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65)
- 강익중/詩 아닌 詩(83)
- 김미경/서촌 오후 4시(13)
- 김원숙/이야기하는 붓(5)
- 김호봉/Memory(10)
- 김희자/바람의 메시지(30)
- 남광우/일할 수 있는 행복(3)
- 마종일/대나무 숲(6)
- 박준/사람과 사막(9)
- 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49)
- 연사숙/동촌의 꿈(6)
- 이수임/창가의 선인장(149)
- 이영주/뉴욕 촌뜨기의 일기(65)
- June Korea/잊혀져 갈 것들을 기억하는 방법(12)
- 한혜진/에피소드&오브제(23)
- 필 황/택시 블루스(12)
- 허병렬/은총의 교실(101)
- 홍영혜/빨간 등대(69)
- 박숙희/수다만리(66)
- 사랑방(16)
(308) 이영주: 산의 신세계, 자이언 캐년
뉴욕 촌뜨기의 일기 (46)
산의 신세계, 자이언 캐년
글: 이영주/ 사진: 이명선(Melissa Lee)
제게 최고의 산은 늘 록키 산맥이었습니다. 오래 전, 뱅쿠버에 사는 친구와 함께 갔던 록키산맥 일주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 어마어마한 크기와 높이에, 그리고 빙산과 나무와 호수가 적절하게, 혹은 술래잡기처럼 갑자기 나타나서 변주곡을 연주하는 록키의 아름다움은 여늬 산들과 비견할 수 없는 외경의 산군들이었습니다. 태고부터 뿌리를 내려 천년이 더 된 수령의 나무도 아이 키만큼 밖에 키가 자라지 않는 설산이지만, 그 웅장미와 장엄미는 실로 인간의 텍스트로는 제대로 묘사하기 어렵습니다.
지름이 1미터가 넘는 것 같고, 두께도 1미터 거의 비슷한 타이어가 수 십 개 달린 버스처럼 생긴 차를 타고 빙하산에 올라갔던 아슬아슬하고 스릴 있던 산행은 백미였습니다. 지금은 그 빙산이 녹아 관광객이 가지 못한지 꽤 되었습니다. 그 산에 올라 조금씩 흐르던 물에 손을 담갔다가 어찌나 차던지 손이 물 속에 얼어붙는 것 같아 앗! 뜨거! 하면서 재빨리 손을 뺐던 일도 기억납니다. 그런데 유타 주의 자이언 캐년을 보면서 최고의 산에 대한 저의 고정관념이 깨졌습니다.
네바다 주의 레드록 캐년을 지나 우리가 향한 곳은 유타 주의 국립공원 자이언 캐년(Zion Canyon)과 브라이스 캐년(Bryce Canyon) 입니다. 지난 2월 세도나에 갔을 때 다음엔 유타 주에 가자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몰몬교의 본거지인 유타 주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자이언 캐년입니다. 숨겨진 성소(Hidden Sanctuary)라는 뜻의 자이언(Zion) 캐년은 거대한 바위군으로 이루어져서 억만년 세월의 축적으로 무늬지고 주름진 웅장한 산의 자태가 비할 데 없이 신비롭습니다.
자이언 캐년은 동남쪽으로 흐르는 버진 강의 거센 물결이 나바호 사암을 긁어 만든 길이 15마일, 깊이 8백 미터가 넘는 거대한 협곡입니다. 산화철, 탄산칼륨, 실리카, 석회석 등으로 구성된 암반 지대가 무기질을 함유한 물줄기에 의해 협곡이 형성된 것입니다. 고대 해저 지역은 지질이 변화해 석회석이 되었고, 진흙과 찰흙은 이암과 혈암으로, 사막의 모래는 사암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랜드 캐년과 자이언 캐년, 브라이스 캐년은 이들 퇴적된 지층대가 순서로 형성된 것으로 그랜드캐년이 가장 오래 된 맏형, 자이언캐년이 다음, 가장 최근인 막내가 브라이스 캐년입니다.
라스베가스에서 차를 달려 자이언 캐년에 도착해서 내리니 코에 와 닿는 싸-한 찬 공기가 폐 속까지 전해졌습니다. 산장 레스토랑에서 산을 마주하고 앉으니 그냥 여기서 살고 싶었습니다. 거기서 자란 흑소 고기로 만든 햄버거까지 맛 또한 뉴욕에 지지 않게 수준급이었는데, 서빙하는 아가씨의 8등신 몸매와 미스 아메리카 뺨치는 미모까지 한 몫 더해 좋은 기분이 풍선처럼 팽배했습니다.
진짜 볼거리는 'Zion Mt. Carmel Highway' 구간입니다. 자이언 캐년의 산들로 이어지는 이 구간에서 자이언 캐년의 온갖 비경들을 다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층대의 변화, 바위들의 형상, 바위의 주름살과 무늬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바위의 패션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바위의 주름살이 다양합니다. 1단짜리 주름치마 뿐만 아니라 2단짜리 3단짜리 주름치마가 쉴새없이 출몰하고, 그 주름살과 함께 지어진 파티 드레스가 1단 소박한 드레스부터 3단, 심지어는 5단까지 화려한 복색을 연출하는 바람에 어지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각양각색의 웅장한 군락의 산들이 이처럼 신비한 아름다움으로 연속 상영되는 풍경은 처음 경험입니다. 그 산 가운데를 뚝 잘라서 만든 길의 대담한 용기, 그리고 산의 높낮이와 구불구불한 동선을 따라 산과 함께 흐르는 강처럼 설계된 도로들까지도 감격적인 볼거리 였습니다. 어느 구간에선 산이 눈 앞으로 다가와 마치 우리가 산을 뚫고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착각마저 선물합니다.
하이웨이 관통 중에 만나는 Zion Mt. Carmel 터널은 유타의 남서쪽과 동쪽을 연결하는 이 터널을 통해 자이언 캐년과 브라이스 캐년이 연결되고, 남쪽의 그랜드 캐년까지 연결됩니다. 그래서 지구상 최대의 관광 서클을 완성했다들 말합니다. 이 터널의 감동 포인트는 창문입니다. 멀리서 올려다 볼 땐 창문처럼 보이기에 유리 창문인가 했더니 웬걸. 거대한 바위에 거대한 직사각형 구멍을 뚫은 것입니다. 이 창을 통해 환기와 채광이 된다고 합니다. 어떻게 바위를 뚫어 그 많은 창문까지 만들었을까. 참 대단합니다.
여성적인 ‘브라이스 캐년’은 남북으로 21마일이나 길게 뻗어 있는 공원 안이 똑바로 뻗은 침엽수(Ponderosa Pine)로 이루어진 점이 독특했습니다. 그곳에 수만 개의 섬세한 첨탑을 가진 여러 개의 반원형 극장들이 존재합니다. 이 기묘한 첨탑들은 바다 밑에 있을 때 토사가 쌓여서 형성된 암석이 지방에 우뚝 솟은 후 빗줄기와 흐르는 물의 힘에 의해 다시 본래의 토사로 변했다가 비교적 단단한 암석만 침식되지 않고 남아서 무수한 첨탑이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모딜리아니의 여인상 앞에 아들이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고, 그 옆에 고양이가 앉아 있다든지, 피카소의 여인 초상화 얼굴, 클림트의 그림 ‘키스’에 나오는 여인, 정말 키스하는 연인들, 등등 이름 붙이면 무엇이라도 되는 첨탑들의 모습이 너무나 인간적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입맞춤하는 연인들 모습이 가장 많아서 저는 “여긴 바다에 있던 사랑의 왕국이 땅에 솟아 올라온 거야. 그러니 사랑의 왕국 유적인 거지.” 하며 일행들을 웃겼습니다. 그래도 어떤 지인이 이 기기묘묘한 첨탑들을 보면서 “인디언들이 이 많은 걸 언제 다 만들었지?” 했다는 일화 보다는 수준 있지 않습니까?
유타 주는 산의 신세계였습니다. 감동, 감동, 그리고 또 감동 그 자체 였습니다. 산의 억겹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위대한 자연의 모습은 우리를 압도하고, 다시 한번 생의 의미를 곱씹게 해주었습니다. 이런 자연을 통해 우리는 치유 받고, 다시 생명을 느끼고,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착하게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도 은연중에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이 주는 축복일 듯싶습니다. 또한 자연을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불의 계곡 암각화 옆에는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새로 만들어놓은 낙서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으로 보면서 역사와 자연을 훼손하는 사람들에게 불의 심판을 내리고 싶었던 것은 비단 저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이영주/수필가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에세이스트 미국동부지회' 회장이며 뉴욕 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다. '허드슨 문화클럽' 대표로, 뉴저지에서 '수필교실'과 '북클럽'도 운영하고 있다.
이명선 Melissa Lee/freelancer RISD(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대학원 미술교육학 전공, 사진 부전공. 항상 사진을 찍고 싶은 욕망과 사진을 찍으면서 무심코 지날 수 있는 사물과 풍경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