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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에 채운 한 잔의 미장센] 영화와 술 이야기 <1> 

 

'007 시리즈' '양들의 침묵' '사이드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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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술은 때때로 인물의 심리와 복선, 그리고 감독의 미장센(mise-en-scène, 무대/장면의 배치)를 전달하는 시각적 장치다. 

술은 캐릭터의 페르소나와 정체성을 구축하며, 때론 인물의 가면을 벗기는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느와르에선 술이 의리와 배신을, 로맨스 영화에선 설렘을 극대화할 수 있다.   

 

 

'영화와 술' 이야기 연재 순서 

1. 교양 있는 스파이와 괴물, 그리고 허영의 초상: '007 시리즈' '양들의 침묵' '사이드웨이'

2. 술과 계급의식: 반지하와 형사의 위스키가 향하는 곳: '기생충'과 '헤어질 결심'

3. 투명한 잔에 일렁이는 공허한 욕망: '가능한 사랑'과 이탈리아 와인 가야(GAJA)

4. 여배우의 방어기제, 소주 대신 맥주를 권할 때: '그녀가 돌아온 날'의 독일 맥주

 
 
 

1. 교양 있는 스파이와 괴물, 그리고 허영의 초상

'007 제임스 본드' '양들의 침묵' '사이드웨이' 그리고 루디 쿠니아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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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옥토퍼스(Octopuss, 1983)'에서 제임스 본드로 분한 로저 무어가 마그다 역의 크리스티나 웨이본과 샴페인 볼랭저를 마시고 있다.

 

 

007 제임스 본드의 원작자 이안 플레밍은 태탕저(Taittinger) 애호가였다. 1963년 숀 코네리의 '007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에선 태탕제가 나온다. 오리엔탈 익스프레스 기차 안에서 본드걸(타티아나 로마노바)와 악당이 함께 자리한 식사에 나온 태탕저 샴페인에 독이 들어간다. 그후 태탕저는 이미지를 우려해 이후의 영화 협찬에는 거절했다.

 

이후 돔 페리뇽(Dom Pérignon)으로 대치되었다가 샴페인 볼랭저(Bollinger)가 1973년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에서 제임스 본드로 분한 로저 무어가 호텔 룸서비스로 볼랭저를 주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1979년 볼랭저와 007 영화 프로듀서간의 신사협정으로 '문레이커(Moonraker)'부터 007의 볼랭저 시대가 공식 시작됐다. 

 

샴페인은 제임스 본드의 교양을 보여주는 도구다. 살인면허를 가진 냉혹한 스파이지만, 샴페인의 최적 보관 온도와 특정 빈티지를 언급하며 해박한 지식을 드러내며 우아한 영국 신사임을 각인시킨다. 때때로 007은 악당과 마주 앉아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는 매개체도 된다. 샴페인은 본드걸을 유혹하거나 로맨틱한 장면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술이기도 하다.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본드가 마시는 샴페인은 완벽한 작전 완수의 카타르시스를 전달하는 승리의 시그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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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 요원 클라리스 스탈링 역의 조디 포스터가 하니발 렉터 역의 안소니 홉킨스를 처음 만나는 장면. 영화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 1991).

 

 

조나단 드미 감독의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 1991)'에선 살인마 하니발 렉터(안소니 홉킨스 분)가 FBI 요원 클라리스(조디 포스터 분)에게 "인구 조사관이 나를 테스트하려 하더군. 그래서 그의 간을 요리해 파바 빈(이집트 콩)과 근사한 키안티와 함께 먹어 치웠지"라고 말한다.  

 

정신과 의사 하니발 렉터는 우울증 치료제(MAO)를 복용하는 환자가 절대 먹어서는 안되는 세가지 음식인 간, 파바콩과 레드 와인을 언급한 것이다. 이 음식들엔 티라민이라는 성분이 많아서 이 약과 함께 먹으면 혈압이 치솟아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이에 렉터는 자신이 약을 먹지 않고 있으며 너희들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식인 행위에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레드 와인 키안티(Chianti)를 곁들였다며 자신의 교양미를 강조한다. 이 말을 마친 후 입술을 빠는 "쉭쉭" 소리를 내며 스탈링이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공포심을 조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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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이드웨이(Sideways, 2004)'에서 마일스(폴 지아마티 분)가 친구 잭(토마스 헤이든 처치 분)에게 와인 시음법을 설명해주는 장면.

 

산드라 오가 출연한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와인 영화 '사이드웨이(Sideways, 2004)'는 전 세계에 피노 누아 열풍을 일으켰다. 까다로운 포도 품종 피노누아(Pinot Noir)의 팬인 주인공 마일스(폴 지아매티 분)는 "멀로(Merlot, 메를로)를 주문하면 난 바로 나갈거야!"라며 대중적인 멀로를 비하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아끼는 보물 와인은 멀로 40% 이상, 카버네 프랑 50% 이상의 블렌드인1961년산 '샤토슈발블랑(Château Cheval Blanc)'이었다. 

 

'사이드웨이'는 전 세계에 피노누아 열풍을 일으키는 '사이드웨이 효과'를 냈다. 부유한 헤지펀드 매니저, 테크 기업가, 할리우드 엘리트들이 너도나도 피노누아를 마시기 시작, 프랑스 버건디/부르고뉴의 최고급 올드 빈티지의 수집 광풍으로 이어졌다. 컬트 버건디 로마네 콩티(DRC) 올드 빈티지는 피카소 그림처럼 거래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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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 쿠니아완 재판 스케치

 

이 틈새에 끼어든 것이 인도네시아 출신 와인 사기범 루디 쿠니아완(Rudy Kurniawan, 일명 '닥터 로마네 콩티')이다. 쿠니아완은 품질이 들쭉날쭉한 버건디 명품으로 억만장자 수집가들을 겨냥해 대형 사기극을 펼친 것이다. 한때 비버리힐즈 맨션, 럭셔리 자동차와 시계, 고가 미술품 수집의 상류 생활을 했던 쿠니아완은 결국 수감됐다.  

 

필자가 2013년 8월 맨해튼 연방지방법원에서 열린 쿠니아완 재판을 참관하러 갔을 때 코믹한 광경이 펼쳐졌다. 리처드 버만 판사는 쿠니아완에게 2천840만 달러의 배상과 2천만 달러의 추징금에 10년 징역형을 내렸다. 그런데, 쿠니아완의 변호사 제롬 무니은 쿠니아완이 부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기위해 범죄를 저질렀으며, 와인 한병이 사람이 1년에 버는 액수의 3배가 되어서는 안된다며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무도 저축한 돈을 잃지 않았다는 식의 변론으로 형량을 줄여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버만 판사는 "부자가 사기를 당하면, 사기 친 사람을 형량이 줄어든단 말입니까"라고 호통을 쳤다. 

 

당시 쿠니아완의 변호사는 "부자들은 (사기당해도) 싸다(they deserve it)"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나는데, 그의 호소가 너무도 아마추어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코웃음이 났다. 그는 명백히 명품와인 사기를 당한 부자들을 고소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피해자였던 억만장자 수집가들이야말로 와인의 진짜 맛을 즐긴 것이 아니라 라벨이 주는 권위와 계급을 소비하던 가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처럼 와인의 라벨 뒤에 숨은 자본과 계급의 장벽, 그리고 허위의식은 우리 영화 속에서도 날카로운 미장센으로 변주되곤 한다.

 

쿠니아완이 복역 중이던 2016년 제리 로스웰과 루벤 애틀라스 감독이 세기의 와인 재판을 다룬 다큐멘터리 '사워 그레이프(Sour Grapes)'를 만들었다.  불법체류자였던 쿠니아완은 2020년 석방되어 인도네시아로 강제 추방당했다. 이후 싱가포르와 홍콩을 오가며 '범죄자 셀럽'으로 대접받으며 억만장자들의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저렴한 와인을 섞은 짝퉁 와인으로 로마네콩티, 페트뤼스, 샤토 르 팽 등 수천만원을 호가하느 빈티지 와인의 맛을 내는 '공인된' 위조 와인 제조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다.   

 

 

*007 샴페인 볼랭저 5코스 와인 디너@크라운 샤이

*007 제임스 본드와 엘리자베스 여왕의 샴페인, 볼랭제(Bollinger)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샴페인, 태탕제 동굴 저장고 속으로

*키안티 클라시코 테이스팅@뉴욕공립도서관

*로마네 콩티(DRC, Domaine de la Romanée-Conti) 와인에 대해 궁금한 것 10가지

*위조 와인 스캔달<1> 토마스 제퍼슨 샤토 라피트 1787는 가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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