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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이영주: 앤털롭 캐년의 빛
뉴욕 촌뜨기의 일기 (42)
앤털롭 캐년의 빛
글: 이영주 사진: 이명선/Melissa Lee
Antelope Canyon Photo: Melissa Lee
‘세도나’부터 ‘앤털롭 캐년’으로 유명한 아리조나의 작은 동네 ‘페이지(Page)’까지 가는 길은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의 줄기입니다. 모뉴먼트 밸리는 미국 애리조나 주 북동부와 유타 주 남동부에 걸쳐 있는 나바호 인디언 보호 구역(Navajo Indian Reservation) 내에 있는 공원을 칭합니다. 정식 명칭은 ‘모뉴먼트 밸리 나바호 부족 공원(Monument Valley Navajo Tribal park)’입니다. 광활한 대평원에 뷰트(Butte), 메사(Mesa) 라고 불리는 고립된 붉은 거대한 암석기둥과 절벽이 펼쳐주는 장관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황홀한 길입니다. 5천만년에 걸친 세월동안 비바람에 깎여 형성되었다는 메사는 붉은 색을 띠는 사암을 말하며, 뷰트는 메사가 침식되어 작아진 것이라고 합니다. 메사가 산봉우리 같다면 뷰트는 탑처럼 사막 한 가운데 우뚝 서 있습니다. 가는 중간에 마치 돌무덤 같은 둥근 돌산이 띄엄띄엄 서 있는 모습을 만났습니다. 문득 한국 강원도 오크밸리의 ‘뮤지엄 산’에 있는 안도 다다오가 만든 돌무덤이 떠올랐습니다. 안도 다다오가 우리나라 각 도를 상징해서 만들었다는 돌무덤이었습니다. 그 돌무덤은 아마도 이 모뉴먼트 밸리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 같습니다.
페이지 시내서 아주 가까운 ‘홀스슈 벤드(Horseshoe Bend)’는 차를 파킹하고 약 15분쯤 걸어갑니다. 약간의 내리막 모래길입니다. 길이 끝나면 바닥이 마치 켜켜이 쌓아 놓은 책장처럼 얇은 켜로 만들어진 독특한 돌바닥으로 바뀝니다. 그 끝 절벽에 서면 눈 앞에 청록빛 강을 발밑에 깔고 말발굽 모양을 한 웅장한 바위가 협곡 한 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바로 홀스슈 벤드 입니다. 페이지에 흐르는 콜로라도 강이 캐년을 휘감아 돌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300미터나 되는 낭떠러지라서 벼랑 끝에 서면 현기증이 날 정도 입니다. 사진작가인 멀리사는 홀스슈 벤드를 손가락으로 누르기도 하고, 발을 얹기도 하는 등, 장난스런 포즈로 작품 사진을 찍으며 감동을 삭이고 있었습니다.
Horseshoe Bend Photo: Melissa Lee
‘앤털롭 캐년(Antelope Canyon)’이 개발된 것은 불과 십 여 년 전이라고 합니다. 시간마다 달라지는 빛에 따라 그 색과 형상이 변화되는 사암동굴은 처음엔 사진작가들의 성지로만 알려졌던 곳입니다. 캐년은 물줄기를 따라서 상류인 어퍼(Upper)와 하류인 로워(Lower)로 나뉘어 있는데, 저희가 간 곳은 어퍼 앤털롭 캐년이었습니다.
앤털롭 캐년은 인디언 자치구역에 있으므로 가이드가 모두 인디언입니다. 입구인 좁은 협곡 슬랫 캐년(Slat canyon)까지 약 3마일의 구간은 가이드가 운전하는 사륜구동차로 이동합니다. 그 길은 앤털롭 크릭의 강바닥으로 부드러운 붉은 모래바닥인데, 비가 오면 강물이 흘러들어와 진흙탕이 되므로 보통 자동차는 다닐 수가 없고, 몸체를 높인 사륜구동 차로만 이동이 가능한 것입니다.
캐년에 들어서자 가이드는 적절한 카메라 노출을 직접 시범하며 보여줬습니다. 어느 각도에서 찍어야 최고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 한 겹 들어갈 때마다 설명해 주는 바람에 저같은 아마튜어도 인생작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제일 빛이 잘 드는 계절은 6월이라는 것, 시간은 11시에서 정오 사이, 카메라는 삼성전화기가 최고라는 설명을 여장부 스타일의 가이드가 웃지도 않고 명령조로 말하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습니다.
Antelope Canyon Photo: Melissa Lee
로워 캐년은 땅 밑으로 소용돌이치는 모양으로 둥글게 깎여 있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로워 탐사가 그 소용돌이치는 좁은 계곡을 계속 내려가야 하는 비경이라면, 어퍼는 사암 고원지대 표면이 갈라지며 균열이 생기면서 비가 오면 그 사이로 물이 스며들어 침식되며 생긴 골짜기가 세월이 흐르면서 좁은 협곡으로 변한 것입니다. 입구에서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바닥이 비교적 넓은 평평한 붉은 모래밭입니다. 그러나 위로는 20미터부터 높게는 36미터나 되는 나바호 사암 절벽이 좌우로 기하학적이고 기기묘묘하게 물결치듯 연결되면서 위에서 빛이 아주 조그만 틈으로 들어와도 상상을 뛰어넘는 신비한 형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빛에 따라, 때로는 앞발을 들고 서 있는 검은 곰 혹은 거북 같은 동물의 형태, 초대 대통령 위싱턴이나 링컨 대통령 닮은 인간의 두상, 혹은 용의 눈, 거대한 하트까지도 자유자재로 보여줍니다. 멀리사는 “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하며 숨도 안 쉬고 카메라를 눌러댔습니다.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시집살이라는 시련에 부딪쳤을 때, 마당에 나가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럴 때면 왜 하늘마저 회색빛이던지요. 그래서 하늘을 원망하면서 뚫어져라 응시하다 보면 어느 귀퉁이에선가 실낱같은 빛이 그래도 한 줄기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기쁜지 저는 그 빛을 발견할 때마다 “아, 하느님은 이렇게 내게 빛을 주시며 희망을 가르쳐주시는 구나.”, 자위하며 새로이 자신을 추스르곤 했던 기억입니다. 신의 조각품 사이로 바늘구멍만한 틈새로 들어오는 빛의 신비한 향연 속에서 솟아오르는 희열은 모르는 사이 하느님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끊임없이 그분과 소통이 이루어졌습니다. 참 이상한 노릇입니다. 산에 갈 때마다 산에서도 그랬습니다. 자연의 신비는 늘 이렇게 신앙의 신비와 조우하며 우리를 행복하게 해줍니다.
지금은 사순절입니다. 제게 사순절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한 해의 중요한 시간입니다. 이 중요한 시간을 준비하기 위해 하느님은 무엇을 원하시기에 세도나를 가게 하고, 앤털롭 캐년을 가게 하신 것인지 묵상 중입니다. 모뉴먼트 밸리에서 느낀 신의 위대한 손, 세도나의 성십자가 성당에서 느낀 뭉클한 기운, 앤털롭 캐년에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마술을 부리던 빛, 자연의 신비가 만들어주던 강력한 자장. 이들은 여행 내내 심장의 박동을 격렬하게 연주해 주었고, 신령한 기운으로 전신에 전자파를 쉴 새 없이 쏘아댔습니다. 이 알 수 없는 기운의 한 가운데 숨겨있는 그분의 메시지를 찾아내는 일이 아마도 금년 사순절의 제 숙제인 것 같습니다.
이영주/수필가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에세이스트 미국동부지회' 회장이며 뉴욕 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다. '허드슨 문화클럽' 대표로, 뉴저지에서 '수필교실'과 '북클럽'도 운영하고 있다.
이명선 Melissa Lee/freelancer RISD(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대학원 미술교육학 전공, 사진 부전공. 항상 사진을 찍고 싶은 욕망과 사진을 찍으면서 무심코 지날 수 있는 사물과 풍경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