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783)
- 강익중/詩 아닌 詩(99)
- 김미경/서촌 오후 4시(13)
- 김원숙/이야기하는 붓(5)
- 김호봉/Memory(10)
- 김희자/바람의 메시지(30)
- 남광우/일할 수 있는 행복(3)
- 마종일/대나무 숲(6)
- 박준/사람과 사막(9)
- 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49)
- 연사숙/동촌의 꿈(6)
- 이수임/창가의 선인장(165)
- 이영주/뉴욕 촌뜨기의 일기(65)
- June Korea/잊혀져 갈 것들을 기억하는 방법(12)
- 한혜진/에피소드&오브제(23)
- 필 황/택시 블루스(12)
- 허병렬/은총의 교실(113)
- 홍영혜/빨간 등대(81)
- 박숙희/수다만리(66)
- 사랑방(16)
(770) 이수임: 백년가약(百年佳約) 대신 십년가약(十年佳約)
창가의 선인장 (161) 졸혼 시대
백년가약(百年佳約) 대신 십년가약(十年佳約)

sooim lee, couple-6 1996, sumi ink on paper, 8.5 x 5.5 in
“우리 와인도 한 잔씩 하자.”
맨해튼 허드슨 야드(Hudson Yards) 쇼핑몰에서 친구와 만났다. 우리는 쇼핑을 마치고 식당에 들어갔다.
“대낮부터 술? 까짓 것 좋아. 밥 먹고 집에 갈 일만 남았는데.” 친구가 흔쾌히 동의했다.
아기 머리통만 한 와인잔 밑에 깔린 검붉은 와인을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한 모금 들이켠 친구가 말했다.
“정말 너무 한 것 아니야. 한 사람하고만 평생 산다는 것이. 10년마다 갱신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니까.”
나도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내 말이 남편이 아무리 좋아도 지루해. 동굴에 갇힌 느낌이야.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
친구가 턱을 괴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말했다.
“얼마 전, 남편에게 '나와 사는 것이 지루하지 않아?'하고 물었더니 '지루하지 않다'는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히더라고. 그 느낌 알아?”
나도 칼칼한 목에 검붉은 와인을 들이붓고 응했다.
“알고 말고 나도 마찬가지야. 꼭 남편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변화가 필요해. 며칠 전, 큰 맘 먹고 남편에게 ‘나와 헤어지면 나보다 더 젊은 여자와 살 수 있어 좋을 텐데?’ 말하니까. 서류 정리하는 것도 귀찮고. 새 여자를 어떻게 믿고 돈 벌어다 줄 수 있냐며 그나마 모은 재산 사기당할 것이 두려워서 싫대. 다들 결혼하면 그냥 그렇게 사는 거래.
친구가 반색하며 말하기를,
“그러니까 내 말이 법으로 10년마다 결혼 갱신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기회를 줘야 한다니까. 안 그래? 그러면 따지고 싸울 필요 없이 헤어진 남편과도 친구 관계로 마음 편히 자유롭게 살 것 아니야. 법이 문제야. 법이 사람을 꼼짝달싹 못 하게 프레임 안에 가둬 놓는다니까. 아! 한국엔 졸혼이 있다는데. 굳이 이혼하지 않고 함께 살면서 서로의 생활을 참견하지 않고 재산도 나누지 않는. 너무 좋은 아이디어지?.”
내가 마지막 남은 붉은 와인을 입에 털어 넣고 시계를 들여다봤다.
“저녁 지을 시간이다. 집에 가서 밥이나 하자. 이 인간 더러운 성질 내기 전에. 한국 남자들은 왜 배만 고프면 짜증 내는지? 야만인도 요즘처럼 먹을 게 지천인 세상에서는 안 그런다는데.”
친구도 화들짝 놀라며,
“어머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니? 저녁밥 할 시간이 충분치 않아. H-마트에 들려서 밑반찬 사 가자.”
친구와 나는 32가 K-타운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그리고 각자 남편이 좋아하는 찬거리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결혼 25년을 넘기면 성공한 삶'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그 울타리를 향해 터벅터벅 김빠진 발걸음을 옮겼다.
이수임/화가
https://sooimlee3.blogspot.com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