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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희/수다만리
2014.07.14 02:11
(29) 박숙희: 나의 룸메이트 베아트리체, 1996
조회 수 2952 댓글 0
수다만리 (3)
천국보다 낯선 도시 뉴욕
나의 룸메이트 베아트리체, 1996
온세계가 월드컵에 열광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국가주의가 아닐까? 월드컵이 '무기 없는 전쟁'이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미국이 아무리 초강국이라 해도 월드컵 축구에선 열등하다. 브라질이 아무리 못사는 나라지만, 축구 자존심은 지존이다. 경제력, 이념과 무관하게 공 하나로 국위를 선양할 수 있는 월드컵, 2014 FIFA 월드컵은 독일의 승리로 끝났다.
나는 지금 시계를 돌려 1996년 초 뉴욕에 와서 영어 때문에, 문화적 차이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며 허둥대던 시절을 떠올리고 있다.
그 해 겨울 나는 어학원에 적을 두고 영화를 실컷 보기 위해 충무로를 떠나 맨해튼이라는 ‘익명의 섬’에 날개를 내렸다. 대학 졸업 후 역마살 낀 직업을 전전하다가 스스로에게 준 안식년인 셈이었다. JFK 공항에 도착하기 전, 뉴욕은 내게 우디 알렌의 영화 속의 '판타지 도시'였다. 나는 그 도시 속으로 다이빙하고 싶었다, 수영도 못하는 주제에.
우디 알렌 감독의 영화 '카이로의 자주빛 장미(The Purple Rose of Cairo, 1985)''에서 공황기의 웨이트레스 미아 패로는 영화관으로 도피하고 극장 스크린을 찢고 나온 배우 제프 다니엘스와 도피해 사랑을 나눈다. 나는 뉴욕이라는 영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뉴욕은 내게 영화를 맘껏 볼 수 있는 '시네마 파라디소'일 것임에 틀림 없었다. 그러나, 서른이 넘은 한국의 독신녀가 비자를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학연수 전문 유학원에서는 비자가 유리한 뉴욕대나 컬럼비아대를 택하라고 했다. 성냥갑처럼 빌딩들이 분산되어 있다는 뉴욕대 대신 캠퍼스가 볼 만 하다는 컬럼비아대가 끌렸다.
'카이로의 자주빛 장미'에서 배우 제프 다니엘스가 스크린에서 나와 웨이트레스 미아 패로우에게 다가가고 있다.
컬럼비아대 어학원(ESL)은 미국인에게는 레벨(1-10)에 따라 유치원과 초등학교 수준이다. 어학원 수업은 캠퍼스에서도 가장 시끄러운 브로드웨이 길가 루이슨홀에서 받았다. 말하자면, 레스토랑에서도 제일 후진 테이블을 뜻하는 시베리아였다. 컬럼비아에서 7블럭 남쪽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 위치한 기숙사 건물에서도 어학생들은 찬밥 신세였다. 당시 우리는 뉴욕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흥분되어 그런 차별을 예민하게 느끼지는 못했지만. 어학생들은 가장 시끄러운 아래층에 몰아넣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외국인 학생들은 영주권자 학생들보다 많게는 50% 이상의 기숙사 비용을 내고 있었다. 우리는 부동산 투자로 유명한 컬럼비아대에 재원을 조달하는 외국인 학생들이었지만, 학교와 기숙사의 찬밥들이었다.
컬럼비아 어학원의 등록금은 본전 생각나게 만들 만큼 비쌌고, 수업도 실망스러웠다. 성문종합영어를 마스터한 우리들에게 문법과 어휘력은 강사를 가르쳐줄 정도로 월등하다. 그러나, 우리는 말을 할 수 없는 백치 아다다들이었다. 한 클래스에 한국+일본 학생이 85%를 차지했다. 우리 반은 프랑스 2, 멕시코 하나, 아이보리 코스트 하나... 한일 학생들은 대부분이 수업 시간에 꿀 먹은 벙어리들이었다. 프랑스에서 온 엘렌은 '힌트(hint)'라는 초보 단어도 몰랐지만, 말은 청산유수였다.
싱글룸을 신청했는데, 룸메이트가 들어왔다. 유학원에서 잘못 전달한 것 같았다. 이것도 뉴욕 초년병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었다. 베아트리체, 베네수엘라에서 온 아담한 키의 미인이었다. 오래 전 베네수엘라 출신 미스 유니버스가 한국을 방문해 ‘비원(Secret Garden)’에서 찍은 사진을 연예 잡지에서 본 기억이 났다. 베아트리체는 미스 유니버스 6명이 베네수엘라 출신이라고 말해줬다. 그녀의 옥색 눈동자도 구슬처럼 빛이 났다. 나이가 나보다 훨씬 어렸지만, 나이는 우리에게 숫자에 불과했다. 익명으로 살고 싶어 온 뉴욕인데, 교실에서 기숙사에서 '언니' '누나'라고 꼬박꼬박 부르는 동생들이 줄줄이 생겨 부담스러웠었다. 그런데, 나의 룸메이트 베아트리체와는 나이를 잊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나처럼 저널리즘을 전공한 베아트리체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PD였다.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가브리엘 마르케즈 인터뷰도 했다고 자랑했다. 그녀도 역시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기 위해 뉴욕으로 날아온 것이다. 낯선 도시의 룸메이트가 된 우리는 불편한 제 2의 국어로 더듬더듬 소통하며 이방인 생활에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깔끔했다. 차라리 결벽증에 가까웠다. 서랍장에 옷을 넣을 때는 일일이 대형 지프록 백에 넣어 보관할 정도였다. 베아트리체는 나를 '스시(sushi)'라 부르며 애교도 떨었고, 나를 위한 영문 시도 써주었다. 한국 여자친구가 그랬다면, 징그러웠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씁쓸한 뉴욕의 이방인끼리의 이런 달콤한 제스처는 삶의 엔돌핀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그녀를 ‘베아’라고 불렀다.
어학원 반 배정을 위한 모의 토플시험을 본 결과 레벨 6C을 받았다. 10으로 가는 길은 길고 험난한 길처럼 보였다. 영어로 듣고, 영어로 말하는 데 칼로리 소비량이 많았다. 수업에서 돌아오면, 낮잠을 잔 후 영화를 보러 나갔다. 마틴 스콜세지의 신작 '카지노'를 보면서는 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절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대사가 이어지는데다가, 티켓도 당시 1만원 이 넘었다. 한국에서 일할 땐 개봉 이전 시사회에 초대되어 한글 자막으로 편하게 볼 수 있었다. 코리아헤럴드의 영어 선생님이 "미국에서 몇년 살다가 영어 때문에 화병만 생겼다"고 했는데, 그제야 이해가 됐다.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내게 공짜는 없었다. 뉴욕은 '시네마 천국'이기라기 보다는 낯설고, 차가왔다. 그해 겨울은 결코 따뜻하지 않았다.
나는 뉴욕의 아침을 부드럽고 달착지근하며, 값도 싼 크림치즈와 든든한 베이글로 시작하면서 그날 겪어야할 영어 스트레스를 대비했다.
어느 날 베아트리체가 씩씩거리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분하다는 거였다. 왜냐구 묻자, 작문 시간에 주제 ‘자동차’를 두고 토론을 했다고 한다. 베아는 5A반이었을 것이다. 회화는 능통했지만, 아마도 문법이나 어휘력에서 낮은 점수가 나왔나보다. 스위스에서 온 변호사 학생이 “베네수엘라에도 자동차가 있냐?”고 조롱했다면서 눈물이 그렁그렁거렸다. 그에 광분한 베아는 “그럼 우리가 젖소나 타고 다니는 줄 알았냐?”고 반박했다고 한다. 이런 즉각적인 대응도 라틴어를 구사하는 남미나 유럽 학생들이었기에 가능하다. 우리나 일본 학생들은 머리 속에서 영작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문법이 맞는지 고민하다가, 마침내 포기해버리고 만다. 머리 속에서 ‘오브 코스, 썬 오브 비치’만 맴돌았을 것이다.
베아는 그 무식하고 무례한 스위스 변호사 녀석의 조롱에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베네수엘라에서는 방송 PD인데, 미국에서 ‘자동차’를 주제로 영작하고, 토론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또한 기가 막혔을 것이다. 컬럼비아대 어학원 5-6 레벨은 교육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에 불과했다. 지하철에서 홈리스같은 흑인이 뉴욕포스트라도 들고 있으면 부러웠다. 뉴욕타임스 일요판을 옆구리에 낀 뉴요커는 '그림의 떡'이라는 생각이 들어 학비가 아까웠다.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훈민정음의 위대성은 지구촌 시대 어느 타민족과도 소통할 수 없는 우리 말에 대한 열등감의 뿌리로 깊게 자라고 있었다.
그해 2월 기숙사 창문으로 불어닥치는 허드슨강변의 바람은 살벌했다. ‘바람 소리’를 녹음해다가 ‘폭풍의 언덕’ 사운드 트랙으로 써도 좋을 것 같았다. 두꺼운 스웨터를 가져온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스웨터를 끼어입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영어 스트레스가 없는 꿈나라로 들어가고 싶었다. 베아와 나는 옷장을 사이에 두고 싱글 베드에 누워 우리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덜덜덜 떨면서 '굿 나잇'을 했다.
그러나, 잠도 쉽게 오지 않았다. 침대 매트리스도 킹콩이 지나간 것처럼 스프링이 푹 꺼져 있었기 때문이다. 컬럼비아 대학생들이 쓰다 망가트린 매트리스를 외국인 어학 연수생들에게 던진 것일까?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어학생 기숙사 담당자에게 히터를 올려달라고, 매트리스를 갈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This is New York!”이라는 더 쌩쌩한 바람으로 되받아쳤다. 그러더니, 매트리스는 좀 심하게 망가진 걸 확인했던지 바꾸어주었다. 그게 얼마나 고마웠던지.
우리는 몸은 어른이었지만, ‘뉴욕’이라는 천국보다 낯선 도시에서 10살짜리 미숙아가 되어야 했다. 때로는 아다다가 차라리 속편했다. '브로큰 잉글리쉬'를 구사하는 외국인 학생들, 우리 같은 에트랑제들에게 뉴욕이 멋진 도시로 느껴지는 데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박숙희/블로거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한양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수료. 사진, 비디오, 영화 잡지 기자, 대우비디오 카피라이터, KBS-2FM '영화음악실', MBC-TV '출발! 비디오 여행' 작가로 일한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Korean Press Agency와 뉴욕중앙일보 문화 & 레저 담당 기자를 거쳐 2012년 3월부터 뉴욕컬처비트(NYCultureBeat)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