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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진/에피소드&오브제
2015.10.25 13:44

(125) 한혜진: 10월의 마지막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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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 오브제 (17)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용이라는 가수가 있었다.  그는 제 5공화국이 출범하던 그 시절, 꽤나 인기를 끌었었다.  그리고, 그의 노래 ‘잊혀진 계절’은 당시 최고 인기 유행가였으며, 지금도 가요무대라든지 노래방의 애창곡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나요.”라고 시작되는 가사뒤에는 “10월의 마지막 밤을”이 연이어 나오는데 그 부분에서 내가 남다른 감회에 젖는 것은 나의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17-10월마지막.jpg


*이용 - 잊혀진 계절(1982) <YouTube>



학 졸업반 시절, 논문 제출이라는 막대한 과제를 눈 앞에 두고 있던 10월말, 대통령 시해사건이라는 10-26사태를 맞이했었다.  국가적인 참담한 비극앞에서, 그 현장과 함께 했다는 신문지상에 실린 내 또래의 젊은 두여자의 뒷모습과 함께 막연하게 슬펐던 일, 그리고, 휴교로 인해서 논문 준비에 차질이 생기자 전전긍긍했던 일로 인해서 그 해 10월의 마지막 밤은 뭔가 끝장 나버린 것같은 암담한 현실감을 내게 안겨 주었었다.  


그 이후로도 10월의 마지막 밤은 나에게 무슨 고유명사처럼 다가와 지워지지 않고, 때때로 꿈에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지기는 커녕, 어느 날 오래된 상처부위가 가려워지듯이 새록새록 기억이 되살아나서 가슴을 문질러대곤 했다.  한창 인기가도를 달리던 가수 이용이 최상의 인기와 노래를 한국에 남겨둔 채 미국행을 택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오게 되었던 나도 한동안은10월의 마지막 밤일랑은 기억의 저편 어둠에 묻어 두고 살았다.  잊혀진 계절로서 말이다.



17-10월마지막2.jpg Brooklyn Heights



런데, 아이들이 킨더가든에 다니기 시작하자 10월의 마지막 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할로윈 데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유치원 교육은 생활과 밀접하다. 국경일, 기념일 등이 다가오면 이해수준에 맞게 가르치고, 즐길수 있게 도와주며, 몸으로 체험을 시킨다.  힐로윈 데이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는 무척 기다려지는 축제일이기도 하다.  ‘변신과 사탕’이라는 주제는 10월의 을씨년스런 마지막 밤을 설레임과 흥분으로 보낼 수 있게 만들어준다.  


10월에 들어서면서, 집집마다 펌프킨 장식이 늘어나고 그 주황색과 검정색의 조화가 빚어내는 할로윈이라는 환타지 속의 마귀할멈, 고깔모자, 빗자루, 고양이, 그리고 거미등에 친숙해지면서 나 또한 부지런히 아이들의 치장을 위해 색다른 의상을 만들곤 했다.  지금도 지난 사진 속에서 보면, 아이들은 때론 펌프킨 키드요, 닌자터틀이요, 꼬마 위치이기도 하고, 잠자리의 그것처럼 투명하고 가벼운 날개를 가진 천사로 남아 있다.  


까만 밤이 시작될 무렵, "TRICK OR TREAT"을 외치고 다니다 보면, 아이들은 한 쪽 어깨가 늘어질 정도로 사탕을 받아오곤 했는데, 대보름날 부럼 깨듯이, 그 날 밤은 온갖 종류의 단 것들로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사탕껍질 벗기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17-2-700.jpg

W Hotel, Union Square, NYC



이들이 크고 나니, 할로윈 데이가 싱겁게 지나간다.  우리 집에 찾아올 꼬마 손님들을 위해 쵸코렡 몇 봉지를 사다 놓았을 뿐이다. 나에겐 을씨년스럽게 지나갔던 10월의 마지막 밤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 속엔 '잊혀진 계절'처럼 지나간 나의 젊은 날의 시간이 정지되어 들어 있다. 그러나, 할로윈 데이를 통해서 무섭게, 아름답게, 코믹하게 또는 야하게 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변신과 위장 속에서 갑자기 커져버린 자신감에 주목해 본다.


그 날만큼은 크게 "TRICK OR TREAT"을 외쳐보는 거다. 온갖 속임수가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 온 우리들이 단 것 몇개로라도 보상 받고 싶어지는 날이기도 한 것이다. “난 늘 그러고 싶지 않았어. 그러나 어쩔 수 없었지. 오늘만이라도 네가 날 잘 대해주면 난 널 속이지 않겠어.” 뭐 이런 메시지가 들어 있다고 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이들의 둘러리로 나의 주변을 비껴가던 할로윈 데이가 올해는 새삼 다르게 다가온다.  오랜만에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다시 들어보고 싶다. 허공을 가르면서 빗자루를 타고 마귀할멈이 휘젓는 밤이라해도, 곧이어 나의 뺨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11월 첫날의 파란 새벽이 오는 것을  알고 있음에  이젠 어두운  밤도 두렵지 않다.



hanhyejin3-200.jpg 한혜진/수필집 '길을 묻지 않는 낙타' 저자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후 결혼, 1985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한양마트 이사로 일하면서 김정기 시인의 권유로 글쓰기와 연애를 시작, 이민 생활의 균형을 잡기위해 시와 수필을 써왔다. 2011년 뉴저지 리지필드 한양마트에 갤러리1&9을 오픈, 한인 작가들을 소개했으며, 롱아일랜드 집 안에 마련한 공방에서 쥬얼리 디자인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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