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술 이야기 (3) 투명한 잔에 일렁이는 공허한 욕망: '가능한 사랑'과 이탈리아 와인 가야(GAJA)
[스크린에 채운 한 잔의 미장센] 영화와 술 이야기 <3>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과 이탈리안 와인 가야(GA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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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술은 때때로 인물의 심리와 복선, 그리고 감독의 미장센(mise-en-scène, 무대/장면의 배치)를 전달하는 시각적 장치다.
술은 캐릭터의 페르소나와 정체성을 구축하며, 때론 인물의 가면을 벗기는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느와르에선 술이 의리와 배신을, 로맨스 영화에선 설렘을 극대화할 수 있다.
'영화와 술' 이야기 연재 순서
1. 교양 있는 스파이와 괴물, 그리고 허영의 초상: '007 시리즈' '양들의 침묵' '사이드웨이'
2. 술과 계급의식: 반지하와 형사의 위스키가 향하는 곳: '기생충'과 '헤어질 결심'
3. 투명한 잔에 일렁이는 공허한 욕망: '가능한 사랑'과 이탈리아 와인 가야(GAJA)
4. 여배우의 방어기제, 소주 대신 맥주를 권할 때: '그녀가 돌아온 날'의 독일 맥주

2026 뉴욕영화제(NYFF 64, 9/25-10/12)엔 세편의 한국영화가 초청됐다.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Possible Love)'과 홍상수 감독의 34번째 장편 '그녀가 돌아온 날(The Day She Returns)'과 로카르노영화제 감독상과 연기상(김민희)을 수상한 35번째 장편 '눈 둘 데가 없네(Nowhere To Lay My Eyes)'가 상영됐다.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인 '가능한 사랑'에선 가난한 커플이 부자네 별장에서 바비큐에 이탈리아 와인을 들고 건배를 한다. 올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영됐던 '그녀가 돌아온 날'의 배경은 서울 근교의 독일식당이며, 여배우와 기자는 커피와 맥주를 마신다. 두 영화 속에서 술잔이 마음에 남았다. 단순히 목을 축이거나 식사에 곁들이는 음료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듯 했다.
3. 투명한 잔에 일렁이는 공허한 욕망
'가능한 사랑'과 이탈리아 와인 가야(GAJA)

'가능한 사랑'에서 설경구와 전도연 부부는 조인성과 조여정 부부의 서해안 별장에서 이탈리안 화이트 가야(GAJA) 와인을 마신다.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 (Thou shalt not covet)."라는 십계명 중 마지막 계명으로 시작하는 '가능한 사랑'은 해고 노동자 가족(설경구-전도연 분)과 그들의 삶을 찍으려는 부유한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조여정-조인성)의 이야기를 담았다.
철강회사의 해고 노동자 호석(설경구 분)와 마스크 공장 직원인 미옥(전도연 분) 부부는 서울 근교의 마당 있는 단독 주택에 아들 철이와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의 집 마당엔 대리석으로 만든 매끈한 돌 탁자가 있는데, 호석이 동생처럼 생각하는 직장 후배들과 함께 고기 구워 먹으려고 만든 상이다. 뜨거운 불꽃을 다루었던 용접공 호석은 해고된 후 좀비처럼 살아가고 있고, 그 대리석 탁자는 차갑게 비어있다.
호석과 미옥 부부에게 부유한 예지(조여정 분)가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제안하고, 호석 부부를 자기네 서해안 별장으로 초대한다. 미옥은 스티브 잡스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상우(조인성 분)의 별장을 두고 "읽어본 적 없는 소설 속 장소같다"며 감탄한다. 이들은 그날 저녁 패티오에서 와인을 곁들인 바비큐 저녁 식사를 한다. 바비큐 연기가 오르고, 흰 테이블보가 깔린 식탁엔 가득 음식이 차려져 있다. 미옥이 빨래나 널어놓는 상이 된 호석네 대리석 탁자와 대조적이다. 여기서 두 커플은 풍선처럼 크고 동그란 바롤로 잔에 화이트를 따라 마신다.
이때 카메라는 와인병을 가까이서 보여준다.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트 지방의 바바레스코(Barbaresco) 명가 가야(GAJA)의 와인이다. 1859년 스페인에서 이탈리아로 이민한 지오바니 가야(Giovani Gaja)씨가 창립한 와이너리로 '가야'로 발음한다. 필자는 2013년 업스테이트 뉴욕에서 가야 와이너리의 따님 가이야 가야(Gaia Gaja)씨가 참석한 5코스 와인 런치에 간 적이 있다.

2013년 '바바레스코 명가' 가야(GAJA) 와인 가문의 가이야 가야(Gaia Gaja)씨가 참석한 5코스 가야 와인 런치를 즐겼다. 그날 메뉴와 가이야 가야씨.
그래서 GAJA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 와인은 바비큐에 어울리는 네비올로 와인 100%로 빚은 바바레스코가 아니었다. 어깨가 완만하게 내려오는 병은 가야 가문의 100% 샤도네이로 양조한 시그내쳐 화이트 '가야 앤 레이(Gaia & Rey)'로 보였다. 상우 역시 와인의 맛보다 '가야'라는 최고급 브랜드 라벨이 주는 권위를 소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화이트 와인은 볼이 넓은 레드 와인용 '바롤로(Barolo)/ 부르고뉴(Bourgogne)'잔에 담겼다. 어색하고, 불편한 두 커플은 투명한 화이트 와인을 아슬아슬하고도 위태롭게 출렁이며 마신다.
왜 상우는 거대한 바롤로 잔에 샤도네이를 부었을까? 고기 파티엔 레드 와인이라는 통속성을 거부하고, 프라이빗 비치가 있는 별장에 맞추어 쿨하게 최고급 화이트로 과시한 것일까? 그 한없이 투명한 잔에 출렁이는 투명한 화이트는 어쩐지 공허하다.
GAJA를 한인 관객들이 '가자'로 발음하면 영화에 또 다른 의미를 주는 소품이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계급 차이가 있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가능한 사랑'을 한다면 그것은 이상형의 유토피아로 '가자'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다. 아이러니하게도 GAJA의 실제 현지 발음은 우리 역사 속 '가야' 왕국과 같다.

설경구-전도연 부부의 단독주택에 놓여있는 대리석 탁자. 별장에서 돌아온 부부는 보름달빛 아래 소주를 마신다.
상우의 별장은 4인의 욕망이 분출하는 공간이다. 해고, 경찰의 폭력, 동료의 배신으로 트라우마와 울분을 품고 살던 호석은 예지의 카메라 앞에서 속내를 터트린다. 미옥은 상우가 누리고 있는 여유로운 삶과 바닷가의 자유(나체)를 갈구한다. 예지는 호석과 미옥의 빈궁한 이야기를 탐하며, 상우는 가질 수 없는 미옥의 육체를 갈망한다.
결국 가진 자와 없는 자, 두 커플의 위화감과 욕망이 폭발하고 피폐해진 호석과 미옥은 집으로 돌아간다. 이들의 초라한 마당에 버티고 있는 차가운 대리석 술상 앞에 호석과 미옥은 마주 앉아 휘영청 보름달빛 아래서 소주를 마신다. 그리고, 이창동 감독은 사랑이 가능한 지를 관객에게 묻는다.
PS1: 1993년 경 박광수 감독이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연출할 즈음 그 제작진과 우연히 충무로의 한 식당에서 저녁식사 하는 자리에 나도 끼게 되었다. 아마도 KBS-2FM '영화음악실' 대본을 쓰던 즈음이었던 것 같다. 마침 앞 자리에 당시 조감독이었던 이창동 감독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국어교사와 소설가 출신으로 '그섬...'의 시나리오 작가라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과묵하셨던 그분과는 별로 대화를 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분의 소설 '녹천엔 똥이 많다'는 당시 홍상수 감독이 미국 유학 후 귀국해 어머니(전옥숙 여사)가 세운 외주 제작사 시네텔 서울에서 연출한 SBS-TV 문학 프로그램 '작가와 화제작'에서 다루어져 알게된 작품이었다. 미래의 거장 감독들이 데뷔하기 전이었다.
*바바레스코 명가 가야(GAJA) 와인 5코스 런치,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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