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조회 수 3772 댓글 3

빈센트의 제수씨, 테오의 부인 

요한나의 '반 고흐 전설 만들기' 프로젝트

 

00jo-starrynight.jpg

Johanna Gezina van Gogh-Bonger, 1889/ The Starry Night, 1989, Museum of Modern Art, NYC

 

저주받은 천재, 가난뱅이, 알콜 중독자, 우울증 환자, 사회 부적응자...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27세에 전업 화가가 되어 37세에 사망할 때까지 무려 2천여점(회화 900여점+ 드로잉/스케치 1천100여점)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살아 생전 판 그림은 단 1점뿐이었다. '붉은 포도밭(The Red Vineyard, 1888)는 400프랑(현 2천달러 안팎)에 불과했다. 

 

1990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반 고흐의 '가셰 박사 초상화(Portrait of Dr. Gachet, 1890)'은 8천250만 달러에 팔리며, 당시 경매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빈센트가 세상을 떠난지 6개월 후 그의 가장 열정적인 후원자였던 아트 딜러 동생 테오(Theodorus van Gogh, 1857-1891)도 숨을 거두었다. 그러면, 빈센트 반 고흐는 테오 없이 어떻게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됐을까? 

 

빈센트에게는 여동생 안나, 엘리자베스, 빌헬미나, 막내 남동생 코르넬리우스가 있었지만, 미술에는 문외한들이었다. 하지만, 테오 반 고흐의 부인이자 빈센트의 제수씨 요한나 반 고흐- 봉허(Johanna Gezina van Gogh-Bonger, 1862-1925)가 남편을 대신해 작고한 아주버님(시숙, 媤叔)의 작품을 알리는데 헌신하게 된다. 요한나(조, Jo)가 아니었더라면, 빈센트 반 고흐는 서양 미술사에서 잊혀진 존재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영어 교사, 대영박물관서 근무

 

00gogh-brothers.jpg

빈센트 반 고흐, 1873(left)/ 테오 반 고흐, 1878/ 고흐 형제의 무덤

 

1862년 암스테르담에서 8형제중 다섯째로 태어난 요한나는 쾌활하고, 활기찬 딸로 어릴적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아버지는 무역 신문의 편집자였지만, 딸들의 교육에는 등한시했다. 언니들과 달리 요한나는 영어를 공부한 후 런던에 살면서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 도서관에서 몇개월간 일했다. 그러면서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어지게 된다.   

 

1885년 여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던 요한나는 파리 갤러리에서 일하던 오빠 안드리스를 통해 그의 친구 테오 반 고흐을 소개받았다. 테오는 첫눈에 요한나에게 흠뻑 빠졌다. 첫 만남에서 요한나에게 자신의 형이 '고통받은 천재'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두번 데이트에선 청혼했다. 강인하고, 지적인 요한나는 처음엔 집요한 테오를 거부하다가 편지 쓰는 것까지는 허용했다. 테오는 2년간 70여통의 편지로 구애한 끝에 1889년 결혼에 이르렀다.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는 요한나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주었다. 테오는 고갱, 피사로, 툴루즈 로트랙의 작품을 거래했으며, 몽마르트르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테오는 요한나에게 당대 화가들이 사용하는 안료, 색깔, 빛에서부터 그들의 미래까지 생생한 미술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었다. 빈센트는 네덜란드, 영국, 벨기에, 프랑스로 옮겨다니며 살면서 그린 그림들을 보내와 아파트엔 올리브 나무, 밀밭, 농부들, 노란 하늘, 복숭아꽃 등 그림으로 가득찼다. 하지만, 테오는 형의 그림을 파는데는 실패하고 만다. 

 

 

#빈센트와 테오 요절하다

 

0jo-almondblossom.jpg

Jo van Gogh-Bonger and her son, Vincent Willem van Gogh, 1890. Van Gogh Museum/ Vincent van Gogh, Almond Blossoms, 1890

 

빈센트는 요한나가 등장할 무렵부터 정신상태가 악화되어갔다. 테오는 늘 형 빈센트를 우러러봤지만, 형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고, 초조해했다. 빈센트는 추운 겨울 밖에서 자는가하면, 지나친 술과 커피와 담배로 감각이 마비될 정도였다. 또한, 임질에 씻지 않고, 치아는 썩어가고 있었다. 

 

테오는 아를르에 살던 빈센트에게 월 200프랑씩 생활비로 보내주었다. 빈센트는 자신의 그림이 인정받고, 팔릴 수 있을지 늘 불안해했다. 1888년 크리스마스 즈음, 테오와 요한나가 약혼을 발표할 무렵, 빈센트는 아를르에서 폴 고갱과 말싸움 끝에 귀를 자르는 사건을 저질렀다. 

 

1890년 1월 31일 아들이 태어나자 테오는 형의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했고, 요한나도 동의했다. 큰아버지 빈센트는 조카 빈센트의 탄생을 기념해 '아몬드 꽃'을 그려 선물로 주었다. 사실 빈센트는 조카가 생기면서 테오가 더 이상 자신을 지원할 수 없을까봐 전전긍긍했다. 

 

그해 봄 빈센트가 테오 부부를 방문했다. 요한나는 정신이 미약한 환자 빈센트를 상상하고 있었다. 대신 요한나는 빈센트가 자신의 아파트 벽을 메운 캔버스, 그 생생한 영혼의 소유자임을 발견하게 된다.

 

 

0jo.jpg

두번째 남편 요한 코렌 고스랄크(Johan Cohen Gosschalk)가 그린 요한나 반 고흐-봉거의 초상/ 봉허의 일기장 Van Gogh Museum, Amsterdam

 

"내 앞에 선 그는 건장하고, 넓은 어깨에 건강한 피부색, 쾌활한 눈빛, 단호한 용모였다. 그는 테오보다도 훨씬 강해보였다."

"빈센트는 그날 동네 가게로 자기가 좋아하는 올리브를 사러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끈질기게 올리브 맛을 보라고 권했다. 빈센트는 캔버스 앞에 서서 하나하나 밀도있게 연구했다. 테오는 형을 아기 빈센트가 자고 있는 방으로 데려갔고, 나는 두 형제가 아기를 응시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형제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요한나의 일기 중에서-  

 

1890년 5월 빈센트는 프랑스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나와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오와즈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테오는 형의 건강을 위해 폴 가셰 박사가 가까이서 진찰할 수 있게 주선했다. 그해 7월 빈센트가 들판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 이에 파리의 테오가 달려갔고, 빈센트는 다음날 테오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부터 테오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병원에 입원한지 3개월 후인 1891년 1월 눈을 감았다. 주치의는 사인을 '유전, 만성질환, 과로, 슬픔'이라고 기록했다. 빈센트는 37세, 테오는 33세였다. 

 

 

#29세의 미망인 반 고흐 알리기 주력 

 

00vangogh.jpg

Vincent van Gogh, Self-Portrait with a Bandaged Ear, 1889/ At Eternity's Gate-1890

 

요한나는 결혼 21개월만에 미망인이 됐다. 스물 아홉살의 요한나에게는 갓난 아기, 팔리지 못한채 아파트 벽을 메우고 있던 그림 400여점,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663여통만 남았다.  당시 요한나는 일기에 "할 일이 있다. 빈센트의 작품이 보여지고, 가능한 많은 작품이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썼다. 

 

파리를 떠나기 전 요한나는 빈센트와 친했던 화가 에밀 베르나르(Émile Bernard, 1868-1941)에게 연락해 빈센트의 전시를 파리에서 주선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베르나르는 파리에 그림을 남겨두라고 조언했다. 파리에서 빈센트의 개인전이 열린 적은 없지만, 그룹전에서는 전시됐다. 시간이 지나며 그림을 팔 가능성도 파리가 더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나는 그림과 편지를 정리해서 고향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암스테르담 근교의 예술가촌 부썸(Bussum)에 정착한 요한나는 몇주 동안 상복을 입고 살았다. 새 집의 벽난로 위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배치했고, 침실에는 꽃이 만발한 과수원 그림 3점을 걸었다. 집 전체가 빈센트 그림으로 가득했다. 

 

빈센트와 테오가 주고 받은 편지를 정리하면서 요한나는 한때 목사가 되기 위해 농부들 사이에서 소박한 인간으로 살았던 빈센트의 모습과 농부들의 진솔한 그림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라면서 자신의 오랜 신념이었던 사회정의에 대해 숙고하는 계기가 됐다. 테오와 결혼하기 직전 요한나는 벨기에 탄광촌에서 노동자들의 궁핍한 삶을 목격했다. 이를 계기로 노동자들의 권리와 여성의 참정권에 대해 사명감을 느꼈고, 후엔 '암스테르담 사회민주여성 선전 클럽(Amsterdam Social-Democratic Women’s Propaganda Club)을 공동으로 창립하며 사회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예술가촌 부썸에서 반 고흐 홍보 박차

 

0White House at Night, 1890.jpg

Vincent van Gogh, Two Poplars on a Road Through the Hills, 1889/ White House at Night, 1890

 

요한나는 부썸에서 친구였던 시인이자 미술비평가 얀 베스(1864-1925)를 비롯, 예술가들과 교제하면서 빈센트를 알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일기에 그 과정을 기록했다. 아들 빈센트에게 삼촌과 아빠가 미술을 위해 혼을 바친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남편과 아주버니를 기릴 뿐만 아니라 아들을 키우기 위해 돈도 필요했다. 요한나는 예술가 집안의 인맥, 테오로부터 배운 거래의 기술을 활용해 저주받은 화가 빈센트 반 고흐를 홍보하는데 주력했다. 

 

1892년부터 1900년 사이 요한나는 반 고흐의 작품을 전시에 소개했다. 의도적으로 동시대의 클로드 모네, 로트렉 옆에 무명의 반 고흐를 걸도록 했다. 또한, 반 고흐의 그림을 지속적으로 대여해줌으로써 더 많은 대중이 보고, 예술가 커뮤니티에서 인기를 높일 수 있었다. 

 

요한나는 1892년 일기에 "내가 네덜란드에 온 이후 사람들이 빈센트의 작품에 매우 흥미를 갖기 시작했으며, 거의 모든 신문에서 빈센트에 대해 보도했다"고 썼다. 하지만, 모든 보도가 찬사는 아니었다. 어느 비평가는 반 고흐의 풍경화에 대해 "심도가 없고, 분위기도 없으며, 빛도 없고, 혼합되지 않은 컬러가 나란히 조화를 이루지 않고 있다. 현대적이고, 기괴하며, 유치한 욕망으로 그렸다"라고 혹평했다.   

 

1895년 파리의 인상파 아트딜러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는 전시회에 반 고흐의 그림 20점을 포함했다. 요한나는 거래의 기술도 능숙했다. 반 고흐 전시회에서 일정수의 작품은 '판매용'이 아니라 '대여'로 제한함으로써 콜렉터들을 사고싶게 만든 것이다. 또한, 이웃 프랑스와 독일의 아트딜러들을 통해 세계의 미술관과 개인 컬렉터들에게 작품을 팔았다. 

 

요한나는 아들을 키우며, 반 고흐의 작품을 홍보하면서 네덜란드 화가 아이삭 이스라엘스(Isaac Israëls)와 사귄 후, 1901년 엔 화가 요한 코렌 고스랄크(Johan Cohen Gosschalk)와 재혼했다. 

 

 

#반 고흐 사망 14년 후 대규모 회고전

 

0A poster for Vincent’s exhibition at the Stedelijk Museum in Amsterdam, 1905..jpg

1905년 스테델리크뮤지엄 반 고흐 회고전 포스터와 카탈로그. Van Gogh Museum, Amsterdam

 

1905년엔 스테델리크 뮤지엄(Stedelijk Museum)에서 반 고흐 작품 484점을 소개한 역대 최대 규모의 회고전을 열었다. 유럽 전역에서 비평가들이 찾아왔다. 빈센트와 테오가 세상을 떠난 지 14년 후 요한나 반 고흐 -봉허는 빈센트 반 고흐를 세계적인 거장 대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 전시로 반 고흐의 비극적인 삶과 예술혼이 널리 알려졌고, 작품은 재평가되었으며, 그림 가격은 2-3배 뛰게 된다. 

 

하지만, 몇몇 비평가들은 반 고흐의 정신병원 시절 작품에 대해 태클을 걸었다. "빈센트는 위대한 작품에 내재된 특이한 평온함이 결여되어 있다. 그는 항상 폭풍우가 될 것이다."("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대한 은유) 또, 한 비평가는 이 회고전을 "스캔달"이라 부르면서 특히 '별이 빛나는 밤'을 공격했다. 그림 속의 별들이 마치 네덜란드 사람들이 뉴이어스이브에 먹는 공 모양의 도넛튀김 올리볼렌(oliebollen)같다고 비아냥거렸다. 

 

이런 악평들은 오히려 작품은 물론 반 고흐의 정신세계와 삶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게 된다. 결국 '별이 빛나는 밤'은 1941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소장품으로 들어오고, MoMA의 센터피스가 됐다. 

 

요한나는 1914년엔 네덜란드 유트레히트에 묻혔던 테오를 프랑스 오베르 쉬르 와즈의 빈센트 묘지 옆으로 옮겨 형제애와 미술혼을 널리 알렸다. 또한, 딜러들에게 판매 커미션으로 10-15%를 제공하면서 반 고흐를 세계의 미술관의 소장품으로 판매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1924년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가 '해바라기'를 구입해간 것을 비롯 총 190여점의 회화와 드로잉 55점을 팔았다.

 

또한, 반 고흐의 그림을 이해하는데 돕기위해 1915년 빈센트와 테오가 주고 받은 편지(프랑스어로 썼다)들을 정리해 네덜란드어와 독일어 번역판 '형에게 보내는 편지'를 출간했다.

 

 

#뉴욕의 요한나 반 고흐 봉허

 

0met-gogh.jpg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의 반 고흐 갤러리

 

유럽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한 요한나는 1916년 뉴욕으로 왔다. 그녀 나이 54세, 빈센트 반 고흐를 미국에도 알리겠다는 사명감에서였다. 요한나는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와 퀸즈에 3년간 살면서 반 고흐의 비전을 알리며 짜투리 시간엔 빈센트의 편지를 번역했다.     

 

뉴욕이 요한나와 반 고흐에게 만만치는 않았다. 어느덧 요한나은 5애브뉴의 몬트로스 갤러리(Montross Gallery)에서 반 고흐전을 열었으며, 이어 메트로폴리탄뮤지엄에서 열린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Impressionist and Post-Impressionist Paintings)' 전시에 반 고흐 그림 4점이 소개되기에 이른다. 

 

반 고흐의 작품에 대한 뉴요커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컬럼비아대의 한 교수는 강연회에서 "미국인들의 입맛에는 어리석고, 만화같다", 이 강연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원시적인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는 과장된 컬러"라고 해설했다.  

 

요한나는 마지막으로 형제의 편지를 영문판으로 출간할 필요성을 느꼈다. 편지 속의 빈센트는 로맨틱하면서도 비극적인 인물로 그의 영혼이 미국인들과 그 이상의 마음을 열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의 건강은 급속도록 쇠약해졌고,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출판사 알프레드 크노프는 편지들의 요약본을 출간하기를 원했지만, 요한나는 전문 출판을 밀고 나갔다.

 

뉴욕에서 3년을 보낸 요한나는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다. 파리, 프랑크푸르트, 런던,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 등지의 미술관에서 반 고흐의 작품을 요청해오기 시작했다. 세계의 메이저 뮤지엄으로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이 속속 들어가게 된 것이다.  

 

 

#전설이 된 화가 빈센트

 

001.jpg

Vincent van Gogh, Self-Portrait in Front of the Easel, 1888/ The Starry Night, 1989, Museum of Modern Art, NYC

 

1925년 요한나는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2년 후 뉴욕에 이어 런던에서도 영어 버전의 편지 컬렉션이 출간됐다. 1934년 두 형제의 편지를 바탕으로 어빙 스톤이 소설 'Lust for Life'를 냈고, 1956년엔 할리우드에서 커크 더글라스 주연의 영화로 제작됐다. 빈센트 반 고흐의 신화가 된 것이다. 

 

아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90–1978)가 엄마의 일을 이어받았다. 빈센트는 1930년 엄마로부터 상속받은 삼촌의 작품을 스테델레이크 미술관에 기부했다. 반 고흐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네덜란드 정부는 1973년 암스테르담에 반고흐 뮤지엄(Van Gogh Museum)을 개관하게 된다. 이때 88세의 조카 빈센트가 오프닝에 참석했다. 2019년 반고흐뮤지엄의 방문객은 210만명에 달했다.    

 

요한나 반 고흐-봉허가 아니었더라면, 빈센트 반 고흐는 세계 미술사에서 묻혀졌을 것이다. 요한나는 빈센트 반 고흐 대신 노동자 계급의 삶과 교육 개선을 향상하기 위한 사회운동에 헌신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모든 일들은 내게 무척 만족스러웠다. 나의 남편과 빈센트를 기억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한나의 일기 중-

 

 

*빈센트 반 고흐와 세자매: 안나, 엘리자베스, 빌레미나

*메트뮤지엄에 모인 빈센트 반 고흐 유화 17점

*빈센트 반 고흐의 드로잉전@모건라이브러리

*빈센트 반 고흐: 아이리스와 장미@메트뮤지엄, 2015

*뉴욕영화제 2018 화가 줄리안 슈나벨의 '영원의 문에서(At Eternity's Gate' ★★★☆

*위대한 음식 열정 <9> 빈센트 반 고흐: 감자와 커피

 

 

?
  • sukie 2021.05.03 17:56

    반 고흐의 일대기를 잘읽었습니다. 그에 대해 연대별로 자세하게 써주셔서 영화의 한장면, 한장면이 지나가는 것같은 생동감을 느꼈습니다. 27세에 전업화가가 돼서 37세에 요절하기까지 10년간 전광석같은 삶을 살고, 보여줬습니다. 반 고흐 앞에는 반드시 천재라는 수삭어를 붙여야되지 않을까요? '천재화가 반 고흐'라고요.
    이 천재화가가 하마터면 사장될 뻔 했을 때 동생 테오의 부인인 요한나가 나타났음은 영화의 장면이 확 반전되는 느낌입니다. 고흐가 빛을 보기 시작했고, 오늘날의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올려지기까지는 고흐의 제수씨인 요한나 봉허 여사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임을 알았습니다. 컬빗을 통해서 반 고흐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고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추신: 동생 테오가 처음에 묻힌 네델란드 Utrecht에 딸이 살고 있습니다. 운하와 숲이 많아서 자연을 즐기기에 좋은 곳이지요
    -Elaine-

  • 2021.12.09 22:47

    안녕하세요. 저 반고흐팬입니다. 요즘 반고흐에 대해 잘 배우고 있는데 이렇게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 sukie 2021.12.10 11:32
    안녕하세요, 방문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