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FF64: 그녀의 빈 자리 '기나긴 겨울' (A Long Winter) ★★★☆
[NYFF64] 9/25-10/12
기나긴 겨울 (A Long Winter) ★★★☆
상실의 시대, 그녀의 빈자리가 준 해방과 처벌
어머니가 사라진 설산, 여자 없는 남자들의 유토피아

A Long Winter, NYFF64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반, 콜로라도 로키산맥 고지대에 고립되어 토끼 고기와 가죽을 팔아 살아가는 한 가족에게 혹독한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무뚝뚝하고 독선적인 남편, 그리고 숨막히는 산골 생활에 환멸을 느끼는 루이즈(카트리나 발프 분)의 유일한 낙은 코스모폴리탄 잡지를 보며 우울증을 술로 달래는 것이다. 변화를 꺼리는 형 마이키와 달리, 동생 토미는 넓은 세상을 보겠다며 한국 파병을 자원했다.
어느 눈보라 치던 날, 루이즈가 갑자기 사라진다. 경찰은 눈이 녹을 때까지 수색을 포기하고 만다. 남겨진 남편 레스터(에본 모스-바크라크 분)와 큰아들 마이키(프레드 헤칭거 분)는 아내와 엄마가 사라진 산골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아버지는 마을에서 혼혈 고아 청년 지미(디파로 운-아-타이 분)를 데려와 집안일을 시킨다. 마이키는 과묵한 지미와 한방을 쓰며 묘한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데….
영국 감독 앤드류 헤이그(Andrew Haigh)의 '기나긴 겨울(A Long Winter)'은 '여성이 부재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아일랜드 작가 콜름 토이빈(Colm Tóibín)의 동명 단편소설(2006)을 감독이 직접 각색한 이 작품은, 원작의 배경인 1930년대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피레네 산맥 고산지대를 1950년대 미국 로키산맥으로 과감히 옮겨왔다.
루이즈의 실종과 가족의 붕괴가 산골 부자(父子)에게 오직 상실의 슬픔만을 남긴 것은 아니다. 지미가 루이즈의 역할을 척척 메워나가고, 마이키와 지미는 설경 속을 함께 탐험한다. 이들이 따뜻한 물을 데워 번갈아 목욕하는 장면은 마치 남성들만의 파라다이스처럼 비쳐진다. 여성 없는 세상이 이들에게 꼭 불편한 것만은 아닌 셈이다. 여기서 마이키는 은밀한 욕망에 눈을 뜬다.

A Long Winter, NYFF64
루이즈와 레스터가 춤을 추기 위해 틀었던 음반이 1951년 당시 갓 태동하며 보수적인 사회를 뒤흔들던 초기 로큰롤의 반항아적 에너지를 담고 있었다면, 이 남성들만의 유토피아 속에는 당대 백인 주류 사회의 안락함을 대변하는 페리 코모의 감미로운 "A Dreamer's Holiday"가 흐른다.
헨릭 입센(Henrik Ibsen)의 희곡 '인형의 집(A Doll's House, 1879)'에서 노라는 남편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고 독립을 선언하며 한겨울 밤 가출한 주체적인 여성이다. 반면 '기나긴 겨울'의 루이즈는 산골 생활과 완고한 남편에 대한 반발로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가, 마치 도피하듯 대자연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루이즈의 부재(不在)는 남겨진 이들에게 기묘한 기회를 제공한다. 한동안 살림에 무능했던 레스터와 마이키 부자는 지미의 등장으로 루이즈의 빈자리를 완전히 대체한다. 이로써 그들의 '불만의 겨울' 뒤로 기묘한 봄이 찾아온 것이다.

A Long Winter, NYFF64
앙드레 투르펭(André Turpin)의 카메라가 포착한 눈 쌓인 로키산맥의 웅장하고 험준한 풍경은 결코 이 영화의 단순한 병풍에 그치지 않는다. 자연은 인간사를 묵묵히 지켜보는 관찰자다. 솟아오른 봉우리와 끝없이 펼쳐진 소나무 숲이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루이즈를 찾아 눈밭을 헤매는 장면에서 대자연은 어머니 같은 존재감을 뿜어낸다. 하지만 동시에, 끝없는 설원과 혹독한 추위는 가부장적인 레스터 일가의 단절된 소통과 감정적으로 마비된 상태를 고스란히 상징하는 듯하다.
영화 초반 오두막집 식탁에서 벌어지는 가족 간의 대화는 가부장적인 억압과 고립감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루이즈가 사라진 후 마이키가 설산으로 걸어나갈 때, 롱숏으로 포착되는 남성들의 모습에서는 막막한 상실감과 동시에 묘한 해방감이 교차한다. 꽁꽁 얼어붙었던 산에 마침내 봄이 찾아오면서 아들은 성장하고, 아버지는 온화해지며, 지미는 자연스럽게 가정의 일원으로 녹아든다.
그러나, 눈이 녹아내리며 마침내 드러난 루이즈의 종말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여성 없는 남자들의 삶에서 불편함은 찰나였고 이내 안정이 찾아왔지만, 루이즈의 자발적인 이탈 혹은 희생에 대한 대자연의 처벌만큼은 지독하리만치 가혹하다. 117분.
https://www.filmlinc.org/nyff2026/films/a-long-wint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