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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gitte Bardot, 1934-2025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로 스타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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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ntempt/Le Mépris, 1963, directed by Jean-Luc Godard

 

미국의 MM-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1962), 이탈리아의 CC-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Claudia Cardinale, 1938-2025. 9)와 함께 BB로 불리웠던 프랑스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Brigitte Bardot, 1934-2025)가 12월 28일 파리 남부 생트로페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섹스 심볼에서 극우 사회운동가, 그리고 동물애호가로 한국의 보신탕 문화를 비판했던 브리지트 바르도는 종종 논란의 도마에 오른 스타이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사망 기사에서 바르도가 모두에게 환영받는 인물은 아니었다며, 때론 존경 받고, 때론 비난받았으며, 종종 동시에 두가지 평가를 받은 인물이었다고 전했다. 연기력은 부족하며, 까다롭고 솔직한 인간 혐오자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동시에 현대성과 해방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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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ntempt/Le Mépris, 1963, directed by Jean-Luc Godard

   

본명은 브리지트 안-마리 바르도(Brigitte Anne-marie Bardot). 1934년 파리 15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엔지니어, 엄마는 보험회사 이사의 딸로, 7베드룸 아파트에서 자랐다. 집안의 보수적인 카톨릭 환경 때문에 바르도는 반항적인 아이로 컸다. 특히 어느날 여동생과 놀다가 꽃병을 깨자 아버지가 스무번이나 채찍질을 해 바르도에겐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제 2차 세계대전 발발로 파리가 나치 독일에 점령됐을 때 바르도는 집에 갇혀 레코드를 틀며 춤추기를 즐겼다. 이에 엄마는 딸을 발레리나로 키우려 했고, 바르도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해 러시아 안무가 보리스 크나제프의 발레 교육을 받았다.

 

1949년 파리 패션지 '엘르'의 디렉터에 의해 발굴되어 주니어 패션 모델로 활동을 시작, 이듬해 3월엔 15세에 '엘르(Elle)'의 표지로 등장했다. 이어 마크 알레그로 감독의 캐스팅 콜을 받아 오디션에 갔다가 로저 바딤(Roger Vadim) 감독을 만난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부모는 이들의 관계를 격렬하게 반대했고, 그녀를 영국으로 유학보내려고 다음날 기차표를 사왔다. 그러자 바르도는 오븐에 머리를 지지려 했고, 부모가 항복해 18세의 바르도는 바딤과 결혼에 이른다.

 

 

 

바딤 감독은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And God Created Woman/ Et Dieu... créa la femme, 1956)'로 바르도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바르도는 생트로페 출신의 관능적인 고아 소녀로 분해 누드 일광욕과 맨발로 돌아다니는 쾌락주의자 줄리엣으로 분해 섹스 심볼로 부상했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1958년 '여왕 바르도(Queen Bardot)'라는 제목의 글을 썼고, 이듬해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에스콰이어에 '브리짓 바르도와 롤리타 신드롬'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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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asso and Brigitte Bardot in Vallauris, 1956

 

바르도는 원래 갈색 머리였다. 그녀가 금발로 변신한 것은 피카소의 모델이었던 실베트 다비드(Lydia Sylvette David/ Lydia Corbett), 바르도와 동갑이었다. 금발의 실베트는 1954년 프랑스 남부 발로리스에서 피카소를 만나 3개월간 그의 모델이 되었다. 그중 하나가 '포니테일의 소녀'다. 포니테일 차림의 실베트 사진은 '파리 마치(Paris Match)'에 등장했고, 그녀는 코미디 감독 자크 타티로부터 캐스팅콜도 받았다.

 

1954년 어느날 피카소와 실베트가 칸느 거리를 걷던 중 바르도-바딤 부부와 마주쳤다. 이후 바르도는 실베트 스타일로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포니테일로 묶었다. 바르도는 1956년 피카소의 작업실을 방문했지만, 피카소는 한번도 바르도를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실베트 그림을 바르도라고 생각했다. 바딤은 금발 포니테일을 좋아해 부인이 된 제인 폰다, 연인이 된 카트린느 드뇌브도 이 헤어스타일을 즐겼다.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영화 찬가 '경멸(The Contempt/Le Mépris, 1963)'은 2023년 맨해튼 필름 포럼에서 60주년 기념으로 리바이벌 상영됐다.

 

1960년대는 바르도의 시대였다. 1962년에 갱스부르와 협업한 첫 싱글 '시도니(Sidonie)'로 가수 데뷔하면서 루이 말 감독의 '매우 사적인 일(A Very Private Affair)'에 삽입됐다. 갱스부르는 1967년 관능적인 듀엣곡 "Je T'Aime... Moi Non Plus"를 녹음했지만, 바르도가 발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2년 후 갱스부르는 새 연인 제인 버킨과 함께 다시 녹음하여 히트곡이 되었다. 바르도 버전은 1986년에야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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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gitte Bardot and the Lolita Syndrome, Esquire(August 1, 1959) by Simone de Beauvoir, BERNARD FRETCHMAN, photo by Richard Avedon

 

브리지트 바르도는 1973년 39세에 영구 은퇴를 발표했다. 이후엔 정치적인 발언으로 주목을 끌었다. 바르도는 타락한 프랑스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파 정치 세력, 심지어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과 그 후신인 국민연합뿐이라고 믿었다. 올 초엔 성폭행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제라르 드파르듀와 니콜라 베도스를 지지하기도 했다. 

 

바르도는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의 로저 바딤 감독과 첫 결혼을 했지만, 바딤이 제인 폰다와 바람나 이혼했다. 바딤은 이후에도 배우들과 4번 결혼, 카트린느 드뇌브와도 동거한 영화계의 바람둥이였다. 

 

하지만, 브리지트 바르도의 남성편력도 바딤과 어깨를 견주었다. 바르도는 작곡가 세즈류 갱스부르(제인 버킨 남편)과도 염문을 뿌렸다. 바르도는 "나는 항상 열정을 찾아왔다. 그래서 난 종종 불륜을 저질렀다. 그리고, 열정이 식으면 짐을 싸서 떠났다"고 밝혔다. 바르도는 1992년 극우 정치인 장마리 르팽(Jean-Marie Le Pen)의 고문 베르나르 도르말(Bernard d'Ormale)과 네 번째 결혼 후 반이민, 외국인 혐오 등 극우주의자로 각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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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휴양지 부지오스의 바르도 동상.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1956) 포스터. Photo: Expedia

 

1960년대 브라질 애인과 머물렀던 리우데자네이루 근교의 어촌 마을 부지오스(Búzios)는 세계적인 휴양지가 되었다. 2010년 여행 중 가본 부지오스엔 그녀의 동상과 '바르도 산책로(Orla Brigitte Bardot)'도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드가 모랭(Edgar Morin)은 그의 저서 '별들(The Stars, 1972)'에서 바르도가 "극도의 순수함과 극도의 에로티시즘이라는 놀라운 자질"이라는 역설적인 면모가 그녀를 매력적으로 만들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이탈리아 영화의 '드림 걸'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Claudia Cardinale, 87) 별세

https://www.nyculturebeat.com/index.php?mid=Film2&document_srl=4164085

 

*마릴린 먼로(1926-1962): photo album & words

https://www.nyculturebeat.com/index.php?mid=Film2&document_srl=309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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