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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혜진: 뉴욕, Never Ending Story
에피소드 & 오브제 (1) 뉴욕, Never Ending Story
'글'이 '길'이 될 수 있음을 알았던 건 큰 행운
한 해가 가고, 새 해가 오면 우리는 나이 한 살씩을 더 먹게 된다. 그런데, 젊어서는 그 한 살의 무게에 별 차이가
없다. 단지 숫자 하나가 더 늘어난다는 것밖에는.. 그러나, 어떤 나이를 넘어 설 때, 그 무게는 몇 곱절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무거울 중, 중년의 나이라고 말 할 수 밖에.. 나에게는 그 증세가 약속을 잘 하지 못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점점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은 한탄스럽고, 서글프고, 불편하다. "나이가 드니까 말이지" 하면서 변명조로 둘러대며
어물쩍 넘어 가려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눈 폭풍 속에 2월을 보내던 어느 날, 컬빗님께서 "뉴욕 스토리가
나갑니다. 함께 하시죠."라며 권유할 때, 나는 "No"는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Yes는 더더욱 하지 못 한 채 몇 일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또 그 나눔의 장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지만 요즈음의 나란 사람에
대한 미심쩍음이 대답을 한참 보류하게 만들고 있던 터였다.
어린 시절, 시험 공부는 제쳐두고 딴청을 피우듯이, 일요일 아침부터 나는 책상은 고사하고 부엌과 식탁 주변을 맴돌고
있던 차에 누가 먹지 않고 남겨 두었는지, 포춘 쿠키 두 개가 눈에 띄었다. 이야기가 시작 되는 곳은 언제나 따로 있는 법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내가 원한 건 과자가 아니었다. 그 속엔 항상 무슨 글귀가 들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부서진 과자 속에서 나온 두 개의 문장, 마치 우황청심환처럼 나의 흐리멍텅한 정신을 깨웠다.
"Awaken your divine nature within."
"Take advantage of the dynamic energy to better your relationship."
난 다시 뛰는 내 가슴을 느꼈다. 사람을 깨우는 건 알람시계만이 아니다.
시계는 억지로 하게 만드는 반면, 좋은 글은 스스로를 깨운다. 내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 나온 말은 "Yes"였다. 난 아마도 약속을 지킬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글은 나에게 또 다시 새로운 인연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했다. 난 그렇게 쉽게 확신이 생겼다. 왜냐하면 과거에도 글은 늘 나에게 그렇게 했으므로... 10년 전 시인이신 김정기 선생님과의 인연이 새삼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 보내주신 시집에 대한 감사카드 한 장이 나를 글로써 길에 나서게 할 줄이야. 글이 길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은 내겐 큰 행운이었다.
이 세상에서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도시 1위에 꼽힌다는 도시 뉴욕, 난 뉴욕에 산다. 이제 더 이상 여행자는 아니다.
어제도 살고 오늘도 살고 있는 원주민은 아니지만, 오늘 짐을 풀고 내일도 살기를 꿈꾸는 이주민이다. 그러려면, 더욱이 길을 내야
하는 입장이다. 이주민들에겐 그들만의 길이 필요하다. 내가 길을 내는 데에는 이 곳에 짐을 풀고 살았던 30년 가까운 숙성된
시간들이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그래... 길도 새로 낼 판인데 글부터 다시 써 봐야지. 나를 응원하듯, 내 몸의 잔 근육들마저 분기탱천하는 느낌이 드는 걸 어쩌랴.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 떠오르는 노래 가사까지도 뉴욕과 어울리는 서사가 되어주는 기분좋은 아침이다. 컴퓨터를 켜면서 컬빗님께 텍스트를 날린다. 여유를 부리며. "언제까지 글 보내면 되죠?"
뉴욕은 늘 새로운 서사가 시작되는 곳이다. 누구에게나. 마음만 먹으면. 뉴욕은 이렇게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아름답고 줄기차다.
한혜진/수필집 '길을 묻지 않는 낙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