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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이 찍었군!"

뉴욕타임스 사진기자 이장욱 Chang W. Lee 

 

뉴욕중앙일보 박숙희 기자/ 사진: 양영웅 인턴기자 

*중앙일보 <2010.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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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 W. Lee, Pesh Merga: Those Who Face Death, The New York Times/ Chang W. Lee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촬영하거나, 중국의 공해로 인한 환경파괴를 기록하거나, 혹은 시드니·나가노·베이징 올림픽의 환희를 담든 이장욱은 서정적이고 시적인 사진을 찍는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는 이야기가 있고,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속엔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는다.”

 

뉴욕타임스는 사진기자 이장욱(42-2010년 현재)씨를 이렇게 소개한다. 1994년 6월 인턴으로 입사한 지 8년 만인 2002년 그는 퓰리처상 2관왕이 됐다. ‘테러리스트의 뉴욕 공격과 그 후’ 시리즈로 속보사진상과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람들의 고통과 인내에 대한 기록’으로 기획보도사진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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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 W. Lee, September 11, The New York Times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눈부시게 푸른 날이었다. 비가 내리던 전날 이씨 부부는 낚시를 다녀왔다. 그날 아침 이씨는 병원에 갈 계획이었다. 오전 8시55분쯤 ‘쿵’ 소리가 울렸다. TV를 켜니 쌍둥이 빌딩이 불타고 있었다. 이씨는 사진부장 짐 윌슨의 전화를 받고 카메라를 챙겼다. 400mm 망원렌즈와 카메라 두 대, 노트북컴퓨터 등 50파운드나 되는 가방을 멘 채 이씨는 세계무역센터를 향해 뛰었다.

 

“영화 ‘타워링’에서 빌딩이 불에 타자 옥상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떠오르더군요. 모두들 소리를 지르며 현장에서 탈출하고 있는데, 기자들만이 들어가고 있었지요.”

 

사우스 타워가 이미 무너진 후 자욱한 연기에 가려진 노스 타워도 금방 붕괴될 것 같았다. 400mm 렌즈를 들어 세 컷을 찍자 빌딩이 폭삭 내려앉아버렸다. 그날 2900여 명이 숨졌다. 그 순간을 망원렌즈로 촬영한 사진에는 비극의 순간이 생생하게 담겨있었다. 이듬해 이씨는 동료 12명과 퓰리처상 속보사진상을 수상한다.

 

그해 11월 이씨는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했다.

“뉴욕타임스에선 ‘어떤 사진을 찍어오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기자를 신뢰하고 ‘가보라’고 하면서 통역 등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지요. 가장 무서운 에디터는 바로 접니다. 느낌이 올 때까지, 만족할 만한 순간을 포착할 때까지 찍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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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 W. Lee, Buzkashi, The New York Times. 전란 중인 아프가니스탄의 브즈카쉬 경기 장면. 

 

런던과 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을 거쳐 9일 만에 아프간에 들어가 두 차례 4개월간 취재했다. 그의 관심은 전쟁의 실상보다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전쟁을 치르느라 힘들고 지친 사람들 가운데 감동적인 모습도 많았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아름답고 인간적인 장면이 존재하지요.”

이씨는 아프간 시리즈로 이듬해 동료 3명과 퓰리처상 기획보도사진상을 받았다.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은 것은 영광입니다. 상의 취지가 사회공헌도에 있기 때문에 수상으로 인해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갖고, 더 많은 사람과 스토리를 나눌 수 있게 되어 기쁘지요. 물론 개인으로 받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실제 사진을 찍을 때는 내가 누구라는 생각조차 없이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집중하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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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 W. Lee, Refugee Camp, The New York Times

 

"이장욱이 찍었군!" 

뉴욕타임스의 사진 에디터도 30여 명의 사진기자 중 ‘이장욱의 사진’을 쉽게 찾아낸다. 그의 사진은 ‘완벽한 조명감각에 정교한 구도와 의외의 병치를 조합한 독특한 스타일’ ‘영혼이 담겨 있다’ ‘회화 같다’는 평을 종종 듣는다. 거대한 산을 배경으로 찍은 이라크 키르쿠크의 피란민들 사진엔 도도한 인간의 삶이 그려졌다. 이라크-이란 국경지대에서 산자락에서 엎드려 기도하는 쿠르드 병사의 모습에는 동양화풍의 여백 속에 ‘천지인(天地人)’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라크 시너위산의 쿠르드 보초병의 모습은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연상하게 된다. 이씨는 카메라와 빛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그리는 예술가인 셈이다. 뉴욕타임스는 이씨의 서정적인 사진을 기사 없이 보도하기 시작했고, 2008년부터는 매주 수요일 사진칼럼 ‘렌즈(Lenz)’도 시작됐다.

 

부산 동래에서 태어난 이씨는 무역선 선장인 아버지를 가끔씩 보면서 자랐다. 부친은 집에 올 때마다 장욱에게 세계 각국에서 가져온 우표를 선물했다. 네모난 우표 속에서 넓은 세상을 알게 된 그는 뉴욕의 이모가 보내온 캐논 카메라와 친구가 되어 사진반에 들어갔다. 어느 날 TV에서 건물이 붕괴되는 장면을 본 그는 파괴공학에 관심을 갖고 건축을 공부하러 중앙대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다. 1986년 대학 1학기를 마친 후 이씨는 뉴저지 이모의 초청으로 이민했다.

 

“부산 사투리 때문에 한국어도 영어도 안 통하던 시절이었지요. 4년 동안 낮에는 액자 공장, 도미노 피자, UPS(미 우체국) 등지에서 일하면서 학비를 벌었습니다.”

 

야간엔 버겐커뮤니티칼리지에서 컴퓨터과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무엇을 할까 고민 끝에 고교시절 취미였던 사진을 더 배우러 뉴욕대학교에 편입했다.

 

이씨는 이후 이야기가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에 매료된다. 95세 홈리스 여성의 삶을 3년간 추적했고, 로스앤젤레스(LA) 폭동 그 1년 후를 주제로 한 프로젝트로 LA타임스 매거진에 6쪽에 걸쳐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뉴욕대를 수석졸업하자 뉴욕타임스에서 8주 인턴으로 일할 기회가 생겼다. 노장 사진기자들 사이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무려 55컷의 사진이 게재되자 ‘토네이도’라는 별명이 생겼다. 인턴 4개월 만에 이씨는 세계 최고 권위의 신문사에 최연소 정식 사진기자가 됐다.  

 

한국 전쟁 50주년 기념식, 뉴욕필하모닉 평양 콘서트, 인도네시아 지진, 아이티 지진을 비롯, 시드니 올림픽, 베이징 올림픽, 밴쿠버 동계 올림픽, 런던 올림픽, 소치 동계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https://changwlee.com

 

*위 기사는 2010년 8월 14일자 중앙일보에 게재된 인터뷰를 보완한 것입니다. 

 

 

 

"사진은 나의 인생, 행복합니다" 

 

퓰리처상 2개 부문 수상 뉴욕타임스 사진기자 이장욱씨 첫 개인전

9.11·아프간전쟁 등 취재 현장 담은 '히스토리' 700점 디지털 슬라이드쇼 

 

뉴욕중앙일보 <2009.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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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씨 (2009). 사진: 양영웅 인턴기자/ 뉴욕중앙일보  

 

“제게 사진은 인생(Life)입니다. 제가 살아온 모습이자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지요.”

 

언론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퓰리처상을 두개나 거머쥔 뉴욕타임스 사진기자 이장욱(40)씨. 그가 첫 개인전을 열고 있다. 지난 12월 5일부터 이스트빌리지의 갤러리 ‘SB디지털’에서 열고 있는 전시의 제목은 ‘HISTORY’. ‘역사(History)’는 공식적인 사건을 모은 것이지만, 이번 전시는 이씨의 시각으로, 이씨의 카메라에 담은 ‘이씨의 이야기(His Story)’다.

 

전시에는 9.11 사태·이라크전·아프가니스탄전에서 인도네시아 지진, 베이징 올림픽까지 이씨가 지난 14년간 뉴스의 현장에서 담아온 이미지 700여점이 46·40인치 HD모니터 4개와 벽 하나에 슬라이드쇼로 진행되고 있다. SB디지털은 이씨의 부인 박설빈씨가 지난해 10월 개관한 갤러리 겸 스튜디오다. 전시는 오는 22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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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 W. Lee, September 11, The New York Times

 

◇퓰리처상 2관왕=“현장에 가야한다는 것은 거의 본능이었습니다. 영화 ‘타워링’에서 옥상 위에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떠오르더군요.”

 

2001년 9월 11일, 청명한 가을 아침이었다. 사진부장 짐 윌슨의 전화를 받은 이씨는 400밀리 망원렌즈와 카메라 두대, 노트북 컴퓨터를 가방에 넣고 이스트빌리지의 집에서 현장까지 걸어서 갔다. WTC에 도착한 이씨는 사우스타워가 무너지는 것을 포착했고, 연기 속에서 하루종일 셔터를 눌렀다. 이듬해 그는 동료기자 13명과 공동으로 2002년 퓰리처상 속보상을 수상했다.

 

그로부터 두달 후 이씨는 동료 기자 4명과 폭격으로 초토화한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갔다. 3개월간 전쟁과 가난에 시달리는 아프간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포토저널 ‘아름다운 삶(Beautiful Lives)’ 시리즈로 기획보도 사진상까지 공동으로 수상, 이씨는 같은 해 퓰리처 2관왕이 됐다.

 

재난이 있는 곳에 이장욱과 카메라가 있었다. ‘재난전문 기자’라는 별명이 붙은 이씨에겐 굵직한 사건과 행사들이 맡겨졌다. 올해만 해도 뉴욕필의 평양 콘서트와 베이징 올림픽을 취재했다. 이씨는 16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와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기차를 타고 워싱턴DC로 달린다. 그리고 20일 역사적인 미국 흑인 대통령 1호의 취임식 퍼레이드를 촬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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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 W. Lee, Barbur's Garden, The New York Times

 

◇방랑벽의 교훈=이씨는 부산 토박이다. 동래구 온천동에서 두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이씨는 무역선 선장인 아버지를 이따금씩 보며 성장했다. 아버지는 집에 올 때마다 세계 각 나라에서 산 우표를 주었다. 소년은 조그만 우표들을 통해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터득하게 된다. 동인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곧 카메라와 친구가 됐다. 뉴욕에 살던 이모가 보내준 카메라를 들고 사진반에 들어가 활동했다.

 

이씨에게도 사춘기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주입식 교육체제 속에서 현실의 답답함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고민하던 어느 날 그는 무작정 집을 나섰다. 보길도에서 경포대, 서산 앞 바다까지 동서남해를 돌았다. 세 차례 무전여행을 통해 트럭운전사, 웨이터, 대학교수 등 여러 사람을 만났고 인생을 배웠다. 결론은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라’였다.

 

“가을비가 쏟아지던 어느날 서산 둑길을 걷는데 갑자기 너털웃음이 나오더군요.”

 

이 순간 답답증이 물러가고 속이 시원해졌다. 그때 문득 ‘집으로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학교로 돌아온 이씨에게 담임교사가 물었다. “장욱아, 그래 고래는 잡았느냐?”

 

‘고래사냥’식의 방랑벽을 중단한 이씨는 그후로 열심히 공부했다. 어느날 TV에서 건물 무너지는 장면을 본 후 파괴공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파괴의 과학을 알려면 건축을 공부해야 한다고 해서 중앙대 건축공학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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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 W. Lee, After Tsunami, The New York Times  

 

◇이민에서 NYT까지=대학 1학기를 마친 이씨는 이모의 초청으로 뉴저지로 왔다. 두살 많은 형 장혁씨와 액자공장에서 물건 나르고 프레임을 만들며 하루종일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부산 사투리가 심해서 한국어도, 영어도 안통하던 시절이었지요.”

 

컴퓨터가 비전이 있는 것 같아 버겐커뮤니티칼리지에서 컴퓨터과학과를 수료한 후 뉴욕대학교 사진과로 편입했다. 이야기가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에 매료된 이씨는 ‘홈리스’ 프로젝트와 LA 폭동 그 1년 후를 주제로 한 프로젝트 등을 진행했다. 졸업 후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뉴욕타임스의 인턴으로 입사했고, 2개월만에 최연소 정식 사진기자로 채용됐다.

 

“공정하고 균형있는 보도를 하는 뉴욕타임스에서 일하는 것이 로터리에 당첨된 것보다 더 큰 행운인 것 같아요.”

 

컴퓨터를 전공했던 이씨는 뉴욕타임스가 흑백에서 컬러사진으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진화하는 변환기에 잘 적응했다. 스포츠 게임 등 야간 취재에도 순발력을 발휘했다. 이라크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폭격으로 사진기자가 사망했다. 일촉즉발의 전쟁터, 재난의 현장을 찾아 세계를 다닐 수 있는 것도 부인 박씨의 이해심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죽기 전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하는데,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정말 행복합니다.”

https://www.instagram.com/nytchangster

 

박숙희 기자 sukie@koreadaily.com

*위 기사는 2009년 1월 15일 뉴욕중앙일보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를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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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기찬 서울의 쉼터, 치명적인 인파충돌 후 고요해지다 <NYT-2022. 11.5>

A Vibrant Refuge in Seoul Goes Quiet After Deadly Crowd Crush

Itaewon was popular for its diversity and nightlife. A week after a disaster killed more than 150 young people there, the neighborhood is a monument of grief.

https://www.nytimes.com/2022/11/05/world/asia/seoul-itaewon-stamped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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