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덴 하틀리의 수구초심(首丘初心)과 메인주@메트 브로이어(3/15-6/18)
Marsden Hartley's Maine
마스덴 하틀리의 수구초심(首丘初心)과 메인주(Maine)
March 15-June 18, 2017
The Met Breuer
Marsden Hartley, Down East Young Blades, 1940/Madawaska—Acadian Light-Heavy, 1940/ Flaming American (Swim Champ), 1939–40/ Canuck Yankee Lumberjack at Old Orchard Beach, Maine, 1940–41
조지아 오키프, 아서 도브, 찰스 쉴러, 스튜어트 데이비스 등과 미국 모더니즘의 기수로 꼽히는 화가 마스덴 하틀리(Marsden Hartley,1877-1943)와 고향 메인주(Maine) 배경 작품에 포커스를 둔 특별전 'Marsden Hartley's Maine'이 메트 브로이어(Met Breuer)에서 열리고 있다. 3월 15일부터 6월 18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는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수구초심(首丘初心)' 화가로서의 마스덴 하틀리의 세계를 조명한다.
Marsden Hartley, Summer, Sea, Window, Red Curtain, 1942/ Sea Window–Tinker Mackerel, 1942
이전의 마스덴 하틀리 전시는 독일 시리즈, 뉴 멕시코, 노바 스코시아 시기 추상화를 소개했지만, 메트 브로이어의 '마스덴 하틀리의 메인주'에서는 그의 트라우마가 스며든 메인주의 풍경과 동성애 성향을 투사한 인물화가 소개된다. 이와 함께 하틀리에게 영향을 준 세잔과 미국화가 윈슬로우 호머, 알버트 핀캠 라이더, 그리고 일본 판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 카추시카 후쿠사이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1941년 사진작가 폴 스트랜드의 부인 레베카에게 보낸 엽서에서 하틀리(왼쪽), 마스덴 하틀리의 시집
마스덴 하틀리(Marsden Harltley)는 1877년 메인주 섬유도시 루이스턴의 영국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에드문드 하틀리(Edmund Hartley)였는데, 1906년 29세에 모친 마사 마스덴(Martha Marsden)의 성을 이름으로 채택했다. 하틀리가 8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평생 외로움에 사무치게 된다.
Marsden Hartley, Lobster on Black Background, 1940–41, Oil on hardboard (masonite)
부친이 재혼한 후 하틀리가 열네살 때 온 가족이 오하이오주로 이주했는데, 하틀리만 황량한 메인주에 남겨두었다. 이때 소년 하틀리는 신발공장 노동자로 1년간 일하게 된다. 하틀리는 훗날 사진작가 겸 아트딜러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에게 당시 느꼈던 외로움을 "칼로 살을 에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고독"이었다고 고백했다.
Marsden Hartley, Lobster Fishermen, 1940–41, Oil on hardboard (masonite)/ Study for "Lobster Fishermen", 1940, Pastel on paperboard
이듬해 가족과 재회한 하틀리는 장학금을 받고 클리블랜드아트스쿨에 다녔다. 1898년, 22세에 동네 후원자의 도움으로 미술공부를 하러 뉴욕에 온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의 전신인 New York School of Art에서 만난 스승이 얼마 전 보스턴미술관에서 특별전이 열린 윌리엄 메릿 체이스(William Merritt Chase)였다. 하틀리는 사실주의에 정통한 체이스의 지도를 받은 후 내셔널디자인 아카데미에서도 수학했다.
가운데는 하틀리가 1938년 그린 라이더의 초상. 양 옆은 라이더의 풍경화. Albert Pinkham Ryder, American, Moonlight Marine, 1870–90/ Marsden Hartley, Albert Pinkham Ryder, 1938/ Marsden Hartley, The Dark Mountain, No. 1, 1909
그러나, 이즈음 하틀리가 찬미하던 화가는 몽상적인 바다 풍경화를 그리던 알버트 핀캠 라이더(Albert Pinkham Ryder). 자신보다 30세 연상인 라이더가 살던 그리니치빌리지의 스튜디오에 종종 드나들었다. 그러는 한편, 시인 월트 휘트만과 랄프 왈도 에머슨의 시를 즐겨 읽었다.
Marsden Hartley, Desertion, 1910/ The Dark Mountain, 1909/ The Dark Mountain, No. 2, 1909
1908년 서른둘의 하틀리는 메인주의 로벨에 폐기된 농장으로 이주했다. 로벨에서 그린 작품으로 뉴욕의 스티글리츠의 갤러리 291에서 첫 개인전을 열게된다. 유럽에서 살았던 스티글리츠의 조언으로 하틀리는 세잔, 피카소, 마티스의 작품을 알게됐고, 차츰 영향받기 시작한다. 1909년 여름엔 뉴욕에 머물면서 화가 알버트 핑크햄 라이더(Albert Pinkham Ryder) 스타일의 메인주를 소재로 한 어두운 풍경화 시리즈를 그렸다.
Marsden Hartley, Mt. Katahdin, Winter, 1939–40, Oil, on commercially prepared paperboard (academy board)
1912년 파리로 가서 미국작가 거트루드 스타인 서클의 전위 작가와 전위 아티스트를 만났다. 이때 스타인과 동료들은 하틀리에게 그림만 그리지 말고, 글을 쓰라고 부추긴다. 이듬해엔 베를린으로 이주, 칸딘스키와 어울리며 추상화와 독일 표현주의를 접합한 작업을 한다. 이 시기엔 프러시아계 중위와 사귀면서 독일 군대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에 집중하다가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중단한다. 이 시기의 작품이 1913년 뉴욕 아모리쇼에 전시되었다. 중위가 사망하면서 슬픔에 잠기게 된다.
Marsden Hartley, The Lighthouse, 1940–41, Oil on masonite-type hardboard
하틀리가 미국으로 돌아온 것은 1916년이었다. 1917년 메인주 바닷가의 동성애 타운인 오군퀸(Ogunquit)의 예술가촌 에서 화가 그래픽아트 섬머스쿨을 세운 해밀턴 이스터 필드와 조각가 로버트 로렌트와 어울리며 작업했다. 이후 매사추세츠, 뉴 멕시코, 캘리포니아, 뉴욕을 방랑하면서 살다가 1921년 다시 유럽으로 갔다. 1930년 귀국한 후 '뉴잉글랜더에 의한 뉴 잉글랜드 회화들'을 타이틀로 한 개인전을 통해 '메인주' 화가임을 공표한다.
Marsden Hartley, Log Jam (Backwaters Up Millinocket Way No. 3), 1939–40/ Ghosts of the Forest, ca. 1938
1937년 고향 메인주에 돌아가 같은 해 스티글리츠의 새 갤러리(An American Place)에서 메인주 소재 개인전을 열었으며, 전시 카탈로그에 자신의 시적인 에세이 'On the Subject of Nativeness'를 썼다. 1937년부터는 풍경화에 사람들이 등장한다. 랍스터 어부, 벌목꾼, 사냥꾼, 스포츠선수 등 근육질의 남성을 모델로 그렸다. 메인주에서 그가 사랑에 빠진 것은 파도, 교회, 그리고 통나무였다.
Marsden Hartley, Evening Storm, Schoodic, Maine No. 2, 1942/ Winslow Homer, Northeaster, 1895; reworked by 1901
메인주의 대표화가인 윈슬로우 호머(Winslow Homer)의 바다 풍경화 '프라우츠 넥'에서 영감을 받은 해변가의 파도 풍경, 통나무들이 쌓인 풍경, 그리고 고독하게 기울어져 있는 교회의 풍경은 모두 마스덴 하틀리의 고독한 자아와 변방의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듯 하다. 하틀리는 호머에 오마쥬를 표하는 해변가 풍경화를 그리면서 스스로를 "메인주에서 온 화가(painter from Maine)"로 부르기 시작한다.
Marsden Hartley, Mt. Katahdin–November Afternoon, 1942, Oil on hardboard (masonite)
하틀리는 바다 뿐 아니라 산도 사랑했다. 말년에는 아팔래치안 트레일(Appalachian Trail)의 북단 종착역에 자리한 박스터스테이트파크의 카타딘산(Mount Katahdin) 시리즈를 10여점 그렸다. 1942년 프랑스 딜러 폴 로젠버그의 뉴욕 갤러리와 계약하고,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회고전 제안을 받는다. 하지만, 하틀리는 1943년 엘스워스에서 눈을 감았고, 앤드로소긴강에 재가 뿌려졌다. 그의 나이 66세. 1944년 하틀리의 MoMA 회고전은 추모전이 되었다.
The Met Breuer 945 Madison Ave,@75th St.
▶개방시간: 일-목 오전 10시-오후 5시30분, 금-토 오전 10시-오후 9시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휴관.
▶추천 입장료: 성인($25), 65세 이상($17), 학생($12). *추천 기부금제(suggested donation). http://www.metmuseum.org
*브라질 구체미술의 기수 리지아 페페 회고전@메트 브로이어
*사진작가 디안 아버스(Daine Arbus)와 아웃사이더들@메트 브로이어
*거장들의 미완성작 'Unfinished'@메트 브로이어
*'인도의 아그네스 마틴' 나스린 모하메드 회고전@메트 브로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