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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에 채운 한 잔의 미장센] 영화와 술 이야기 <4> 

 

홍상수 감독작 '그녀가 돌아온 날'의 독일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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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Concept by NYCultureBeat, Powered by AI

 

영화 속에서 술은 때때로 인물의 심리와 복선, 그리고 감독의 미장센(mise-en-scène, 무대/장면의 배치)를 전달하는 시각적 장치다. 

술은 캐릭터의 페르소나와 정체성을 구축하며, 때론 인물의 가면을 벗기는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느와르에선 술이 의리와 배신을, 로맨스 영화에선 설렘을 극대화할 수 있다.   

 

 

'영화와 술' 이야기 연재 순서 

1. 교양 있는 스파이와 괴물, 그리고 허영의 초상: '007 시리즈' '양들의 침묵' '사이드웨이'

2. 술과 계급의식: 반지하와 형사의 위스키가 향하는 곳: '기생충'과 '헤어질 결심'

3. 투명한 잔에 일렁이는 공허한 욕망: '가능한 사랑'과 이탈리아 와인 가야(GAJA)

4. 여배우의 방어기제, 소주 대신 맥주를 권할 때: '그녀가 돌아온 날'의 독일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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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배우의 방어기제, 소주 대신 맥주를 권할 때

'그녀가 돌아온 날(The Day She Returns)'의 독일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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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홍상수 감독 영화의 술 장면. 사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강원도의 힘(98)/ 오! 수정(2000)/ 생활의 발견(02)/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04)/

극장전(05)/ 해변의 여인(06)/ 밤과 낮(08)/ 잘 알지도 못하면서(09)/ 하하하(10)/ 

옥희의 영화(10)/ 북촌방향(11)/ 우리 선희(13)/ 자유의 언덕(14)/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15)/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16)/밤의 해변에서 혼자(16)/ 그후(17)/ 강변호텔(18)/ 도망친 여자(20)

 

 

 

홍상수 감독은 1996년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The Day a Pig Fell into the Well)'부터 신작 '눈둘데가 없네(Nowhere to Lay My Eyes, 2026)'까지 30년간 연출한 총 35편 모두에 소주, 맥주, 막걸리 등의 술을 담았다. 그의 영화 속 지식인 남성들- 주로 영화감독, 교수 작가 등-은 도덕적인 척 하다가 소주를 마시면서부터는 속물근성과 질투, 성적인 욕망을 쏟아낸다.  술은 남녀가 허위의식의 껍데기를 벗고, 이성 대신 욕망이라는 감성에 충실해질 수 있는 묘약이자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도구다. 

 

뉴욕영화제 64년 역사상 홍 감독의 영화는 올해 초청된 '그녀가 돌아온 날(The Day She Returns)'과 '눈둘데가 없네(Nowhere to Lay My Eyes)' 두 편을 포함해 총 26편이나 상영됐다. 올 베를린 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서 첫 상영된 '그녀가 돌아온 날'은 12년만에 독립영화로 복귀한 여배우 정수(송선미 분)가 세명의 여기자를 차례로 만나 인터뷰하는 이야기다. 배경은 서울 근교의 독일 식당이며, 이들은 커피와 맥주를 번갈아 마신다. 

 

극 중 정수(송선미 분)는 세 기자들과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하다가 종종 맥주를 권한다. "피부가 좋은데 무슨 관리를 하나" "이혼했는데 혼자 사는 게 좋은가" "어떤 강아지를 키우나" 등 집요한 사생활에 대한 질문이 날아올 때마다 정수는 맥주를 권하며 대답을 회피한다. 맥주는 정수의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인 셈이다. 기자들이 궁금한 것은 정수의 복귀 영화 자체보다도 그녀의 사생활이다. 그런데, 세 기자의 마지막 질문은 인터뷰 공식에 따라 똑같다. "젊은 세대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가요?" 정수는 매번 똑같이 대답한다. "자기 자신을 좀 더 사랑해 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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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y She Returns, NYFF64

 

'그녀가 돌아온 날'에선 홍상수 영화의 단골이던 초록색 소주병 대신 시원한 독일 맥주가 등장한다. 소주가 인물을 금방 취하게 만들어 속물근성이 쉽게 드러나게 한다면, 맥주는 오랜 공백 끝에 복귀한 여배우의 정서적인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음료다. 

 

첫 번째 기자는 복귀 영화 자체보다 이혼에 대한 질문을 하고, 정수는 전남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이 집 독일 맥주가 정말 맛있다"고 맥주를 권유한다. 그러나 기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며 거절한다. 정수는 두 번째 기자에게도 맥주를 제안하는데, 흔쾌히 응한 기자와 잔을 부딪치며 정수는 스스로 이혼 이야기와 소소한 일상에 대해 터놓기 시작한다. 이어진 세 번째 기자와의 인터뷰에선 아예 커피잔 옆에 맥주잔이 놓인 상태에서 시작된다. 기자는 맥주 맛을 칭찬하며, 은근한 알코올 기운을 빌려 노련한 대화를 이어간다.  

 

이전의 영화들에서 소주가 인물의 겉치레를 찢고 날것의 욕망을 폭발시키는 도구였다면, 이 영화 속 맥주는 여배우에게 끈질긴 세간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정서적 방패이자 타인과 소통하는 통로가 된다. 결국 홍상수 감독에게 술은 인간의 위선과 진실, 그리고 소통의 갈증을 풀어내는 가장 솔직한 미장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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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y She Returns, NYFF64

 

이 영화의 로케이션은 경기도 하남에 자리한 독일 식당 엘레판트(Elefant)다. 홍 감독은 베를린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평소 즐겨 가던 식당에서 촬영했다고 말했다. 엘레판트는 베를린 출신 독일인 오너 셰프 디어크 베어(Dirk Bär)가 운영하는 곳이다. 엘레판트의 메뉴엔 생맥주로 뮌헨의 브로이 라거(Hof Broy Lager, Hofbräu)와 슈무크 바이젠(Schmucker Weizen)이 있고, 병맥주로는 '벨텐부르거(Weltenburger)'와 '슈나이더 바이스(Schneider Weisse)' 라인업이 올라와 있다. 

 

영화 속에서 시킨 맥주는 잔 모양, 맥주 회사 로고와 거품을 볼 때 1050년부터 벨텐부르거 수도원에서 만들어오고 있다는 수제 맥주 벨텐부르거일듯 하다. 실제 식당에서는 생맥주를 주문하면 화려한 로고가 새겨진 긴 전용 유리잔에 풍성한 거품을 얹어 내어주지만, 영화 속 테이블에 놓인 맥주는 로고도 없고 거품도 거의 없는 지극히 평범한 유리잔에 담겨 있다.

 

긴 유리잔 속에서 거품이 솟구치는 화려한 생맥주 대신, 담백하고 고요하게 담긴 이 이름 모를 독일 맥주, 오후의 한잔(낮술)은 집요한 사생활 질문에서 탈피해 마음의 평화와 담백함을 찾고자 하는 정수의 심리를 대변하는듯 하다. 

 

 

PS2: 홍상수 감독은 과거 두번의 인연이 있다. 1994년 경 지인의 소개로 시네텔 서울에서 영화 프로그램 작가를 찾고 있던 그를 처음 만났는데, 그는 사실 진행자를 찾고 있었다. 홍 PD의 샤프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1996년 뉴욕으로 이주한 후 한국 잡지사 기자가 보내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VHS 테이프를 보고, 비로소 한국영화계에 진짜 리얼리즘 시대가 열렸음을 직감했다.  

 

2006년 뉴욕영화제에 '해변의 여인'으로 홍 감독이 초청됐을 때 인터뷰를 했는데, 그날 저녁식사를 제안했다. 뉴욕중앙일보 후배들과 미드타운 일식당 이세(Ise)의 다다미방에서 음악감독(정용진씨?)을 데려온 홍 감독과 물론 소주를 곁들인 자리를 가졌다. 마침 식당에 계시던 LA와 뉴욕중앙일보 사장님들께서 우리 방으로 대형 사케를 선물해주셨다. 그날 우리는 홍 감독이 즐긴다는 '가위바위보 진실게임'의 함정에 빠져 각자 첫 성경험과 러브 스토리를 고백해야 했다. 영화와 술에 관한 에피소드다.

 

 

[NYFF64] 9/25-10/12 

그녀가 돌아온 날(The Day She Returns, 2026) ★★★★☆

 

세상의 부조리한 질문들과 진심의 변주곡 

흑백 롱테이크가 포착한 언어와 삶의 무상(無常)

 

*[NYFF64] Hong Sangsoo's The Day She Returns ★★★★☆ <English version>

The Impermanence of Language and Life

https://www.nyculturebeat.com/?document_srl=4193265&mid=Z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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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oster of Hong Sangsoo's The Day She Returns (2026) (left) / Auguste Rodin, The Crouching Woman (La Femme accroupie), c. 1880–1882, Bronze, cast 1963.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right)

 

한때 인기를 구가하다가 결혼과 이혼 후 딸을 홀로 키워온 여배우 배정수(송선미 분)가 12년 만에 독립영화로 컴백했다. 여배우는 영화 홍보를 위해 세 명의 여기자들과 독일식 레스토랑에서 차례로 인터뷰를 하게 된다. 젊은 여기자들은 영화 자체보다 여배우의 외모와 사생활에 더 관심이 많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커피에서 맥주로 음료가 바뀌는 동안, 여배우의 답변은 상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그날 오후 여배우는 연기 수업에서 강사(조윤희 분)의 지시에 따라 인터뷰에서 오간 말을 기록한 후, 동료 학생과 함께 그 인터뷰를 재현한다. 그러나 여배우가 기억에 의존해 쓴 대본은 실제 인터뷰와 다르게 윤색되어 있고, 그녀는 자신이 쓴 대본마저 훔쳐보며 대답을 이어가야 한다. 인터뷰 때의 테이블은 사라졌지만, 여배우는 여전히 생각과 기억, 그리고 발언 사이의 간극에서 헤매고 있다.

 

홍상수 감독의 34번째 장편영화 '그녀가 돌아온 날(The Day She Returns, 2026)'은 고정된 롱테이크의 흑백영화다. 카메라는 테이블 옆에서 여배우의 정면과 기자의 옆모습을 묵묵히 담아낸다. 여배우는 진지하게 대답하려 애쓰지만, 기자들의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질문 앞에서 순간순간 자기검열을 거친 답변을 내놓는다. 이로 인해 그녀의 생각과 발언, 진심과 진술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발생한다. 과거의 순간을 재현하려는 시도는 결코 원형 그대로를 복원해 낼 수 없다. 여배우는 자신의 진심과 타인에게 보여지고 싶은 모습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흑백의 영상은 그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집요하게 관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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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y She Returns, NYFF64

 

기자들은 작품의 주제(Theme)보다 사적인 영역을 파고들고, 그럴 때마다 여배우는 기자들에게 독일 맥주를 권하며 대화로부터 도피하려 한다. 그리고 그 도피의 자리에는 늘 '변주(Variation)'가 들어선다. 카메라는 그녀의 말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여배우의 진짜 진심은 정녕 무엇일까? 

 

세 번의 인터뷰에서 보여준 여배우의 답변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羅生門, 1950)' 속 무사와 산적, 그리고 여인의 증언을 연상시킨다. 하나의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각 인물들의 이기심과 주관에 따라 진술이 달라지듯 말이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말했다. 인터뷰에서의 여배우와 연기 수업에서의 여배우는 결코 같은 '나'가 아니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순간 속에서 고정된 단 하나의 진실이나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매번 변주되기 마련이다.

 

여배우가 인터뷰 사이사이에 레스토랑 밖으로 나와 잔디밭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장면은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웅크린 여인(The Crouching Woman)'을 떠올린다. 로댕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주제로 '생각하는 사람'을 비롯해 추락하는 이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 등 190여 명의 인물을 담은 거대한 '지옥의 문(The Gates of Hell)'을 구상했고, '웅크린 여인'은 그 지옥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웅크림은 세상의 무례한 질문과 시선들로부터 자신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방어하려는 저항의 몸짓처럼 다가온다. 과거의 스타에서 독립영화로 돌아온 여배우에게, 사생활을 파고드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지옥문이었을 법하다. 대중과 언론은 여전히 그녀를 '욕망의 객체'로 바라보며 외모와 사생활에 집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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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y She Returns, NYFF64

 

홍상수 감독은 예술, 인간의 영혼, 혹은 진심 같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을 쫓는 이 세상의 가벼움을 이 웅크린 미장센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세 명의 여기자들은 인물 인터뷰의 공식대로 모두 같은 질문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세요?" 여배우는 오직 이 질문에만 준비된 모범 답안을 내놓는다. "자신을 사랑해주세요.(Love Yourself)" 이 대사는 앞선 인터뷰 중 그녀가 언급했던 "가짜 사랑(Fake Love)은 사절이다"라는 말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BTS의 음악('Love Yourself', 'Fake Love)을 떠올리게 만든다. 

 

결국 '그녀가 돌아온 날'에서 기자들은 끝내 영화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지 못한 채 인터뷰를 마친다. 그리하여 관객인 우리 역시 영화 속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 여배우가 그 감독을 가리켜 "진지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 그렇기에 결국 여배우가 컴백작으로 선택한 그 독립영화이자,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보고 있는 작품 자체가 바로 홍상수의 '그녀가 돌아온 날'인 셈이다. 

 

절제된 흑백 화면과 고정된 롱테이크, 그리고 햇볕마저 차단된 식당이라는 정적인 세팅은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들의 말과 침묵, 그리고 그들 사이에 흐르는 공기에 오롯이 집중하게 만든다. 홍상수 카메라의 이 정적인 시선 자체가 언어와 삶의 무상(無常)을 직시하게 만드는 가장 날카로운 철학적 도구다. 세상의 모든 것은 늘 변하며 결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진리를 이 영화는 슬프도록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84분.

https://www.filmlinc.org/nyff2026/films/the-day-she-returns 

 
 

*홍상수 영화는 왜 나를 슬프게 하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소설가의 영화(The Novelist's Film) ★★★★☆ 

*The Novelist's Film review <English version> 

*NYFF61: 홍상수 감독의 변(Artist Statement) '물 안에서(In Water)' ★★★★☆

*NYFF61: Hong Sangsoo's Artist Statement 'In Water' ★★★★☆

*NYFF63: 홍상수 감독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

*'필름코멘트' 선정 2022 베스트 영화 20: 홍상수(7, 9위), 박찬욱(1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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