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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223 댓글 1

마네를 분노하게 만든 드가의 그림

'도려낸 수잔느와 피아노'... 무엇이 문제였을까?

 

MANET/DEGAS @The Met

Sept. 24-Jan. 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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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et/Degas @The Met 

 

에두아르드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와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우정과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특별전 '마네/드가(Manet/Degas)'가 메트로폴리탄뮤지엄에서 9월 24일 시작되어 내년 1월 7일까지 계속된다. 

 

'올랭피아'(1863)와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로 프랑스 스캔달을 불러일으켰던 마네와 발레리나 그림으로 잘 알려진 드가는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이 전시는 파리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3/28-7/23, 2023)에서 시작되어 메트뮤지엄으로 이어진 순회전이다.   

 

'마네/드가'전엔 경마, 카페, 매춘, 욕조, 바다, 초상화 등 주제별로 두 화가의 화풍을 대조할 수 있는 기회로 160점의 유화, 판화, 파스텔, 드로잉이 소개된다. 

 

 

#파리의 부르주아 가문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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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douard Manet, “Déjeuner Sur l’Herbe,” 1862-63. Courtauld Gallery, London. From Manet/Degas @The M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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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미술관 소장 회화는 메트뮤지엄에 오지 않았다. Édouard Manet, “Déjeuner Sur l’Herbe,” 1862-63. Musée d'Orsay, Paris

 

에두아르 마네는 1932년 1월 23일 파리 르 보나파르트가의 맨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판사, 엄마는 외교관의 딸이었다. 아버지 오귀스트는 에두아르가 법률가가 되기를 기대했지만, 삼촌 에드몽이 화가를 권하며 조카를 루브르뮤지엄으로 데려가곤 했다. 삼촌의 소개로 드로잉 강좌에서 훗날 프랑스 미술장관이 될 앙토냉 프루스트를 만났다.

 

마네는 루브르에 드나들며 벨라스케스와 티치아노의 그림을 베끼며 수련했다. 16살 때엔 리우데자네이루, 20대 초엔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를 여행했으며, 프란스 할스, 벨라스케즈, 고야의 영향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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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ar Degas, The Bellelli Family, 1858–1867. From Manet/Degas @The Met 

 

에드가 드가는 1934년 7월 19일 파리에서 5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은행원, 엄마는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출신이다. 원래 성은 De Gas였지만, 성인이 된 후 Degas로 바꾸었다. 엄마가 13세 때 사망해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삼촌들의 영향을 받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드가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법률가가 되기위해 파리대학 법대에 입학했지만, 공부는 등한시했다.

 

루브르뮤지엄 복사 강좌에 다녔으며, 1855년엔 인물화 거장 장 오귀스트-도미니크 앙그르를 만나 영향을 받는다. 이듬해엔 이탈리아로 가서 3년간 살며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을 복사하면서 수련했다. 이 시절 '벨렐리 가족(The Bellelli Family) 초상화 시리즈를 시작했으며, 초기엔 역사 화가를 희망했다. 드가는 미 뉴올리언스도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다. 

 

 

#루브르뮤지엄에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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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ar Degas, Beach Scene, 1869-70/ Edouard Manet, On the Beach, Boulogne-sur-Mer, 1868. From Manet/Degas @The Met 

 

마네와 드가는 기질이 정반대였다. 마네는 따뜻한 성품에 매력적이며, 말이 많은 편이었고, 드가는 외톨이에 침울한 성격이었다. 마네는 낙관적이었고, 드가는 냉소적이었다. 마네와 드가는 1861년경 루브르 뮤지엄에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마네는 30세, 드가는 28세 즈음이었다. 드가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아기 공주 초상화 'Portrait of the Infanta Margarita'(1653)을 판 위에 바늘로 에칭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테레사 공주는 벨라스케즈의 걸작 '하녀들(Las Meninas, 1656, 마드리드 프라도뮤지엄 소장)'에 등장하게 된다.

 

마네는 "예비 그림도 없이 그 따위로 에칭하다니 대담하군. 난 감히 그렇게 못할거야!"라고 따끔하게 말했다. 마네와 드가의 20년간 우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들은 서로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마네의 남동생 인상주의 화가 베르트 모리소(Berthe Morisot)와 결혼했을 때 드가는 결혼 선물로 초상화를 선물했다. 마네의 아들은 드가의 가족을 위해 일했다. 

 

 

#인상파의 아웃사이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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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ar Degas, Dans un café or L’absinthe (1875–76)/ Edouard Manet, La prune, 1877. From Manet/Degas @The Met 

 

인상주의(Impressionism)은 1860년대 시작되어 한 시기를 풍미했다. 주로 야외에서 풍경과 사람을 밝고 눈부신 색채를 사용, 빛의 효과 집중하고, 즉각적인 인상을 캔버스에 담는 것이 특징이다. 인상주의는 마네와 드가보다 젊은 화가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1841-1919), 클로드 모네(1840-1926), 알프레드 시슬리(1839-1899) 등 젊은 화가들이 주도했다.  

 

사실 마네는 인상주의의 시조로 평가된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 대신 느슨한 붓놀림과 디테일을 생략하는 과감한 스타일을 시도했다. 하지만, 마네는 인상파 그룹전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인상주의 화가라기보다는 전통적인 리얼리스트 화가로 강열한 대조와 대담한 색상을 선호했다. 마네는 표현력이 풍부하고, 자연스러운 스타일이었다. 

 

한편, 드가는 르누아르, 모네, 시슬리와 인상파 그룹전에 참가했지만, 동료들과는 달리 야외 풍경을 좀체로 그리지 않았고, 발레리나들을 즐겨 그렸다. 냉정하고, 계산적이었던 드가는 위대한 거장들에 대한 성찰과 연구로 그림을 그리는 사실주의 화가라고 밝혔다. 

 

 

#그림은 도려내지고, 우정도 깨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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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가 그린 수잔느와 드가가 그린 마네와 수잔느. Edouard Manet, Madame Manet au piano. 1968 (left)/ Edgar Degas, Monsieur et Madame Manet, 1868–69From Manet/Degas @The Met 

 

마네와 드가의 우정에 금이 가게된 것은 1869년 드가가 그린 마네와 부인 수잔느의 유화(Édouard Manet and His Wife) 때문이었다. 검은 정장과 황갈색 조끼를 입은 마네가 소파에 기대어 수잔느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을 듣는 모습을 담았다. 부르주아적인 휴식 시간의 이미지였다.

 

마네는 완성된 작품을 보고 분노했다. 마네는 칼로 그림의 1/3을 도려냈다. 그래서 수잔의 얼굴과 손, 몸 앞면, 피아노 부문까지 잘라져 나갔다. 드가는 침착하게 그림을 집어들고 인사를 하지 않은 채 마네의 집을 떠났다고 한다. 그림을 훼손하는 것은 화가에게는 가장 큰 모욕이다. 그것도 우정을 나눈 동료 화가의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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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ouard Manet, Olympia, 1963.  From Manet/Degas @The Met 

 

드가는 아버지의 애인과 결혼한 마네를 조롱했을까? 마네는 1863년 '풀밭위에서의 점심식사'가 논쟁을 일으키던 즈음 수잔느 린호프와 결혼했다. 사실 수잔느는 아버지 마네의 애인이었으며, 아버지가 사망한 후 정식 부부가 됐다. 마네는 31세, 수잔느는 34세였다. 아버지 오귀스트 마네는 1851년 수잔 린호프를 자식들의 피아노 교사로 고용했다. 마네는 당시 19세였다. 마네는 아버지 몰래 밀애를 나누다가 독립한 후엔 동거에 들어갔다. 수잔느는 1852년 아들을 낳는다. 하지만, 아이 아버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수잔느는 자신의 동생으로 위장했다.   

 

드가는 마네와 수잔의 공허한 결혼생활을 눈치채고 그것을 묘사했던 것일까? 이 상처받은 그림은 일본의 키타유슈시립미술관(Kitakyushu Municipal Museum of Art)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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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ar Degas, Interior Scene, 1868-1869. From Manet/Degas @The Met 

 

한편, 에드가 드가는 발레리나들을 사랑했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드가는 피츠버그 출신 미국 화가 메리 카사트(Mary Stevenson Cassatt, 1844-1926)와 특별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 이들에겐 공통점도 많았다. 카사트도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드가는 "아티스트는 반드시 혼자 살아야 하며, 그의 사생활은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다. 드가는 1883년 마네가 사망한 이후 마네의 작품을 수십점을 구입했으며, 무려 80점 이상을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티스트와 뮤즈 <6> 에두아르 마네와 빅토린, 수잔느, 베르트

*아티스트와 뮤즈 <21> 에드가 드가는 왜 발레리나에 집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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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3.10.27 15:17
    마네와 드가의 우정과 결별이 착찹함을 자아냅니다. 예술의 세계에서 우정은 금과같이 빛나고 변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그런 생각의 여운이 남아돌아서 자꾸 씁쓸해 지네요. 결별 이유가 대단했다고는 하지만 마네의 행동은 분노가 터집니다. 드가가 직접 그려서 (마네가 소파에 기다랗게 기대있고 마네의 부인 스잔느가 피아노 치는 그림) 가지고 온 그림을 드가 앞에서 찢어버리는 행동은 만행에 가깝네요. 드가는 찢어진 그 그림을 갖고 말없이 가는 게 또한 인상이 깊었습니다. 두 화가가 훌륭한 그림을 남겨서 후대에 찬사를 받지만 이면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음이 흥미롭네요.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