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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김미경: 그림 그리길 허하라!!!
서촌 오후 4시 (3)
그림 그리길 허하라!!!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왜요?”
“화단 새싹을 의자로 밟고 있지 않습니까?”
“어휴. 죄송죄송!!”
“그렇게 의자만 옮긴다고 되는 게 아니라요. 여기서 그림 그리시면 안 된다구요.”
“네? 여기서 그림을 그리면 안 된다고요? 왜요?”
“여기는 보안 지역입니다.”
“보안 지역이요? 저는 청와대를 바라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닌데요...이 그림 보세요! 이 골목이랑 인왕산을 그리고 있어요!”
“어쨋든 원칙이 그렇습니다. 지나가면서 간단히 사진 찍고 하는 건 괜찮은데요. 오랫동안 앉아 그림 그리는 건 안 됩니다.”
“어머머머...어마 무셔라. 예술 활동 방해죄로 고발해야겠네. 여기서 그림 못 그리라는 법이 도대체 어디 있대요? 청와대에 민원 넣을게요.”
“원칙이 그렇습니다.”
결국 자신을 202경비단 000경사라고 신분을 밝힌 그는 내가 간이의자와 스케치북을 챙겨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자리를 떴다.
2014년 4월 1일 오후 3시 30분. 경복궁 서쪽 영추문 앞에서 일어난 일이다. 서촌의 모습을 담아보겠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발견한 장소였다. 그동안 많이 지나쳐 다닌 길이었지만, 그림을 그리겠다고 살펴보니 깊이가 있는 풍경이 넘 맘에 들었다. 멀리 인왕산이 보이고, 기왓집들에, 동네 이정표가 된 식당 메밀꽃필무렵에, 그리고 한옥을 부수고 새로 공사를 준비중인 옆 공터에, 큰 키 나무에, 완벽했다.
사실 어제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세 시간쯤 그림을 그렸었다. 경복궁 서쪽 영추문쪽에서 통의동과 인왕산을 바라보며 그렸기 때문에 청와대쪽은 볼 틈도 없었다. 설사 청와대쪽을 바라보고 북악산을 그렸다 치자. 그게 또 무슨 대수란 말인가?
집으로 돌아와 “이 곳에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해 달라. 그 사유를 제시할 때까지 매일 이 곳에 앉아 그림을 그리겠다” 머 이런 식으로 청와대에 보낼 민원서류를 작성하다가 먼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한번 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영추문 앞 모퉁이 화단에서 인왕산과 통의동을 향해 간이의자에 앉아 스케치북을 들고, 펜으로 몇 시간 그림을 그리는 일이 대한민국 국가 보안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그림을 그리게 허락해주면 다들 들고 나와서 그 앞에서 그림 그리면 어떡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죠.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수천 명이 경복궁 옆길, 청와대 가는 길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 그게 또 무슨 문제가 되는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림 그리다 쫓겨난 게 넘 터무니없어서 이렇게 올려봅니다.
*사진 및 그림설명: 내가 그리고 있던 풍경 사진이다. 그림은 아직 미완성이다. 서촌의 현재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함축해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다.
김미경/'브루클린 오후 2시' 작가
대구에서 태어나 서강대 국문과와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를 졸업했다. 여성신문 편집장, 한겨레신문 기자를 거쳐 2005년 뉴욕으로 이주 한국문화원 기획실에서 일했다. 2010년 뉴욕 생활을 담은 수필집 '브루클린 오후 2시'를 펴냈다. 2012년 서울로 부메랑, 아름다운재단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2014년 3월부터 화가로서 인생의 새 챕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