leehoff)가 모델이다. 그리고, 뒤에 시냇물에 발을 씻는 여인은 마네의 부인 수잔느 린호프(Suzanne Manet)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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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orine Meurent,1985/ Édouard Manet, Olympia, 1863. Musée d'Orsay

 

마네는 1865년 다시 빅토린 뫼랑을 모델로 그린 '올랭피아(Olympia, 1863)'을 파리 살롱에 출품해 도마 위에 올랐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보다 더 노골적인 매춘부가 등장한 것이다. 이 작품의 누드 여인 역시 관람객을 향한 응시가 가히 도발적이다. 풀밭의 신사들 대신 침실에서 하녀가 시중 들고 있다. 피크닉에서 '나의 침실로'로 더 진전된 것이다. 이 그림은 티치아노 작 '우르비노의 비너스(Venus of Urbino, 1534)'에서 영감을 받은 패로디 회화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로 널리 알려진 빅토린 뫼랑이 다시 매춘부로 등장하면서 매춘부 '올랭피아'는 '부도덕하다' '저속하다'는 등 더욱 논란을 야기시켰다. 신화가 아니라 현실의 여성, '불편한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흑인 하녀는 마네가 즐겨 그렸던 모델 로리(Laure)다. 마네는 파리 튈러리 정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하다가 발탁됐다.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는 '올랭피아'를 걸작으로 칭송했다. 이유는 다른 화가들은 비너스의 거짓만을 표현할 때 마네는 진실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졸라는 마네와 친구 세잔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소설 '걸작(L'Oeuvre, 1886)'을 집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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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orine Meurent, Self-Portrait, c. 1876/ Palm Sunday, c. 1880

 

빅토린 뫼랑은 이후 1870년대 초까지 마네의 모델로 일하면서 그의 친구 에드가 드가(Edgar Degas)와 벨기에 출신 화가 알프레드 스티븐슨(Alfred Stevens)의 모델로도 활동했다. 뫼랑은 1875년 에티엔느 르로이(Étienne Leroy)으로부터 인물화를 사사하면서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이듬해엔 파리 살롱에 마네는 낙방했지만, 뫼랑은 합격했다. 이후 뫼랑의 작품은 파리 살롱에 모두 6차례 전시됐다. 1879년엔 미술아카데미(Académie des Beaux-Arts) 회원이 됐다.  

 

1906년 파리를 떠나 콜롱브 교외에 정착한 뫼랑은 마리 뒤푸르라는 여성과 여생을 함께 하다가 1927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피아니스트/부인 수잔느 마네 Suzanne M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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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douard Manet, Madame Manet at the Piano, 1867/ Boy Carrying a Sword, 1861

 

'풀밭에서의 점심 식사'가 논쟁을 일으키던 1863년 가을 에두아르 마네는 네덜란드 출신 수잔느 린호프(Suzanne Leenhoff, 1829-1906)와 결혼했다. 마네는 31세, 린호프는 34세였다. 게다가 린호프는 아버지 오귀스트 마네의 애인이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이듬해 결혼에 이르게 된다.  

 

오귀스트 마네는 1851년 수잔 린호프를 자식들의 피아노 교사로 고용했다. 마네는  19세였다. 마네는 아버지 몰래 밀애를 나누다가 마네가 독립한 후엔 동거에 들어갔다. 게다가 린호프는 1852년 아들 하나를 낳은 상태였다. 아버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린호프는 자신의 동생으로 위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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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ar Degas, M. and Mme Édouard Manet, 1868-1869

 

1862년 루브르뮤지엄에서 만나 친구가 된 에드가 드가는 1868년 마네와 수잔 마네(린호프) 부부를 화폭에 담았다. 원래 이 그림에서 마네는 피아노 치는 부인 옆  소파에 늘어져서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서 인지 부인을 묘사한 오른쪽 캔버스는 찢겨졌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다. #1 마네가 부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찢었다 #2. 당시 마네와 드가의 관계가 나빴다, #3 마네가 부인에게 화가 났었다 등의 설이다. 드가 역시 찢겨진 그림에 광분해서 그림을 도로 가져갔다. 드가는 마네 부인을 다시 그리려했지만, 끝내 시도하지 못했다.   

 

 

#화가/제수 베르트 모리소 Berthe Moris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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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douard Manet, The Rest(Berthe Morisot), 1869

 

마네는 1868년 베르트 모리소(Berthe Morisot, 1842-1895)를 만나 6년간 11점을 그렸다. 모리소는 마네를 사랑했지만, 그는 이미 유부남이었다. 이들은 편지로 애정을 나누었으며, 마네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이젤을 주었다. 모리소는 대신 에두아르드의 동생인 화가 외진 마네(Eugène Manet)와 결혼했다. 에드가 드가는 결혼 선물로 외진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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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the Morisot/ Berthe Morisot, Après le Déjeuner, 1881

 

모리소는 프랑스 부르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코코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의 증조카였다. 당시 부르주아 가정의 딸들은 미술 교육을 받았고, 모리소도 자매들과 화가 조셉 기샤르를 사사했다. 루브르에서 거장들의 그림을 베끼며 마네와 모네를 알게 됐다. 1861년부터는 장 바티스트-카미유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에게서 배웠다. 

 

모리소는 1875년 와이트섬에서 마네를 모델로 그리기도 했다. 2013년 마리소의 '점심식사 후(Après le déjeuner, 1881)'가 1천90만 달러에 팔리며, 전년 루이스 부르조아(Louise Bourgeois)가 세운 1천70만 달러를 능가하며 여성 작가 최고가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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