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The King’s Warden)' 흥행의 이유—시대의 아킬레스건과 집단 정서를 건드리다
'왕과 사는 남자(The King’s Warden)'
집단 기억과 시대 정서 건드린 서사
공식 역사에서 밀려난 감정의 귀환
*Review: The Recipe Behind The King's Warden's 10-Million Breakthrough <English version>
https://www.nyculturebeat.com/?document_srl=4179015&mid=Zoom

3월 3일 오후 타임스퀘어 영화관 AMC25에서 '왕과 사는 남자(The King’s Warden/ 왕의 감시자)'를 보며 훌쩍였다. 실로 오랫만에 영화관에서 나온 눈물이었다. 뉴욕 한복판, 한인 관객들로 만석이 된 극장에서 한국과 동시 상영되는 역사극을 보며 한류의 파워를 실감했다. 손 안의 영화, 넷플릭스 시대에 극장 관객 1천만명을 앞둔 이 영화의 흥행 레시피는 무엇일까?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는 삼촌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강원도 영월 광천골로 유배된 조선의 6대 국왕 단종 이홍위(1441-1457)와 감시자인 촌장 엄흥도의 이야기를 그렸다.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 팩션 사극(Historical Fiction)이다.
연출은 뛰어나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3인조 배우 유해진, 박지훈, 유지태의 불꽃튀는 앙상블 연기가 내내 스크린을 장악했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고,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한다. 하지만, '왕과 사는 남자'는 단연 세 배우의 클로즈업이 파워풀하게 서사를 이끌어갔다. 국사책에서 튀어나온듯한 촌장 유해진의 찢어진 눈매, 왕좌에서 추락한 박지훈의 고결하면서도 슬픈 눈망울, 권력을 휘어잡은 유지태의 비열한 눈초리는 영화관의 빅 스크린에서 확대되어 시너지 효과를 낸다. 특히 촌장 아들이 관가에서 곤장을 맞는 장면에서 왕과 촌장, 그리고 한명회 트리오의 연기는 전율을 자아냈다.
그리고, 이 영화는 한국인의 집단심리를 건드렸다.

그리스 비극과 피에타
'왕과 사는 남자'는 그리스 신화와 피에타상을 떠올린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의 이야기는 외디푸스를 연상시키는 운명 비극이다. 주인공의 내적 결함 때문이 아니라 출생과 권력이라는 숙명이 지배하는 서사다. 세종의 손자, 문종의 장자였던 단종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잇달은 죽음에 아버지 문종마저 사망하자 12살에 즉위했다. 그러나, 대신들의 보좌를 받은지 1년만에 숙부 수양대군의 군사정변으로 폐위되며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마을 사람들과 관군의 군중 장면은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처럼 사건의 증인으로 다가온다. 왕의 몰락과 고립, 그리고 최후는 극적인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제공한다. 우리는 소년 왕의 죽음에 눈시울을 적시고, 감정을 정화시킨다. 강에 떠오른 차가운 왕의 시신은 수난의 역사 속 희생양을 상징한다.

영화에서 가슴을 북받치게 하는 장면 중 하나는 단종의 죽음 묘사다. 엄흥도가 단종의 청으로 방문 밖에서 왕의 목에 맨 줄을 잡아당겨 최후를 맞는 장면은 한국영화사에서 잊혀지지 않을 비장한 씬이다. 장항준 감독은 단종의 고통과 슬픔의 몸짓을 과감히 생략하고, 두 눈의 클로즈업만 보여준다. 대신 엄흥도가 방문 밖에서 줄을 당기며 슬픔에 잠긴 붉은 얼굴로 "강에 다 왔습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라 말하며 흐느끼는 모습을 담는다.
그 강은 청령포의 강물이자,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황천(黃泉), 성경 속의 요단강,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스틱스(Styx)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소년 왕의 고통과 비통함은 관객의 상상 속에서 더 증폭된다. 관객은 왕의 자살을 돕는 엄흥도, 왕의 죽음을 목격하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울컥한다.
엄흥도가 강에서 단종의 시신을 끌어올리는 장면은 미켈란젤로의 조각 '피에타(Pietà)'를 연상시킨다. 성모 마리아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을 뜻한다. 왕과 촌장에서 마치 부자 관계처럼 깊어진 이들의 모습은 애통하기 그지 없다.

서부극, 버디 무비, 성장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단순 비극에 머물지 않은 이유는 곳곳에 장항준 감독의 유머와 유해진의 코믹 연기에서도 기인한다. 장 감독은 TV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 '아는 형님', '놀면 뭐하니?' 등에 출연하며 입담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성격 배우 유해진이 맡은 시골 촌장은 광대 출신으로 그의 해학은 극에 숨을 불어 넣는다. 그러나, 그 웃음들은 엄청난 비극으로 치닫을 전주곡에 불과했다.
이 영화엔 또한, 우리에게 친숙한 할리우드 장르를 믹스한 흔적이 보인다.
두메산골의 촌장은 마을 사람들과 쌀밥을 먹고, 아들을 공부시키고 싶다는 소박한 목표가 있다. 자신의 부를 축적하려는 이기심은 없다. '우리 모두 잘 살아보세'를 꿈꾸는 촌장은 이웃 마을의 유배지 성공 케이스를 벤치마킹한다. 그러나, 네트워킹이 있는 대감을 기대하고 청령포를 유배지로 유치했다가 그만, 노산군으로 강등된 왕을 맞게 된다. 지엄한 궁궐의 왕은 무지랑이 같지만, 따뜻한 마음씨의 촌장, 그의 감시자를 만난다. 하늘과 땅,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괴짜 커플의 만남과 충돌, 그리고 점진적인 연대는 할리우드 버디 무비(Buddy Movie)를 닮아 있다.
어느날 촌장은 절벽에서 자살을 시도하던 왕을 구하고, 왕은 밥상을 마련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주며 겸상까지 한다. 단종은 촌장 아들을 가르치고, 산에 나타난 호랑이를 활로 명중시키며 지도자로서의 결단력을 보여준다.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쫒겨난 왕은 산골에서 백성을 이해하고, 지식을 나누어주며, 인간으로서의 정을 배우며 지도자의 덕목을 키워나간다. 나약했고, 슬픔에 잠겨 나약했던 소년 왕은 백성과 교류하면서 지도자로 성장해갔고, 복위를 꿈꾸게 된다. 유배지는 단종이 성숙하는 캠프가 된 것이다.

한편, 왕과 촌장, 그리고 한명회의 삼각 구도는 할리우드 서부극(Hollywood Western) 틀로 읽혀진다. 황량한 서부의 무법천지 마을에 이방인 총잡이 방문해 악당을 처단하며 정의를 실현하는 서사의 장르다. 수양대군의 쿠데타 후 산골로 유배된 단종은 외지에서 온 정의로운 (그러나 무기력한) 총잡이, 촌장은 마을을 지키는 보안관, 수양대군의 앞잡이 한명회는 악당으로 보면 어떨까?
이 구도는 영화 초반에 불화에서 위기 속 협력으로, 마침내 충절과 의리라는 서사 흐름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하며, 관객에게 익숙한 장르적 친숙함을 제공한다. 그러나, 할리우드 서부극의 해피엔딩이나 권선징악(勸善懲惡)은 없다. 1453년 왕위 찬탈과 사육신을 처형하며 정권을 잡은 세조는 1468년 사망할 때까지 군림했다.

한민족의 DNA: 한과 정과 음주가무
'왕과 사는 남자'에선 한민족의 정서가 고스란히 펼쳐진다. 가슴에 맺힌 한(恨), '우리'로 뭉쳐진 정(情)과 음주가무(飮酒歌舞)의 문화가 녹아 있다.
광천골의 엄흥도는 광대 출신이다. 그의 해학적인 대사들도 이에서 기인한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춤추고, 판을 벌이며 어린 왕을 따뜻하게 대하는 축제같은 분위기는 후반부에 닥칠 단종의 비극적인 운명과 강렬한 대비가 된다.
마을 사람들이 식음을 전폐한 왕을 우려하며 '밥상'으로 상징되는 정(情)의 문화와 정서적인 유대감을 드러낸다. 소년 왕은 산골에서 민초들과 교류하면서 세상을 배운다. 밥상을 준비한 마을 사람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불러주며 그들의 자존감을 깨워준다.
그리고, '못다 핀 꽃 한송이' 단종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엄흥도의 모습은 전쟁, 식민지, 분단, 독재, 계엄과 탄핵까지 우리 민족이 감당해야 했던 시련과 한(恨)이 응축된 장면처럼 느껴진다. 누군가에겐 물과 죽음의 이미지가 한국인들의 집단적인 '세월호 트라우마'를 환기시킬지도 모른다.
궁궐의 왕은 산골 촌장을 만나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배운다. 촌장은 공동체 안에서 책임과 도리로 인정받는 지도자다. 왕은 통치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태도를 깨쳐나갔다. 이 과정에서 금수저와 흙수저의 화해, 부모 세대의 교육열, 마을 공동체의 따뜻함이 우리에게 정서적 위로를 준다.

밥상 위의 평등과 지도자의 덕목
이 영화에서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장면은 식음을 전폐하던 단종이 어느날 밥상 앞에서 음식 재료를 마련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고, 후에 이들과 겸상하는 씬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백성의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이며, 겸상은 위계를 허무는 의례다. 궁궐의 수직 질서는 밥상 위에서 수평으로 재편된다. 왕과 민초, 이 평등한 밥상에서 존엄은 신분이 아니라 태도에서 비롯됨을 보여준다. 왕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두메산골에서 인간애를 배운다. 이 인간미가 흐르는 작은 유토피아는 동화같다.
이윽고, 지도자로 성숙한 단종은 촌장 아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곤장 맞는 관가로 찾아간다. 폐위되어 무력하지만, 근엄한 지도자의 태도를 보여준다. 여기서 왕의 호령, 한명회의 협박, 촌장의 배신은 세 인물의 갈등을 최정점에 이르게 하는 클라이맥스다. 권력과 신분을 넘어서 충절과 의리, 부성애로 갈등하는 엄흥도의 선택은 놀랍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위기의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를 자문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도덕 교과서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금수저와 흙수저, 권력과 무권력의 구분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단지 인간의 품격과 선택뿐이다. 이 영화는 궁궐이든 산골이든, 위기 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충성과 효는 누구에게 향해야 하는가, 매너와 도리는 권력 앞에서도 지켜질 수 있는가, 희망을 선택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훗날 청령호의 나무에 나란히 달린 왕과 촌장의 이름패는 고요하게 죽음 앞의 평등을 말한다.

공식의 역사(正史)에서 비공식의 서사(秘史)로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다. '왕과 사는 남자'가 특히 마음에 남는 이유는 승자의 공식 역사(official history, 正史)가 아니라 패자의 비공식적 이야기(unofficial story, 秘史)를 불러냈다는 점이다. 숙부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은 '난리를 평정한다'는 뜻의 정난(靖難)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명칭 속에는 이미 권력의 논리가 들어 있다. 난리를 바로잡았다는 표현은 곧 권력자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언어다. 실상은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군사정변, 쿠데타였음에도.
장항준 감독은 세조를 아예 등장시키지 않고, 단종애사(端宗哀史)와 엄흥도의 스토리에 초점을 맞춘다. 이 영화는 세조의 정치적 성공이 아니라, 유배된 어린 왕의 감정을 따라간다. 왕권 강화의 서사가 아니라, 두메산골에서 밥을 먹고, 이름을 부르고, 백성의 아들을 가르치며 조금씩 인간으로 성장하는 한 소년의 시간을 비춘다.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감정과 체온을 복원한다. 이 영화는 승자의 공식 역사에서 밀려난 단종의 시간을 불러내며, 마치 잊혀진 역사의 조각을 모아 완성한 달 항아리 같은 만족감을 준다.
정치적으로는 세조가 승자였지만, 문화적 기억 속에서는 단종이 더 오래 살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권력을 장악한 자보다 억울하게 사라진 자에게 더 끌리기 마련이다. 영월의 강과 나무는 승자의 영광보다 패자의 슬픔을 기억한다. 이 영화는 그 오래된 기억을 다시 현재로 끌어온다.

한국인의 집단심리와 지도자에 대한 갈망
그래서 '왕과 사는 남자'는 단순한 사극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역사를 기억할 것인가"를 묻는다. 더 나아가 권력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 중 무엇을 따를 것인가 질문한다. 결국 이 영화의 힘은 화려한 연출이나 정교한 장면 구성보다 그 질문을 조용히 던지는 태도에 있다. 승자의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고, 패자의 인간성을 복원하려는 선택. 그 선택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집단심리를 건드리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 그래서 관객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상하게 위로를 받는다. 역사 속에서 지워진 목소리가 다시 불려 나오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조금 더 인간적인 세계를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역사를 지켜온 우리는 성공한 권력자보다도 억울함, 희생, 도덕적 품격에 더 깊이 반응하는 집단심리를 갖고 있다. 이 영화가 1천만을 돌파한 이유 중 하나도 성공한 권력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잃어버린 왕의 인간성을 복원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한국인의 한과 저항정신은 고결한 지도자를 열망한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전쟁광 지도자들로 고통받고 있다. 이 영화는 오늘날에도 지도자의 자질을 묻는다.
결국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 레시피는 연출이나 미학적 완성도보다 세 배우들의 열연, 시대정서와 집단심리를 읽어낸 점에 있을 것이다. 패자의 서사를 복원한 역사 인식, 공동체적 카타르시스, 지도자에 대한 집단적 갈망, 그리고 버디 무비와 서부극적 구조, 그리스 비극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보여준 인간적 덕목과 삶의 선택이,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이다.
장항준 감독은 우리의 아킬레스 건을 건드렸고, 우리는 역사가 빼앗아간 '잃어버린 왕'을 위로하러 청령포로 가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