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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재미난 놀이, 나는 행복한 아웃사이더” 

                                               화가 김원숙 Wonsook Kim


바닷가와 숲 사이에 선 여인의 손가락 끝에 새가 앉아 있다. 여인은 새에게 길을 묻는 것일까? 속옷 차림의 여인이 창문을 열고 저 건너 산의 불을 바라본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그 뒷 모습에서 여인의 절망감이 묻어 나온다. 비가 쏟아지는데, 한 여인이 나룻배 앞에서 춤 삼매경에 빠져 있다. 어두운 숲 속에서 화병을 한 손에 든 여인이 그림자 같은 남자와 춤을 춘다. 비주얼 엑스타시(visual ecstacy)다.

 

 숲 속에서 윗도리를 벗은 채 춤을 추며 황홀해하는 여인, 낭떠러지에서 만세를 부르며 떨어지는 여인, 집을 부둥켜 안고 있는 여인… 화가 김원숙(Wonsook Kim•59)씨의 캔버스에서 만나게 되는 여인들이다. 산, 불, 바람, 불, 달, 호수, 집, 달, 꽃, 새, 길, 계단, 호수, 신발 등 그가 즐겨 그리는 이미지들은 관람자들을 향해 속삭이는듯 하다.

 

 그는 붓으로 이야기를 한다. 캔버스와 종이는 그에게 무대와도 같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들려준다. 어느 누구라도 김씨가 포착한 이미지 속에서 풍겨나오는 정서를 직감할 것이다. 이 풍진세상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그리움,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세상의 심포니를 지휘하고 있는 화가 김원숙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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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t My Fire III, 1986

 

 

 그림 그리는 것만큼이나 글 쓰는 일은 김씨에게 일상생활이었다. 그가 그림이 있는 수필집을 낸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난해 말 김씨는 ‘그림 선물-화가 김원숙의 이야기하는 붓’(아트북스 간)을 냈다. 이민자들은 모국어와 영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기 쉽다. 열아홉 살에 한국을 떠난 화가지만, 모국어를 부둥켜 안고 살아온 셈이다.

 

 스토리가 있는 그의 그림은 시(poetry)같고, 에세이(essay)같다. 이 책에서 그림은 글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캔버스로는 알 수 없는 화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책, ‘이야기하는 붓(storytelling brush)’이다. 

 

 김원숙씨는 이민 40주년을 맞았다. 인디애나주 블루밍턴에 살며 뉴욕을 오가는 그를 최근 첼시의 아파트에서 만났다.

  

 

그림과 글 사이에서

 

긴 세월 동안 집 안팎에서 주로 영어만 쓰고 살았기 때문에 모국어인 한국말이 점점 어눌해지는 게 안타까웠다. 쓰지 않는 날개가 쪼그라들어 그냥 어깨에 붙어있기만한 것 같이, 그래서 해결책이라고 시작한 것이 글쓰기였다.”-그림 선물(책장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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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cerise in Moonlight, 1979
  

 

-화가이면서 꾸준히 글을 써서 책을 냈다.
“언어를 좋아하는데, 여기서 40년 넘게 살았다. 교포들은 한 100-200단어 정도로, 명사와 동사로 산다. 형용사, 부사를 안 쓰게 된다. 영어는 더욱 그렇다. 무엇을 묘사하는 것, 형용사와 부사로 인생이 풍요해진다.”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책이다. 글과 그림 작업을 어떻게 조율했나.
 “이 책의 글은 그림을 설명하는 글들은 아니다. 설명이 되는 일도 아니다. 그저 이런 그림들이 나오게 된 내 삶의 언저리를 이야기한 것이다. 일기 같은 글을 써놓고 그려놓은 그림 중에서 갖다 붙인 것도 있고, 그림을 그려놓고 보고 써 내려간 것도 있다. 쓰다 보니 또 다른 이미지가 보여 다른 그림을 그리게된 것도 있다. 그러니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는 다 같은 놀이다.”  


-그림과 글의 차이는.
“그림은 음악처럼 사람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그려내는 예술이다. 그런데, 문학은, 특히 시의 세계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언어로 나타내는 예술이라서 더욱 신기하다. 글에는 그림처럼 적당히 숨어버릴 곳이 없다. 내겐 신선한 도전이다.”

 

-언제 글을 쓰고, 언제 그림을 그리나.
“글은 마감 앞두고, 일기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날씨부터 공책에 꼭 쓴다. 옆에 그림도 그리고. 어느 날은 두 단어로 끝나고, 어느 날을 길게 쓴다. 지난해 페트라(Petra)를 다녀온 후, 인간관계가 어려웠을 때는 길게 쓰기도 하고.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그리는 것이 그림이고, 글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세계다. 사과도 오렌지도 다 맛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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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가족에서 나온 '삐딱이'

  

1953년 부산에서 둘째로 태어난 김씨의 가족은 이듬해 서울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음악가이며,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를 잘 치시는 아버지의 영향인지, 우리 8남매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프로급으로 연주하는 동생들과 성악, 호른을 하는 동생들까지, 의사가 된 언니와 엔지니어인 막내를 빼고는 다 음악을 한다. 그래서 음악을 제쳐놓고라도 못생긴데다 공부도 못하는 나는 항상 가족의 변두리를 맴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림선물(사과나무 아래에서, p108)-

 

 

-자랄 때 부모 영향이 컸나.
“사람들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지금, 여기에 급급해 사는 사람들과 꿈과 희망이 많아서 중간중간 눈을 들어 다른 곳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 부모님은 후자에 속했다. 아버지는 예술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재미’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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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gure with Shoes, 2006

 


-음악가족인데, 화가가 됐다.
“아버지가 3대 독자인데, 언니에 이어 내가 나와서 온 가족을 ‘우짜꼬’하면서 걱정했다. 애가 새까맣고 해서 윗 목에 놓고 머리를 빡빡 깎여서 남자 애처럼 길렀다. 뒤로 남자애를 보기 위해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전화로 ‘미적 감각이 있었을 텐데,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하시더라. 언니와 남동생, 그 뒤로 예쁜 여동생까지 여덟 명 사이에서 난 제일 못생기고, 공부도 제일 못하는 애였다. 매일 구석에서 울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관심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나.
“난 형제들과 달랐다. 한국 어른들이 좀 잔인한 데가 있다. ‘얘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해서 다리 밑으로 엄마 찾으러가기도 했다. 국민학교 때다. 어느 날 엄마가 ‘니는 그래도 참 매력이 있다’하셨다. 어렸지만, 난 알았다. 나는 ‘매력’을 물고 늘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좀 달라야 했다. 성적표가 ‘수수수’하는 언니와 달리 나는 ‘양가’의 문학소녀였다. 난 언니와 경쟁할 수 없었고, 정 반대로 가야 했다. 남동생이야 아들이니 그 사이에서 난 달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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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rning Bridge, 1989

  

-미국으로 탈출한 셈인가.
“난 정말 도망 온 셈이다. 그때도 다른 애가 간다 하면 난리 났을 텐데, 내가 간다니까 집에서도 말리지 않았다. 다른 애들로 너무 바빠서. 집에선 내가 먹히지 않았다.” 


-화가가 꿈이었나.
“난 작가가 되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책 많이 읽었고, 여학생 시절 인상 쓴 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끼고 다니기도 했다. 숙명여중 때 모두들 1차에 갔는데, 몇 명만이 떨어져 2차였던 경희여고에 갔다. 중학교 때 문교부 장관 딸과 절친한 친구였는데, 우리 둘 다 삐딱했다. 노는 애들은 아니었고, 시험 답안지에도 우리는 이름만 쓰고 백지를 냈다. 학교와 공부가 너무 재미 없어서 책 많이 읽었고, 서로 편지 쓰고, 그림 그리러 다니며 ‘우린 문학, 예술가야’라고 했다. 우리의 모토는 밖으로 도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약간 퇴폐적인 미술 선생님을 좋아했다. 친구는 60년대 경희여고 때 미국으로 유학 갔다. 혼자 남으니 삐딱이 안돼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공부도 하니 성적이 올라갔다. 그래서 서울대 지원했는데 떨어졌다.”.

 

-그래서 홍익대로 갔나.
“후기였던 홍대로 갔는데, 더 큰 물이 그리워서 미국으로 온 것이다.”

(김씨는 1972년 일리노이주립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즘(ism)보다 내 마음을 따른다

  

 “나의 그림들은 자화상의 요소가 많다… 내 눈에 보이는 세상, 내 마음에 와 닿는 정경들, 나를 들뜨게 하는 것들, 내가 무서워하는 그림자들, 내가 간직하고 싶은 순간들이 모두 그림이 된다. ‘나’라는 작은 우주 속에 떠다니는 수많은 소리, 기억, 이야기, 그리움, 꿈 등의 이미지들이 화폭에 내려앉아 자기 자리들을 잡고 이어져서 그림이 만들어진다. 내가 살아내는 삶의 일기책이다.”-‘그림 선물’(나의 자화상, p218)-

  


-유학시절 미국 화단의 경향은.
“컬러필드(color field), 추상이 대세였다. 로스코(Mark Rothko), 마더웰(Robert Motherwell),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 등. 나도 그렇게 했다. 커다란 캔버스에 남보다 더 크게 해서 점수도 잘 받았지만, 내 삶과 관련이 없었다. 그날 바람이 어떻게 불었는지, 엄마에게서 어떤 편지가 왔는지… 난 그런 이즘(ism)보다 즉각적이고, 시각적인 사람인 것 같았다. 해롤드 보이드 교수에게 그림을 보여주었더니 ‘이게 너야, 왜 이런 작업을 하지 않니? 그게 더 정직하다’고 말해주었다. 그게 나에게 중요한 중요한 포인트가 됐다.”

 


-그리고, 뉴욕으로 왔다. 무명화가 시절 어떻게 살았나.
 “메이시, 블루밍데일, 헨리 벤델에서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면서 밤에 그림을 그렸다. 몰론 처음엔 조수로 시작했다. 지금도 메이시가 고마워서 그냥 들어가서 쓸데 없는 걸 사기도 한다. 메이시 덕분에 아이들 자전거도 샀고, 우리가 먹고 살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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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rst, 2003

   

 

-그림이 팔리기 시작한 때는.
“80년대 초 브룩알렉산더 갤러리(Brooke Alexander Gallery) 사람이 우연히 우리 집에 와서 내 그림을 봤다. 드로잉센터에서 그룹전을 했다. 뉴욕타임스에 리뷰도 잘 나왔다. 그리고 브룩알렉산더에서 전속하게 됐다. 그 때는 큰 일이라서 ‘나도 미술사에 들어가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2년 반하고 나니 못하겠더라. 당시 내 그림이 어두웠다. 몇 년 후 나는 괜찮아졌는데 여전히 화랑에서는 어둡고 극렬한 이미지를 원했다. 나는 그게 아니었다. 꽃도 그리고 싶었다. 고민을 많이 했다. 신문에도 나고, 엄마 아버지도 좋아하고, 뉴욕타임스에서 ‘오리지널하다, 재능있다….’라고 나면서 뜨기 시작했다. 나도 물론 그런 관심이 너무 좋았다. 난 젊었고, 다들 고생하는데, 내가 천사가 된 느낌이었다. 갤러리에선 뉴욕센트럴 화구점에서 맘대로 갖다 쓰라고 했다. 그런데, 족쇄처럼 되어갔다. 갤러리에서 원하는 대로 하다간 자살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가 아닌 것을 그려야 했다. 난 변했다. 나한테는 절실했다. 그래서 갤러리를 떠났다. 하지만, 계속 연결이 되서 전시도 많이 했다. 내가 정치적이지 못해서 더 알려질 수 있었을 텐데, 그게 나의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그게 여성 화가의 한계일까. 
“결혼했고, 아이들이 들어왔고 해서 난 내 커리어에 포커스할 수 없었다. 가족에 포커스해야 했다. 하지만, 여성 작가라서 특별히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난 이런 작업을 하는 여성이고 싶었다. 세계적인 작가가 되려면, 전략도 있어야 하며, 모든 것을 투자하고 희생해야 할 것이다. 커넥션도 있어야 하고. 남성 작가와 차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난 애 보는 것이 좋았고, 재미 있었고, 내 그림을 끼적거리는 것이 좋았다. 난 가족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미술계에 게임의 규칙이 있다. 내가 그걸 했으면, 더 성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난 아웃사이더로서 행복했다.”

 

-서양 미술사도 가부장적이고, 아직도 뮤지엄 전시 역시 남성 작가 중심이다. 아직도 여성작가 전시는 드물다.
“어느 날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 그림을 본 후 나오는데, 절망감이 들더라. 그는 남자이기 때문에… 센티멘트와 아이디어는 비슷한데, 남성 호르몬이 갖는 힘이 느껴졌다. 조수들을 상당히 두고 작업하는 작가들도 있다. 나도 스튜디오가 크고, 작업도 노동집약적이라 조수를 한번 써봤다. 그런데, 밥을 먹었을까 등 작업 외의 잔 신경 때문에 째째해져서 그만 두었다. 측은지심이 앞선다.”   

 

-주류 화가가 될 기회가 있었는데.
“조수 쓰는 것 못하고, 파티에 안가고, 남자 친구가 누구냐 등 등 내가 그 게임을 못하고, 안하는 것이다. 나는 아웃사이더로서 더 편안하다. 아웃사이더가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브로프스키 전시 보면서,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런 데는 불편해서 못 간다. 난 자신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정직해야 한다. 하나님이 널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하지, 세상이 널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후회는 없나.
“내겐 항상 전시보다 가족이 우선이었다. 나도 내 그림을 현대적으로 만드는 법도 여러가지 안다. 그림을 절반 태우거나, 잘라서 불을 태운다는가 하는 등 현대적으로 할 수 있지만, 그건 내가 아니다. 그래서 답답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내게 부자연스러워서 못하겠다."  


 

전쟁고아였던 아이들과 남편 

  

그림은 삶의 부산물이다. 내게 있어서 그린다는 것은 이 찬란하고도 아름다우며 말썽 많고 고통투성이인 삶을 살면서 떠오르는 생의 찬가요 불평이며 마음 깊이 남는 애잔한 것들의 기록이다.” -‘그림 선물(비우는 행복,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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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루밍턴에 모인 김원숙씨 가족. 왼쪽부터 딸 레이첼, 남편 클라렌트씨, 김씨, 손자, 아들 스턴, 그리고  앞쪽은 손자들. Photo: Wonsook Kim 
 

 

-한국전쟁 고아들을 입양했다. 한인으로 입양은 드문 일이었을텐데.
 “전 남편(스티븐 린튼 유진벨재단 회장)이 결혼 전 한국에서 딱한 고아들을 입양했다. 시댁에서 기르고 있어서 우리가 키우자고 데려 왔다. 내가 옛날부터 애들 우는 꼴을 못 봤다. 마음이 아파서 업어서 달래야만 했다. 할머니가 옛날에 ‘우는 걸 못 보면 인생에 애가 많아서 안된다’고 야단치셨다. 그래서 할머니 몰래 아이를 달랬다. 집을 떠날 때까지 우리 집에 우는 애가 있었다. 내가 측은지심 더듬이가 크다. 맨날 할머니더러 ‘애를 이렇게 많이 낳냐.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 많은데, 데려다 기르지’ 말했다가 매도 맞았다. 그러다 보니, 내가 그렇게 됐다.”

 

-아이를 낳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 애들을 기르다 보니, 내가 난 아이들을 이 애들과 똑같이 사랑할 자신이 없어졌다. 고아들을 데려다가 집에서 또 고아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입양아들을 기르는 것이 힘들지 않았나.
 “우린 재미나게 살았다. 애들이 어릴 적 못되게 굴어서 절반 죽이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그럼 내가 ‘계모’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못했다. 린튼은 엄했다. 아이들이 잘 커서 결혼에 애들을 낳았다. 딸 레이첼(39)은 국민학교 교사, 아들 스턴(37)은 건축회사 다닌다. 우리 딸은 정말 천사다. 딸이 적극적으로 서포트를 해준다.”

 

-린튼씨가 한국인 돕는 일을 많이 했다.
“한국어도 잘하고 박식하고, 자선에 대한 신념도 있는 혁명가 같아서 로맨틱했다. 교회 일도 많이 했고, 북한 일도 하면서 동지 같은 관계였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다.  20년 가까이 결혼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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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oken Promise, 1999
  

-그리고 50세에 클레멘트씨와 재혼했다.
“토마스도 우리 아이들처럼 전쟁 고아로 입양됐다. 남편과 공통점이 많아 애들이 자주 온다. 다들 혼혈이며, 고아 출신이다. 60세인 남편부터 손자. 손녀 다섯 명이 재미나게 잘 어우러져서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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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ue Lake, 2002
 
-남편과 아이들이 친모를 찾고 싶어하지 않았나.

“전혀 원하지 않았다. 토마스는 ‘자기를 버릴 때는 무슨 이유가 있었을 텐데, 이제 나타나면 어떻게 하나. 그녀를 생각해야 한다. 그녀도 자신의 삶이 있을 텐데. 찾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만 생각한다’고 말한다. 토마스는 입양아 카운셀링도 한다. ‘불평하지 말고, 네 삶을 살아라’고 조언한다. 그게 생의 모토다. 아이들도 원치 않았다. 고등학교 때 ‘친모 찾고 싶으면 말해라’했더니, ‘엄마 난 괜찮아요. 내가 싫어요?’하더라. ‘걱정 마세요’라고 하면서. 친 가족을 찾은 사람들도 있지만, 99%가 배드 스토리(bad story)다. 돈 달라고, 영주권 해달라고들 한다. 한국에 가도 다시 ‘아웃사이더’가 되고, 또 상처를 입는다. 토마스가 입양아들을 위한 회고록을 쓰고 있다.”

 

-남편은 어떻게 자랐나.
 “1957년 보스턴 인근 백인 가정에 입양되어 자랐다. 그 집 아이들이 넷인데 다들 일류학교 갔다. 토마스는 집안에서 일을 시켰고, 자신도 어렸을 땐 바보인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형제들 중 제일 성공했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백수다. 발명 특허가 30개가 넘는다. 그처럼 긍정적인 사람을 처음 봤다. 조건이 어쨌든 간에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다. 토마스와도 북한 돕는 일 많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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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ain Dance, 2008 

 

-재혼 후에 그림이 에로틱해지고, 여인이 아프로디테같은데.
“그림이 영등포가 됐다, 사랑을 하면, 잔디도 더 파랗고, 유행가 가사가 가슴에 찍찍 오고, 그림이 유치찬란해졌다. ‘김원숙이 끝났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난 상관하지 않았다. 아직도 약간 유치찬란하다. 아이들이, 모든 것이, 사는 자체가 다 그림의 밥이다.”

 

-미국에서는 가장 한국적인 것, 가장 내가 되어야 할텐데.
“그런 생각은 안했다. 한국 전시에선 서양적이라고, 여기 전시에선 동양적이라고 한다.”

 

-블루밍턴에서의  일상은.
“뉴욕 떠난 지 10년쯤 됐다. 특히 지금 장소(where)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와(with whom), 무엇(what)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내 일이 더 중요하고, 소셜 라이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연못, 폭포, 실내 수영장도 있는 큰 집에서 산다. 아침에 새 먹이고, 산보하고, 남편 일하러 가면, 종일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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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ull Moon Lady, 1995

 

-작업 습관은.
“동시 다발로 5-6개를 옆에 두고 왔다 갔다 하면서 한다. 이렇게 재미있는 놀이가 어딨나. 하루 종일, 갈수록 더 재미있어진다. 이젠 어느 화랑에서 얼마 받고 팔까 등의 생각하지 않고 그린다.”

 

-회와와 조각을 병행해왔는데, 최근의 작업은.
“브론즈 드로잉(bronze drawing)을 내가 고안했다. 이 작업도 조수가 있으면 좋으련만, 공방에 보낸다.”

 

-40년 이민생활이다. 낙천적이지만, 어려운 시절도 있었을 텐데.
“어려운 때도 있었지만, 만족(contentment)하고 사는 편이다. 이혼 경험도 지금 생각하면, 껌껌한 굴 같은데, 그래도 거길 빠져 나오는 방법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좀 믿는 것이다. 신에게 감사하게 느끼고, 산다. 선물(gift)인 것 같다.”

 

 

 이제는 일이 꼬이고 손쓸 수 없는 난항을 겪게 되면, 오히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약간의 흥분이 일어난다. ‘이 일은 또 어떻게 풀릴까’하는 호기심과 함께 새로운 도움을 보게될 기대가 크게 부푼다. 어떻게든 건널 것이 분명하기에. -‘그림 선물(흙탕길 건너는 법,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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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론즈 드로잉 'Not enough hands to cover me'(2011)와 김원숙씨.

 

 

이름보다 아름다움을 남기고파

  

 

-중년의 위기를 거쳤나.
“그런 거 없었다. 내가 좀 둔한 것 같다. 나이 든다는 것이 누구에게든지 오니까 새로운 게임이며, 상당히 재미있을 수 있다. 그런데, 난 잘 못 느끼고 산다. 엄마 살아계실 때 전화해서 물었다. ‘엄만, 어땠어 폐경 끝나고?’ 그러자 엄마는 ‘니가 안 바쁘나, 그런 것 생각할 시간이 어딨노! 아이들이 여덟이다. 그래서 느꼈다. ‘모두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것’이다. 옆에서 친구들이 ‘우울하다 죽을 것 같다’고 할 때 왕따 당할까봐 나도 동의는 한다. 사실 살다가 괜히 기분 나쁜 날도 있지 않나.”

 

-전업 화가로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화가로서 전환기는 언제였나.
“삶에는 모멘텀이 있다. 난 작년 이맘 때 페트라(Petra) 여행 후에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뀐 것 같다. 이탈리아 볼로냐에 사는 피아니스트 동생 원미의 50세 생일을 기념해 둘이 간 여행이었다. 우린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기에 이스라엘에 한번 가보기로 했다. 우리가 갔을 때 무언가 영적인 걸 기대했는데, 이스라엘은 종교를 파는 디즈니랜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심한 상업주의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틀을 남기고 뉴욕의 친구와 통화하다가 ‘이스라엘은 실망이지요, 페트라에 가보세요’라고 했다. 귀가 번쩍 뜨였다. 이스라엘을 더 이상 못 참겠어서 우여곡절 끝에 요르단 국경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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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Leap, 1999

  

 

-페트라에 뭐가 있었나.
“산악지대로 험악했다. 그런데, 페트라에서 눈물이 막 났다. 옛날에 산 도둑놈들이 살던 곳에 강, 대양도 없는 산 속 바위에 신전, 사원, 집 등을 조각한 것이다. 바위에 사람, 사자 형상들이 있었다. 숨이 딱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데, 작자 미상이다. 이런 아름다움이 이 오랜 세월을 서있는데, 이런 그림에 이름을 ‘김원숙’ 하고 올리는 것이 참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무언가 탁 벗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종의 해방감이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에고(ego)’를 걸기 시작하면 게임이 된다. 나중에 ‘김원숙, 뉴욕 오가던 사람…’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객관적인 아름다움 하나를 남기는 것이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세상보는 눈이 달라졌나.
“일상으로 돌아오면, 당시의 쇼크가 약화되지만, 확실히 스트레스가 없어진 것 같다. 집착이 없어지는 것 같다, 전엔 어떤 화랑, 어디 기사 나는 것 중요했는데, 지금은 전시를 해도 좋고, 안해도 좋고, 그런게 그다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삶에서 그런 전환점이 오는 것 같다. 
“여행이 될 수도 있고, 다른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느낌이 통하는 친구들에겐 은행을 털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페트라로 가라고 말한다. 어제 허수경의 소설 ‘박하’를 끝냈는데, 읽으면서 페트라를 생각했다. 모멘텀이 왔을 때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데, 어느 순간 삶에서 변화할 필요가 있다. 나의 경우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헐떡거렸었다. 걸작이나 경매에서 잘 팔리는 그림이 아니라 좀 더 사적으로 되는 것 같다. 전시 자체보다도 내가 만족할만한 것을 끄적거리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그림은 자신에게 무엇인가.
“그림은 엄청난 축복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루종일, 매일 할 수 있고, 그걸로 자기과시도 하고, 돈도 벌고,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행운아다.”

 

 

 

 그때 내 마음 속에 들려오는 소리… “너희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나를 찾느냐? 인간의 영광을 영원히 남기려고 튼튼한 바위산들을 깎아 천년만년 남기려했던 이들과 달리, 물질적인 흔적을 남기는 것과는 거리가 먼 예수의 흔적은 영혼의 자취에서 찾아야 하는 것을. 그래서 이스라엘이 나에겐 그다지도 답답하고 쓸쓸했나 보다. 페트라의 산을 뒤로 하고 웅장한 노을 속에 해가 지고 있었다. -‘그림 선물’(페트라,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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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화 'Forest Scenes'(2010)와 브론즈 조각 'Up and Downstairs'(2011) 앞에서. Photo: Sukie Park

 

 

☞김원숙 
 1953년 부산에서 태어나 72년 홍익대학교 재학 중 미국으로 이주 일리노이주립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76년 일리노이주립대 비주얼아트센터와 명동화랑에서 개인전을 연 후 미국, 한국, 독일, 브라질 등지에서 40여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1995년 ‘올해의 UN후원 예술가’로 선정됐다. 2004년 30년간의 작품을 모은 화집 ‘서정시의 붓 김원숙(Lyric Brush: Wonsook Kim, Paintings and Drawings 1972-2002, 혹스퍼블리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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