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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스테파니 S. 리: 팬지와 세 여인
흔들리며 피는 꽃 (29) 햄턴 가는 길
팬지와 세 여인
Tough Smile, Stephanie S. Lee, 2015, Color and gold pigment, ink on Korean mulberry paper, 5.5” (w) x 7.5” (H)
평소에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해 만나지 못했던 지인 세분과 드디어 날을 잡고 롱아일랜드 브릿지햄튼 뮤지엄에서 열리는 아트페어 'Market Art + Design'에 가보기로 했다.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지만 나이 차이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열려있는 분들이라 만나면 늘 즐겁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딸뻘인 내가 함께 놀자하니 좋아하시기도 하지만 의아해 하시기도 하는 눈치들이시다.
나는 나이를 떠나서 무언가 배울점이 있는 교류가 좋다. 나이를 권위삼아 교양없이 구는 사람을 참고 봐 줄 성격도 못되고,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무시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하는지라 사람간의 교제에 연령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연령과 인품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세월을 잘 겪어낸 사람들의 내공은 나이와 비례하는 듯 해서 이왕이면 나보다 인생을 먼저 살아본 사람들과의 만남이 더 좋다.
살다보면 ‘사람의 마음은 다 똑같다’고 생각하기에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은 먹고 자고 배설하는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사람의 됨됨이’가 아닌 부수적인 이유로 인해 주눅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좋게 말하면 그렇지만… 어쩌면 나는 제멋대로이고 버릇이 없는걸지도 모르겠다. 어느 시점부턴가 생산성 없이 겉도는 이야기나 본인 자랑 들어주느라 내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좋아하는 세 분을 모시고 어설픈 솜씨로나마 브런치를 차려내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세 분을 잘 알지만, 세 분은 서로 자주 본 사이가 아니라 어색할 법 한데도 예술가라는 공통분모와 여성으로서 동시대를 살아온 연륜으로 능숙하게 잘 어울리신다.
꽃들이 제각각 저마다의 순서에 온 힘을 다해 얼마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지, 나무들은 어떻게 제 몸을 휘어가면서도 서로에게 자리를 내주며 성장하는지, 한해 꽃들이 죽었다 싶으면 얼마나 신기하게 이듬해 다른 꽃들이 그 자리를 채워주는지, 식물들은 어쩌면 그렇게 한평생 해만을 바라보며 제갈 길을 가는지…
“그래, 그래, 맞아요!” 공감하며 이야기가 이어진다.
지나온 세월들이 결코 꽃길이 아니었겠지만 그녀들은 삶으로부터 터득한 인생의 지혜를 그렇게 꽃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Market art + Design 2017
간단히 요기를 마치고 햄튼으로 떠나려는데 하늘에서 구멍이 난듯 폭우가 쏟아졌다. 어렵게 모였는데 그래도 가보자 싶어 빗길을 운전해 가는데 퍼붓는 빗속에서 방정맞게 움직이던 와이퍼가 그만 엉켜버렸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난생 처음 발목까지 물이 찬 고속도로에 떡하니 차를 세웠다. 속옷까지 다 젖어가며 겨우 와이퍼를 분리했지만 이미 고장난 와이퍼는 제대로 작동이 되질 않아 기다시피 오던길을 되돌아 동네로 돌아왔다.
그래도 왠지 이대로 포기하긴 아쉬워 집 근처 정비소에 갔더니 아예 와이퍼를 통째로 바꿔야 하는데 부품이 없단다. 이제 정말 포기하고 다시 집에 가야 하나… 하다, 혹시나 싶어 한군데 더 들렀더니 똑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별일이 다 있네, 정말 오늘은 어디 가지 말라는 말인가보다…’ 마음을 접으려다 문득 운전석 와이퍼 하나만 살려도 어떻게든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조수석 와이퍼를 아예 떼달라고 하고 작동시켜보니 다행히 운전석 와이퍼가 정상적으로 작동을 했다.
멀리서 일부러 시간을 내 전시 티켓까지 프린트해왔는데 쏟아지는 빗속에 차까지 고장나 못가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면 황당하고 짜증날 법도 한데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 한분은 용감하게 차에서 내려 함께 비를 맞으며 엉킨 와이퍼를 빼내주시고, 한분은 조수석에 앉아 정비소며 햄튼가는 길이며 척척 안내해주시고, 한분은 말없이 손수건을 꺼내 빗물을 닦아주신다. 다들 아무일도 아닌듯 대처하는 모습에 나도 평정을 찾고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햄튼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Market art + Design 2017
반쪽짜리 와이퍼에 의지해 빗속을 두시간 남짓 운전해 가는 동안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여인들의 삶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지난 세월, 강하지만 휘어질 줄 알았고,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은 물살에 흘려 보내며 깎이고 깎여 차돌처럼 동그랗고 단단해졌으며, 그시절 여인으로 사는동안 마주했던 모든 부당함들을 견디기도, 용기있게 벗어나기도 하며 자기개발로 승화시켰던 이야기들을 들으며 시간 가는줄 몰랐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저마다의 인생 속 역경들을 소화시켜 그것을 자양분삼아 성장했다.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지 않았고, 타인의 불행을 동력으로 삼는 대신, 스스로의 불행을 썩히지 않고 발효시켜, 그것을 긍휼과 감사의 마음으로 끌어안아 예술로 풀어냈다. 전시장에서 본 어떤 작품들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세 여인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추운 겨울 눈 속에 파뭍혀도 죽지 않고 꽃을 피우던 예전 집의 팬지가 생각났다.
팬지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인데다가 한해살이꽃이라고 써있어서 한번도 산 적이 없는데 엄마가 계시는 동안 사다 심어놓으셔서 키워보니 시시하게 여겼던 이 꽃의 생명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뉴욕의 눈보라에도 겨우내 꽃이 지지 않더니만 놀랍게도 그 이듬해 번식해서 드문드문 한 송이씩 꽃을 피웠다. 하얀 눈 속에 노랑과 진보라가 섞인 키작은 팬지가 웃고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 모습이 왠지 세월을 견뎌낸 여인들의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쉽지 않았던 지난 날들을 담담하게 이야기 하며 불행했던 순간마저 감사함으로 껴안은 세 여인들의 모습이 꼭 눈 속에서 웃고 있던 그때 그 팬지꽃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가는 길은 그렇게 험하더니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 그랬냐는듯 반짝 해가 난다. 세월속 풍랑을 다 겪어낸 내공있는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다. 비록 지나온 길은 꽃길이 아니었을지 모르나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품은 그녀들의 앞길은 이렇게 아무일 없었다는듯 밝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