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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김희자: 잃어버린 키를 찾아서
바람의 메시지 (27) "Say NO"
잃어버린 키를 찾아서
Wheiza Kim, Coming across with Self, indescribable, 80x 36", Acrylic on shaped canvas, 1989
한동안 TV에서 많이 접하던 #MeToo 해시태그 프로젝트에 오르내리는 여성들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이 오갔다. 얼마나 마음이 상한체 오랜 세월을 가슴앓이로 고통스레 지냈기에 자존감을 회복하기위해 세상 사람의 눈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부끄러웠을 과거를 세상에 까발릴 수가 있을까 싶다. 참으로 대단한 여성들이다. 한마리 암닭 정도의 취급을 받으면서 인간으로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 보겠다고 자존의 알을 품고서 온갖 모멸을 참으며 살아왔을 거다. 어떤이는 포기해버렸을 테고, 어떤 여인들은 그 알을 자기애로 품어 드디어는 부화시키고는 마치 새벽 닭들처럼 새 날을 위해 목청을 높히고 있다.
오랜 페미니즘의 이슈 중에 깊은 상흔을 남기는 성농락의 문제가 가장 지울 수 없는 모멸감으로 남는다 한다. 아마도 그 잔 뿌리는 여성의 영혼과 삶 전체에 실핏줄처럼 감싸고 있기 때문일 꺼다. 페미니즘 운동으로 열려진듯 보이지만 완전히 열어 제껴지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 그 뚜껑의 접속 부분까지를 완전히 해체시켜 다시는 덮을 수 없도록 하겠다는 기세다. 피상적인 자존심이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의 존재적 자존감을 지키고자 나선 그 여전사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소위 유명하다고 불리는 연예인 그룹이 앞장을 서고 있지만, 많은 지성녀들이 동참을 하며 벌써 수십만명이 그 프로젝트에 싸인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을 통해 성 이슈만으로가 아닌 진정한 페미니즘이 완성되어 인간으로의 자존감을 획득하여서 모든 여성들이 행복해지길 비는 마음이다.
세상의 모든 여인들에겐 누구에게도 열어 보이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다고들 한다. 그러기에 그녀들의 일생은 한권의 소설이라고들 말한다. 물론 남성들에게도 그들이 흔히 말하는 "Everyone Has a Skeleton in Their Closet."이란 속언이 있다. 그것은 욕망을 위해 저지른 어떤 범죄적인 증거를 숨김이겠지만, 여성의 경우는 대부분 피해자로서의 수치심, 또는 상대의 체면을 위해, 혹은 모성 때문에, 가족들 때문에, 가슴 깊이 묻어 운명이라 여기며 죽음까지 가져가려는 비밀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남자들은 그들의 동물성과 힘으로 획득되어진 기득권과 그것을 지키기위한 모든 계락과 음모들이 묵과되어왔다.
그러나, 그 그늘 아래 눌려서 몸과 마음이 멍든 여성들이 드디어 용기를 내어 복수의 칼을 뽑고 나선 것이리라. 아마도 많은 여성들은 사랑없는 부부간의 성관계에도 #MeToo 태그를 달아야한다며 진담어린 농담들을 한다. 운동의 불길이 거세지고 미국뿐 아닌 유럽에까지 번지고 있다 한다. 심지어는 유교 사회인 일본에도 그 불씨가 떨어졌다는 뉴스를 접하는데, 유행이라면 제일먼저 취하는 한국 여성들로부터는 아직 접해지는 뉴스가 없다. 비록 이 나라에 이민와서 여기 문화에 속해서 살고 있음에도 한국의 여인들에겐 있을수 없는 금기일지도 모르겠다.
Wheiza Kim, Retrospection, 49"x17"x3", Acrylic on wood, mirrors, 2015
얼마 전에 우연히 읽게됐던 60년대 미국의 여자 시인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가 현재 일어나는 운동을 보면 어떠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30대에 부엌의 가스오븐에 머리와 상체를 넣은 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실비아 플라스의 자전적 소설 <벨자(The Bell Jar)>에서 생활고와 우울증에 시달리며 살았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수없이 많은 남자들은 쾌락으로 생긴 아이에 대한 의무감을 방기한다. 그러나 모성의 굴레를 벗어 던지지 못하는 숙명적인 여자로써 아이를 키우면서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생의 톱니바퀴에 끼여 마치 고기 그라인더에 갈리는듯 비통하게 하든 소설이었다. 가난은 배고픔만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을 짓뭉개며, 영혼의 자유조차도 빼앗아가 버린다는 사실이다. 시인으로의 자존감이 지켜지지 않는 절망을 한때 나도 겪은 바가 있기에 너무도 절감했다.
결국은 혐오스럽고도 충격적인 모습으로 발견된 그녀의 마지막 모습. 그녀는 남자들의 책임을 방기할 수 있는 사회적, 육체적 자유를 죽이고 싶도록 부러워했다. 모성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당하는 생활고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생의 끈을 잘라버린 소위 천재라 불리던 한 여류작가의 생을 떠올리며 가슴이 저렸다. 내 주변의 결혼한 여성 작가들과 대화를 해보면 결혼이란 창의성 말살과 자유의 무덤이라고밖에 결론 짓지 못한다. 여자는 나약하기에 절대적으로 보호자가 필요한 것이라는 부모들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결혼이라는 감옥 속에 갖혀 모두가 허덕댄다. 그리고 남자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것은 판타지일 뿐, 살아내기위해 싱글 때보다 몇배로 몸과 마음이 더 강인해져야 하는 온갖 모순 덩어리에 짓눌리며 죽은 건지 산 건지를 분별할수 없는 생활고를 유지하며 헐떡인다.
여자로 태어난 것은 숙명(宿命)이라는 글자는 잘 숙(宿)자를 쓰며 잠든 사이 피할 수도 없이 생명에 깃드는 것이라 해석한다. 그러나, 여자로 살아가는 것은 운명(運命)이다. 운명의 뜻이 움직여 나간다는 운(運)자를 쓰는 것은 삶을 선택하고 운행해 나가는 것이라, 운명은 순간과 상황을 선택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헤쳐나갈 수 있다는 정의를 한다. 많은 여성작가들이 실비아 플라스 못지않은 숙명적 조건 위에서 어쩔수 없이 받은 불평등으로부터,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운명의 길을 깨닫고 터닝을 시도한다. 나 역시 그랬기에 날더러 용감하다고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선택했으나 벗어나지 못하는 또 다른 운명의 굴레 속에 빠진 나를 발견한다.
보편적인 백인들의 사회, 서양문화 우월의 선입견과 저희들의 전통적 생활 관습과 외국어라는 맨홀에 빠지거나 벽에 부딪힌다. 동양인보다도 백배 더한 체면을 위해 교활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 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산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리 오래 전에 이민을 와서 직장과 가족을 가지고 있어도 공공연히 너는 언제 너희 나라로 돌아갈거냐고 개념없는 질문을 받는 것에 친구들은 이젠 화도 나지 않고, 차가운 분노만 쌓인다고 한다. 나 또한 무의식적으로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나라에 살고있다라는 불안과 갈등을 한다.
소위 문화적 리더들이야 '멜팅 팟(Melting Pot)'이네, '사라다 볼(Salad Bowl)'이니 하며 합리성을 찾아 내려고 노력을 한다. 그러나, 아직도 오리엔탈리즘의 선입견을 지우지 못한체 아시아인들을 대한다. 보통 사람들은 버터발린 립서비스 일색에, 부모관계나 부부관계에서도 계약서가 더 중요한 경우에 당하면 돌아버릴 것 같다. 이 사회의 조건이라 받아들이면 간단한 것을 폭발 직전에 뚜껑을 닫곤 하니 분노조절 불능이 만드는 스트레스성 병까지생긴다. 남을 증오하는 것은 자기가 독을 마시고선, 상대가 죽기를 기다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배운지라, 마음 달래려 억지를 쓴다.
주변에 나이들어가는 언니뻘의 사람들을 유심히 보며, 건강하게 하고픈 일을하며 살아갈 수 있는 날들이 나에게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진리에 이마가 부딪히며 불쑥 정신이 든다. 내 밖의 무엇들과 갈등하느라 죽이며 살기를 접고, 내가 가장 가치롭게 이루고 싶었던 꿈은 무엇이었는지를 생에 마지막으로 점검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나를 급하고 초조하게 만든다. 두어해 전부터 싸이코 테라피스트를 만나 미국 생활에서 쌓인 갈등들을 대화하며, 도움을 받아봐야겠다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뤄왔다.
내가 불혹의 나이에 들었을때, 나를 잃어버려 방황했을 때 심리상담을 하여 삶의 새 고삐를 잡을수 있었던 좋은 기억이 있다. 그러한 상담 역할은 친구나 책 속의 멘토도, 종교적 독트린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 그러나 테라피스트는 의식을 유도 분만시키는 산파와 같아서 마음 속에 잉태된 문제의 덩어리를 다소의 진통이야 당연지사이지만 결국에는 잘 해산시키더라는 경험이 있다. 내가 30대부터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멘토로 니체의 Amor Fati(love of fate, 운명을 사랑함)라는 나무를 심고, 그 나무를 잘 키우기로 결심하며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라는 도덕 시간의 격언을 실천하며 오로지 인내만으로 살았었다. 여성으로의 숙명인 어미로, 마누라로, 며느리로, 거기에 브레드위너로의 역할과 목표가 확실했기에 기꺼이 참아낼 수 있었었다. 힘든 고난의 세월 속에 고통이라는 거름으로 자라는 그 나무는 참으로 튼튼하게 잘 자라주었다. 그 나무는 큰 결실을 맺고서 내 자존심을 충족시킬 만큼 늠름하게 크고 굵은 열매가 매달렸었다. 모두가 부러워하고, 나 자신도 나눔을 위해 늘 분주했다.
Wheiza Kim, Under Silence, 72"x21"x3", Acrylic on wood, mirrors, 2014
그러나, 내 가슴 속에 밀려드는 공허함의 바람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게 내 가슴을 시리게 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 무엇이 더 필요한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남과의 우월 비교를 통한 자존심은 채워졌을지 모르나, 존재적 자존감인 진정한 영혼이 텅비어 있었다. 공허와 무의미로 휘청거리는 나에게 한 친구가 매우 진실하고, 탁월한 심리상담자를 소개해주었다.두어달 일주일에 3번씩 나의 모든 억울분통한 20여년의 삶을 오열하듯 토해내었다. 그 상담자는 흔들림도 없고, 말도 없이 듣고서 메모만 하고 있었다. 매우 비싼 돈을 내며 두달이 가까워 오도록 상담 선생은 당장 도움이 될만한 어떤 말도 건내주지 않았었다.
할 일도 많고 바빠서 시간을 내기도 참으로 어려운데, 어째서 당장 도움이 될 얘기를 해주지 않느냐고 상담자에게 불평을 하기시작했다. 드디어 그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당신이 당하고 있다는 그 모든 억울함은 당신이 유능하기 때문에 모두에게 희생이라 여기며 한 행위 때문이며, 무의식적이지만 선행을 함으로서 얻는 이기적 만족에 기반을 하고 있다. 뒤짚어 생각해 보면, 당신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임을 알아 차려야만 한다"는 거다. 지금 이곳을 나가는 순간부터 어떤 상황을 만날 지라도 어떤 필연적인 것이 아니거던 "say NO!!"를 가슴에 품고 실행에 옮겨보라는거다. 그것이 키라고 했다.
도대체 무슨 선문답같은 소리인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그동안 지긋 지긋하게 희생과 봉사로 살은 이유가 내탓이라니 무슨 부처님의 인과응보를 설법하는 것인가 했다. 내가 가해자라니 억울하고 기가 막혀서 눈물이 폭포처럼 흘렀었다. "그들의 인생이 당신이 양보하고 내준 자리에 모두 올라와 있어 당신은 설 자리를 잃었다"는 거다.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싶다면 그들의 요구를 내칠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한다"였다. 그리고 그들의 의짓대가 됨으로 해서 그들의 자립심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앞으로 점점 더 당신에게 기대게될 꺼다. 아이들 키우기, 시집식구들과의 관계나 남편, 모든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오랜 교육으로 길들여진 현모양처의 신드롬을 내려놓고 해결사 노릇을 버리라는 거였다.
상황에 따라 No, No, No를 실천하는게 매우 어려웠지만, 그것을 통해 나를 어떤 순간마다 비쳐볼 수 있게 되고 서서히 나 자신의 여백을 확보할 수 있게 되면서, 나쁜 마누라, 나쁜 엄마, 나쁜 며느리, 나쁜 형제나 올케가 되어 나는 내 삶을 회복해 갈수 있었다. 그리고 내 생의 가장 큰 가치이며 꿈이었던 작품 활동에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게 되었다. 드디어 비어있던 참나인 자존감이 채워지면서,무관한 일에 나서지 않고 하심이 저절로 되며 내 생의 주인이 될 첫번째 문을 열수있는 키를 준 상담자에게 늘 고마웠다.
그러나, 미국으로 온 이후 그 키를 잃어버렸다. 아닌 것을 아니라 할수 있는 저항의 힘이 되어주던 Say No는 내 속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아마도 나를 돌아볼 틈도 없이 위기감뿐인 자갈 길 어딘가에 알지 못한 채 떨어트린거 같다. 이제는 늙어간다는 강박증과 함께 세상이 너무도 빠르고 거세게 변해가고 있어서 그 키를 찾은들 맞을 리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4차 문명혁명 운운하며 세상이 돌변하듯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인간이 주인인 세상이니, 어쩌면 Say No 같은 지혜의 키를 찾아 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는다. 새해를 맞아 미국생활에서 엉클어진 내 고유한 가치를 되돌아보고, 정리를 하여서 남은 삶을 후회없이 보내기위해 새 키를 찾아 나서야겠다.
김희자 Wheiza Kim/화가
이화여고 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한 후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다. 결혼 후 10여년 동안 붓을 꺾고 있다가, 30대 중반을 넘기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작업을 시도하기 위해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했다. 1997년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SUNY) 방문 초청작가로 와서 한국현대미술을 가르쳤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국전을 시작으로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100 여회의 그룹전과 22회의 개인전을 열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현재 롱아일랜드 끝자락 노스포크 사운드에 거주하며, 자연과 더불어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