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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1861 댓글 1

Artist & Muse <10> Paul Cézanne & Madame Cézanne

폴 세잔: 오르탕스와 사과와 생트빅투아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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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Cézanne, Self Portrait with Palette, 1887/ Portrait of Mme Cézanne, c. 1885


'근대 회화의 아버지'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의 뮤즈는 누구였을까? 인상파 화가들이 강변으로 들판으로 나가 빛의 변화를 포착하고 있을 때 세잔은 고향 액상 프로방스에 은둔하며 바위산 생트-빅투아르 위에서 그리곤 했다. 세잔은 생트-빅투아르 풍경화(유화 44점, 수채화 43점)를 90점 가까이 남겼다. 인상파 화가들이 작업실에서 아름다운 뮤즈들을 담고 있을 때 세잔은 작업실에서 사과가 썩을 때까지 그렸다. 


사과와 생트-빅투아르산은 그의 뮤즈였다. 괴퍅한 성격의 세잔이 반복해서 그린 여인은 부인(Madame Cézanne), 마리 오르땅스 피케였다. 세잔은 1869년부터 1890년대 후반까지 피케를 모델로 한 초상화를 27점 남겼다. 



마담 세잔, 마리 오르탕스 피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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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Hortense Fiquet, 1870/ Paul Cézanne, The Kiss of the Muse  1860


마리 오르탕스 피케(Marie-Hortense Fiquet, 1850-1922)는 프랑스 동부의 와인산지 주라의 살리니에서 태어났다. 19살에 파리의 미술학교 스위스 아카데미에서 책방점원 겸 제본사로 일하면서 아르바이트로 모델일을 하던 중 세잔을 만났다. 세잔은 자신보다 11살 연상이었다. 1871년 보불전쟁 중 함께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 레스타크에서 동거했다. 


당시 세잔은 은행가인 아버지가 용돈을 끊을까봐 두려워서 피케와의 관계를 비밀로 했다. 아버지는 그가 변호사가 되기를 바랬고, 세잔도 법대에 진학했지만, 화가를 지망해서 아버지를 실망시켰다. 1872년 아들 폴이 태어난 후에도 세잔은 수년간 아버지에게 피케와 아들에 대해 일체 함구했다. 아버지는 세잔을 지원하기로 하고, 40만 프랑의 유산을 남겨준다. 이에 세잔은 돈 걱정 없이 맘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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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Cézanne, Madame Cézanne in a red armchair, 1877/ Madame Cézanne in a Red Dress, 1888-90


세잔과 피케가 공식 결혼식을 올린 것은 처음 만난지 17년 후, 1886년이었다. 아들 폴은 14세가 됐고, 이 결혼식엔 세잔의 부모도 참석했다. 이 무렵 세잔은 낭비벽이 유독 심했던 피케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결혼식을 올린 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세잔은 피케와 별거에 들어갔다. 세잔은 어머니와 누이에게 "내 아내는 스위스와 레모네이드만 좋아해"라고 불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잔의 괴퍅한 성격을 감당할 여자 모델이 많지 않았나 보다. 세잔은 1890년대 후반까지 피케를 그리곤 했다. 하지만, 세잔은 아내 피케에게 한푼의 유산도 남기지 않았다. 1906년 세잔이 사망한 후 유산의 100%는 아들 폴에게 돌아갔고, 피케는 땡전 한푼 받지 못했다. 피케는 아들로부터 유산의 일부를 합의금조로 받았지만, 도박으로 탕진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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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Cézanne, Self Portrait in a Bowler Hat, 1886/ Portrait of Paul, The Artist's Son, 1880


1886년 에밀 졸라는 죽마고우였던 세잔을 모델로 한 소설 '작품: 예술가의 초상'(L'Œuvre/ The Masterpiece, 1886)을 발표했고, 이를 계기로 세잔과의 오랜 우정이 깨지게 된다. 이 소설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 화가 클로드 랑티에가 자살로 끝나는 이야기로 세잔에게는 너무도 '잔인한 픽션'이었다. 졸라는 이 소설에서 화가 부인 크리스틴을 누드 포즈를 취하는 모델로 묘사했다. 세잔은 부인을 항상 정숙하게 그렸기에 더욱 더 분노했을 법 하다. 


프랑스의 여성감독 다니엘 톰슨(Danièle Thompson)은 세잔과 졸라의 우정을 그린 영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Cézanne et Moi, 2016)를 연출했으며, 한국에서도 개봉됐다. 2014년 메트로폴리탄뮤지엄에서는 세잔의 부인 초상화전 'Madame Cézanne'(11/19-3/15, 2015)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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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ame Cézanne, The Mettropolitan Museum of Art, 2014


*세잔의 뮤즈, 마담 세잔-오르탕스 피케 초상화전@메트뮤지엄, 2015



폴 세잔과 에밀 졸라: 사과에 얽힌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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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ézanne et Moi, 2016


폴 세잔과 에밀 졸라(Émile Zola, 1840-1902)의 우정은 소년기 액상 프로방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1852년 콜리쥬 부르봉교에서 만났다.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이었던 세잔은 아버지를 여읜 졸라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자 그의 편이 되어주었다. 이에 졸라는 사과 한 바구니를 들고 세잔을 찾아갔다. 그 사과는 훗날 세잔의 뮤즈가 된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아이작 뉴튼의 사과,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애플과 함께 역사상 4대 사과로 불러도 좋을 만한 것, 폴 세잔의 사과다. 당대 인상파 화가들이 시내로, 바닷가로, 강가로, 정원으로 나가 빛의 절묘한 변화를 포착할 즈음, 세잔은 집안에 틀어박혀서 사과를 연구했다. 세잔은 사과 정물화로 당대 화가들에게 새로운 미술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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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Cézanne, Fruit bowl, Glass and Apples, 1880/ Mont Sainte-Victoire with Large Pine, c. 1887


세잔은 "미술의 본질은 형태에 있으며, 지상에 있는 모든 형태는 구, 원통, 원뿔의 본질적인 형태로 단순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그림은 외부 세계의 복사가 아니라 그림 내부의 조형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미술가들은 사실적 그림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세잔은 관습적인 원근법, 해부학과 명암법을 파괴하고 다양한 앵글로 사물을 포착하며 입체파(Cubism)를 예견했으며, 그림은 느낌의 조합으로 색채, 형태와 면의 관계를 창조해내는 것에 집중하며 추상미술(Abstract Art)의 세계를 열어 주었다. 

 

파블로 피카소는 "나의 유일한 스승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으며, 앙리 마티스는 거실에 '마담 세잔'을 늘 걸어 놓았다. 화가 모리스 드니는 '세잔에게 바치는 경의'(1990)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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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ce Denis, Homage to Cézanne, 1900.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아티스트와 뮤즈 <8>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여인들

*아티스트와 뮤즈 <9> 구스타프 클림트와 뮤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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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0.08.28 18:14
    정물화하면 폴 세잔이 떠오릅니다. 그림을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을 하게합니다. 중학교때 조각가이며 미술 선생님이셨던 고 백문기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많은 화가들을 설명해주셨는데 대부분 화가들이 극심히 가난했는데, 세잔은 아니었다고 하면서 세잔은 그림을 그려서 아무데나 버렸다고 합니다. 돈이 많으니까 그림을 팔 필요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인이 쫓아다니면서 그의 그림을 줍다시피해서 모았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 미술 선생님의 수업이 잊혀지지 않네요.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