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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7) 홍영혜: 물과 같은 삶, 아버지를 생각하며
빨간 등대 (75) 상선약수(上善若水)
물과 같은 삶, 아버지를 생각하며

Sue Cho, “Where Grace Flows”, 2026, Feb., Digital Painting
1월 크리스티(Christie’s)에서 지미 카터(Jimmy Carter, 1924-2024) 전 미국 대통령의 그림과 그가 직접 만든 가구들을 전시, 경매한다는 소식을 듣고, 록펠러 센터 근처 전시장을 찾았다. 카터 대통령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가 늘 존경하시던 분이었고, 아버지보다 한 해 늦은 1924년생이기도 하다.

크리스티 뉴욕 갤러리
카터 대통령이 그린 그림들 가운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작은 폭포를 그린 작품이다. 대통령이 퇴임 직후 조지아주 북쪽 개울가에 통나무집을 마련하고, 그 근처에서 이젤을 세워놓고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그림 속 아기자기한 꽃을 보고 자연의 경관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니, 오른쪽에 놓인 빨간 통 하나에 눈길이 멈췄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그림을 그리는 도구를 담은 통일까, 아니면 송어를 잡았다가 다시 놓아주기 위한 통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 빨간 통이 이 세상에서 카터 대통령이 남긴 아름다운 유산을 상징하는 흔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Jimmy Carter, Mountain Waterfall, 2003, 30x24 inches, Oil on canvas
이 그림에 오래 눈길이 간 것은 아버지가 가훈처럼 적어 주셨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로 "가장 훌륭한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일흔 살에 퇴임하시며 『낙엽』이라는 수상집을 내셨는데, 그중 「물」이라는 글의 끝부분에 이렇게 쓰셨다.
"단순한 삶, 어디든지 상대방의 필요에 순응하며 스며드는 삶, 낮은 곳을 향해 흘러내려가는 삶, 이것이 물이 우리에게 주는 살아 있는 교훈이다."
(『낙엽』, pp.83–85)

「물」에 삽입된 그림 '흘러내려가는 물'.
아버지의 손 글씨는 늘 정갈하고 단아했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께 붓글씨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은퇴하신 뒤에는 시간이 있을 때 혼자 붓글씨를 쓰시곤 하셨다. 그중 마음에 드는 글은 따로 간직해 두셨다가 내가 한국에 갈 때면 건네주셨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진인사대천명(盡人事 待天命)’, ‘낙엽귀근(落葉歸根)’ 같은 글들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흔이 넘으셔서는 선생님을 모시고 붓글씨를 배우기 시작하셨다. 그때 쓰신 글을 표구해서 선물로 주신 ‘흘러내려가는 물’ 그림과 함께 내 방에 걸어 두었다.

2009년 졸업할 때 보내주신 글에서도 ‘물과 같은 삶‘에 대한 아버지의 메시지가 전해진다.
영혜야!, 졸업을 축하한다. 나이들어서 힘들게 한 공부이지만 앞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마음으로 배운 것을 보람있게 사용하여라. 사람이 자기의 인생을 끝마칠 때 남는 것은 어려운 사람에게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가 하는 것 뿐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결국 그것이다. 실물 꽃다발을 보내지 못하고 e-mail로 첨부해서 보낸다.

아버지께서는 1988년 가을, 내가 살던 뉴욕에 잠깐 들르셨다가 일로 캐나다 캘거리(Calgary)에 가신 적이 있다. 그 여정 중 밴프 국립공원(Banff National Park)에도 들르셨는데, 여태까지 다녀오신 곳들 가운데 그곳이 가장 좋았다며 엽서를 보내주셨다.
그 뒤로 "나도 언젠가는 밴프에 가야지" 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고, 작년 9월 마침내 그곳을 찾게 되었다. 산불의 영향으로 공기가 다소 뿌옇게 흐려 최적의 상태는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곳이다. 아버지는 아마 그곳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떠올리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는 이제 102세가 되셨다. 지난 10월, 새벽에 집을 나서며 잠들어 계신 아버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왔다. 전날 밤에 아버지와 함께 짧은 예배를 드렸다. 「주 날개 밑」 찬송을 부르고, 빌립보서 4장 11절에서 13절을 읽은 뒤 기도하고 마치는 간단한 예배였다. 이것은 부모님과 헤어지기 전날 하는 루틴이다.
서울을 떠날 때마다 다시 뵐 수 있을지, 혹은 그날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떠나온다.
홍영혜/가족 상담가
수 조(Sue Cho)/화가
미시간주립대학에서 서양화와 판화를 전공하고, 브루클린칼리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뉴욕주 해리슨공립도서관, 코네티컷주 다리엔의 아트리아 갤러리 등지에서 개인전, 뉴욕한국문화원 그룹전(1986, 2009), 리버사이드갤러리(NJ), Kacal 그룹전에 참가했다. 2020년 6월엔 첼시 K&P Gallery에서 열린 온라인 그룹전 'Blooming'에 작품을 전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