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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일/대나무 숲
2014.08.14 21:30
(40) 마종일: 내가 처음 본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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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숲 (4)
보름달 III
새로운 것을 취득하는 전율감
마치 밤하늘의 잔 별처럼 이곳 저곳에서 아직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마치 어두운 밤 창문으로 천천히 살며시 들어오는 새벽빛처럼 나의 의식 속으로 희미하게 감지되고 있었다. 그 중 어떤 것이 내가 먼저취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을 헤아릴 수 있는 지를 아는 것은 고민과 숙제의 두 가지 모두였다.
Jongil Ma, Installation, 2012
그때는 어쩌면 내가 변환기적 삶을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파르게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와 같은 삶이었는지도. 피할수 없는 길이었다. 거역했다. 그 것은 좁게는 나와 가까운 또는 넓게는 한국사회 전체가 대상이었을 것이다. 보다 못한 두 사람의 후원으로 뉴욕에 가는 비자를 받아 96년 2월에 도착했다. 내가 글을 쓰는 이 시간까지 내가 내 자신의 삶에 대해 탐험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순전히 이 두 분의 역할이라고 밝힌다. 중요한 계기마다 물적 정신적 후원을 통해 내가 아직도 서 있을 수 있게 해준 은인들임을 이 기회를 통해 밝히고 싶다.
당시 뉴욕에는 눈이 지독하게 많이 내린 후 여기저기 공터에 산처럼 쌓여있었다. 나는 퀸즈 서니사이드 두 평의 방에- 아마도 부엌을 개조한- 안착했다. 그 기나긴 부정과 거스름을 거듭한 끝에 그래서 그 임시적 삶의 시간을 마감하고, 마침내 나는 새로운 인생을 위해 그곳을 떠나 왔던 것. 산을 오르기 시작한 후 시간이 지나면서 몸이 차츰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꽤 무겁게 느꼈던 배낭의 무게는 이내 나 자신 몸의 한 부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별도의 무게를 차츰 잊어가면서 이내 옛날의 이야기들은 나의 몸과 마음에서 연기처럼 사라져가고 있었다.
정상 평평한 곳에 돌로 둥그렇게 쌓여진 캠프파이어 장소가 있었다. 바로 그 옆 잔디가 제법 두텁게 깔려있는 곳에 텐트를 치자 마자 브라이언은 그날 저녁 필요없는 음식을 싸서 자루에 넣은 후 텐트에서 3, 4 미터 떨어진 나무 높은 곳에 매달았다. 곰에게 굳이 엉뚱한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곰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일으켜 좋을 만 한 일은 없었기에.
한국에서는 한번도 걱정해 본적 없던 곰. 그 ‘미련하다는 곰’이 이승에서 어떻게든 인간답게 살아 보겠다고 허우적거리며 때마침 신세계에서 새로운 인생을 막 시작한 나를 단번에 저승의 신세로 바꿀 수 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이 미칠 쯤 나는 최대한의 마른 나무가지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결코 그 어떤 ‘미련한 곰’ 도 나의 운명을 쉽게 바꾸지 못하도록. 지금 나의 사활의 위치 전환을 할 수 없게 \하겠다는 다짐으로. 저 깊고 깊은 한반도 서남쪽 끝 산골의 나무꾼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나는 순식간에 커다란 통나무를 포함, 캠프파이어 장소 옆에 잔가지를 산처럼 쌓아 놓았다.
이곳은 그 유명한 문화의 역사적 현장 캣스킬 마운틴. 아직도 여기저기 뿔뿔히 흩어져 살고있는 그 후예들은 자본주의 복음에 조용히 대항하며 자신들이 꿈꾸는 삶을 지켜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보곤 한다. 직접적인 현장인 이 지역에도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아담한 한국의 면소재지 사이즈인 우드스탁 타운을 가꾸고 있다. 면 소재지 크기이지만 그 안에 자리잡고 있는 다양한 문화들이 웬만한 큰 도시의 것과 뒤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다. 잠깐 버스 안에서였지만 뉴욕에 온 이후 처음으로 보았던 그 타운, 그리고 주위의 자연들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줄곧 시내에서 이제 접하기 시작한 예술세계와 분명 다른 차분함과 여유와 아름다운 모습에 나의 흥분을 불러 내고 있었다.
당시 맨하탄 이스트빌리지에 나의 조그마한 스튜디오 아파트에서는 이와 판이하게 또 다른 이 사회의 외연에서부터 차츰 내연으로의 탐닉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내가 어린시절 60년대, 그 이전 또는 이후 산업화에 따른 자본주의의 심화 현상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기본적 바탕을 잃지 않으려했던 기록들. 가장 기본적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그 정신적 활동은 학문 분야, 문학, 미술, 음악 그리고 영화 등에서 마치 전쟁같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더듬거리고 있었다. 반드시 그 창의적이고 투쟁적인 면면이 아니더라도 팝 대중문화를 지배하던 한국에서 자란 내가 만지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은 정말 많았다.
마치 밤하늘의 잔 별처럼 이곳 저곳에서 아직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마치 어두운 밤 창문으로 천천히 살며시 들어오는 새벽빛처럼 나의 의식 속으로 희미하게 감지되고 있었다. 그 중 어떤 것이 내가 먼저 취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을 헤아릴 수 있는 지를 아는 것은 고민과 숙제의 두 가지 모두였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얘기하라. 아주 쉬운 명제이다. 살다 보면 쉬운 명제들을 받아 들이는 것이 천리길 돌아가는 심정 같을 때가 많이 있음을 부정하지 못하겠다.
나의 아지트에서는 또래의 막 예술에 대한 탐험을 시작한 몇몇이 모여 그 어렵고도 쉬운 명제를 가지고 엎치락뒤치락 거리고 있었다. 미묘한 대화방식, 줄다리기가 있었다. 그 누구도 짧은 밑천을 드러내 보이고 싶지않은 자존심으로. 행간에서 알아내야 하는 줄타기라면 맞는 말일까. 나는 너무 솔직해서 나이가 제일 많음에도 불구하고 좀 희화화된 위치에 있을 때가 가끔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하나의 새로운 것을 취득하는 것은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또한 나의 그 어린 친구들도 대부분의 시간에 나의 열정을 존중하려는 자세를 취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몇은 수시로 우리들의 그 조그마한 스튜디오에 모여 간단한 음료 안주를 가지며 주말 밤이나 휴일을 꼬박 세우는 열정을 나누던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들은 내가 예술을 공부하면서 크게 세 가지의 접근 방식 중 그 하나로서 매우 생산적 시간이었음 말하고 싶다. 더더구나 그 몇몇은 각자 아주 독특한 문화적 배경, 각기 아주 다른 나이 층이 있어서 더욱 흥미로운 화제들이 연발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마종일/작가
1961년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나 덕수상고 졸업. 대우 중공업을 거쳐 한겨레 신문사 감사실에서 일하다 1991년 퇴사한 후 박재동 화백 소개로 그의 후배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다. 1996년 뉴욕으로 이주 스쿨오브비주얼아트를 졸업했다. 이후 2006 광주미술관 레지던시 작가, 2008 소크라테스 조각공원 신임미술가로 선정되었으며, 2009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2010 폴란드 로츠(Lodz) 비엔날레에 초청됐다. 2010 LMCC 거버너스아일랜드, 2011 랜달스아일랜드, 롱아일랜드 이슬립미술관, 브롱스 미술관 전시에 참가했다. 2008 알(AHL)재단 공모전에 당선됐으며, 2012 폴락크래스너 그랜트를 받았다. http://www.majong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