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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Boycott the Grammys <3> 그래미 패싱 (Grammy Passing) C.

 

'팝의 멋진 신세계' 제2·3차 영국의 침공

MTV 개국과 '쿨 브리태니카'의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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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다시 한번 미국을 뒤흔들다(Britain Rocks America – Again)

 

 

BTS 그래미상 보이콧 파장 시리즈

(1) 그래미의 숨은 의도: 'K팝의 게토화'

(2) 그래미의 치부: 부패한 '비밀 위원회' 

(3) 그래미 패싱(Grammy Passing): 외면당한 거장들

   A. 제왕들의 굴욕: 엘비스 프레슬리와 마이클 잭슨

   B. 팝의 디바들: 조안 바에즈, 재니스 조플린, 니나 시몬, 다이애나 로스, 셰어, 마돈나, 로리 앤더슨

   C. UK 침공과 외면

   D. 변방의 혁신가들: 밥 말리, 아바, 비요크, 싸이(PSY), BTS

   E. "미안해요, 평생공로상" 

(4) 그래미의 달링들(Grammy Darlings)

    선택받은 성골들: U2, 비욘세, 테일러 스위프트, 아델, 빌리 아이리쉬

(5) 영원한 이방인들(Aliens)의 반란: 왜 세계는 BTS 선언을 응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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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소프트 록, 팝 발라드와 디스코 광풍

 

1964년 2월 비틀즈의 미국 상륙으로 시작된 '제1차 영국의 침공'은 롤링 스톤즈, 더 후, 레드 제플린, 퀸 등으로 이어지며 록 음악의 지형을 바꾸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 대중음악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영국 록이 미국 대중음악의 주류를 독점하던 시대가 지나고, 미국의 정서와 취향을 반영한 다양한 장르가 동시에 전성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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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록의 시대가 저문 자리에서 미국인들은 지친 정서를 부드럽게 대변해 줄 음악을 찾았다. 라디오와 대형 공연장을 장악한 소프트 록과 아레나 록에서는 이글스(Eagles)를 비롯해 저니(Journey), 보스턴(Boston), 시카고(Chicago) 등이 인기를 누렸다. 동시에 아름다운 선율과 서정적인 노랫말로 무장한 팝 발라드와 싱어송라이터의 시대도 열렸다. 빌리 조엘(Billy Joel),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 그리고 남매 듀오 카펜터스(The Carpenters)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라디오가 이 부드러운 선율로 가득 차 있을 때, 밤거리에는 바야흐로 '디스코(Disco)'의 시대가 도래했다. 미국 클럽 문화에서 자생한 이 강력한 비트 위로, 호주에서 기반을 다진 형제 트리오 비지스(Bee Gees)가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 1977)' OST로 전무후무한 신드롬을 일으켰고, '디스코의 여왕' 도나 서머(Donna Summer)가 그 광풍을 주도하며 미국의 밤을 클럽 비트로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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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드러운 주류 음악의 흐름 한편에서는 다가올 미래의 사운드와 비주얼을 미리 개척한 선구자들이 존재했다. 모타운(Motown) 출신의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는 신디사이저를 비롯한 전자악기를 대중음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1970년대 소울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그래미 '올해의 앨범'을 1974년부터 1976년까지 3년 연속 수상했다.

 

뉴욕 펑크 씬에서 탄생한 블론디(Blondie)는 록에 디스코를 흡수한 'Heart of Glass(1979)'와 랩을 도입한 'Rapture(1980)'를 잇따라 빌보드 정상에 올려놓으며 다가올 뉴웨이브(*New Wave)와 '보는 음악의 시대'를 예고했다. 

 

그러나 이 화려한 파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79년 7월 12일 시카고의 코미스키 파크에서 수만 명의 록 팬들이 디스코 레코드를 쌓아두고 폭파한 이른바 '디스코 폭파의 밤(Disco Demolition Night)'은 디스코에 대한 당시 록 팬들의 반감을 상징하는 사건이 됐다. 특히 디스코가 흑인과 라틴계, LGBTQ+ 클럽 문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이 반발에는 인종적·동성애혐오적 요소가 뒤섞여 있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음악산업의 변화와 대중 취향의 이동이 함께 작용하면서 디스코의 주류 지배력은 빠르게 약화됐다.

 

디스코의 시대가 저물고 창의적인 침체기를 겪어 있는 가운데, 새로운 매체가 등장했다. 1981년 8월 1일,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 MTV가 개국하면서 음악은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1981, MTV 개국과 제 2차 영국의 침공 

 

"Ladies and gentlemen, rock and roll."

 

1981년 8월 1일 자정, 미 최초의 24시간 스테레오 음악 채널 MTV(Music Television)는 개국 영상으로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장면을 보여준 뒤, 미국 국기 대신 MTV 로고가 들어간 깃발을 달에 꽂는 영상을 내보냈다. 이어 "신사 숙녀 여러분, 록앤롤"이라는 선언과 함께 음악방송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MTV가 말한 '록앤롤(Rock 'n' roll)'은 1950년대의 고전적인 로큰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 라디오와 대형 공연장을 장악하고 있던 록 음악을 새로운 TV 매체로 옮겨오겠다는 MTV의 초기 정체성을 보여주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깃발 아래에는 신디사이저와 화려한 패션, 세련된 뮤직비디오로 무장한 영국의 젊은 뉴웨이브 공습군이 대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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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V가 개국 첫날 송출한 첫 뮤직비디오는 영국 신스팝(*Synth Pop) 그룹 버글스(The 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였다. 이는 뮤직비디오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라디오 중심이었던 음악산업의 변화를 상징하는 제목 그 자체였다.

 

그 첫 방송에서 틀어준 두 번째 곡은 미국 여성가수 팻 베나타(Pat Benatar)의 'You Better Run'이었고, 세 번째부터 일곱 번째 곡까지는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의 'She Won't Dance With Me', 더 후(The Who)의 'You Better You Bet', Ph.D.의 'Little Suzi on the Up', 클리프 리처드(Cliff Richard)의 'We Don't Talk Anymore', 그리고 프리텐더스(The Pretenders)의 'Brass in Pocket'이었다. 첫 7곡 가운데 6곡이 영국계 아티스트였다.

 

당시 미국의 음악산업은 여전히 라디오와 음반 중심의 홍보 시스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반면 영국에서는 MTV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TV 음악 프로그램을 위한 프로모션 영상 제작 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영국 뮤지션들은 '탑 오브 더 팝스(Top of the Pops)'와 같은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영상과 퍼포먼스로 자신을 홍보하는 데 익숙했다.

 

여기에 1970년대 글램 록(*Glam Rock)이 남긴 화려한 메이크업과 의상, 펑크의 반항적인 패션, 그리고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신디사이저가 결합했다. MTV는 24시간 방송을 채울 새로운 볼거리가 필요했고, 영국 아티스트들은 이미 그에 적합한 음악과 영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요와 공급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이 지점에서, 스타일리시한 영국 청년들이 미국 안방극장의 TV 화면을 하나둘 점령하기 시작했다. 듀란 듀란(Duran Duran)의 이국적인 뮤직비디오가 미국의 10대들을 뒤흔들었고, 컬처 클럽(Culture Club) 등 파격적인 비주얼이 매일 밤 방영됐다. 제2차 영국의 침공(The Second British Invasion)이라는 거대한 비주얼 공습은 그렇게 미국 안방 한가운데서 조용하고도 강렬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1981년은 아직 '팝의 여왕' 마돈나(Madonna)가 혜성처럼 등장해 화면을 지배하기 전이었다. 초기 MTV는 록 중심의 편성 때문에 백인 록과 뉴웨이브 아티스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 틈을 메운 것은 로드 스튜어트와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같은 영국의 비주얼 아티스트들, 그리고 미국 라디오의 패권을 쥐고 있던 REO 스피드웨이건(REO Speedwagon)과 스틱스(Styx) 같은 백인 록 밴드들이었다. 이들은 MTV가 내건 '록앤롤'의 기치 아래 반복 재생되며 초기 채널의 뼈대를 지탱했다.

 

그러나 MTV의 음악적 지형은 곧 변하기 시작했다. 1983년 3월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Billie Jean'이 MTV의 로테이션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면서 흑인 아티스트가 MTV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달라졌다. 영국의 뉴웨이브와 미국의 흑인 팝이 MTV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만나면서, 음악은 더 이상 단순히 '듣는 음악'에 머물지 않고 '보는 음악'으로 완전히 확장됐다.

 

그런데, 1981년 8월 MTV가 파산 위기에 처한다. 미 전역의 케이블 방송사들이 24시간 뮤직 비디오 채널의 송출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몰린 MTV는 "I Want My MTV!(내 MTV를 틀어줘요!)" 광고 캠페인을 기획하고, 데이빗 보위를 섭외해 스위스 알프스 스키장에서 광고를 찍었다. 그리고, 보위의 광고는 MTV를 기사회생시키게 된다. 

 

 

#영국 밴드의 빌보드 차트 점령

 

제2차 영국의 침공에서 주무기는 신디사이저 중심의 팝음악과 뮤직비디오였다. 듀란 듀란(Duran Duran), 휴먼 리그(Human League), 컬처 클럽(Culture Club), 유리스믹스(Eurythmics), 더 폴리스(The Police), 스판다우 발레(Spandau Ballet) 등이 잇따라 빌보드 차트를 점령했다.

 

1983년 7월 16일자 빌보드 핫 100 차트는 제2차 영국의 침공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톱 10 가운데 무려 7곡이 영국 아티스트 또는 영국 음악계와 연결된 아티스트의 노래였다. 1위는 폴리스(The Police)의 'Every Breath You Take', 2위는 에디 그랜트(Eddy Grant)의 'Electric Avenue', 6위는 킹크스(The Kinks)의 'Come Dancing', 7위는 카자구구(Kajagoogoo)의 'Too Shy', 8위는 매드니스(Madness)의 'Our House', 9위는 듀란 듀란(Duran Duran)의 'Is There Something I Should Know?', 10위는 컬처 클럽(Culture Club)의 'Time (Clock of the Heart)'였다.

 

특히 이 차트는 영국의 압도적인 공세와 동시에 미국 음악의 새로운 반격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5위에는 마이클 잭슨의 'Wanna Be Startin' Somethin''이 올라 있었다. 영국의 뉴웨이브 군단이 MTV 화면과 빌보드 차트를 장악하는 동안, 미국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새로운 비주얼 팝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빌보드 탑 40 차트 중 절반에 해당하는 무려 20곡이 영국 뮤지션들의 노래였다. 이는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가 이끌었던 1965년 6월 19일자 '제1차 영국의 침공' 당시의 최고 기록인 14곡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였다. 당시에는 허만즈 허미츠(Herman's Hermits), 비틀즈(The Beatles), 야드버즈(The Yardbirds), 킹크스(The Kinks) 등이 차트에 포진해 있었다.

 

1983년 7월 16일자 차트는 제2차 영국의 침공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순간이 됐다.  

 

*1989년 2월, '포토뮤직'에서 취재기자로 일할 때 듀란 듀란이 내한공연 'The Big Live Thing Tour'를 열었다. 콘서트 전날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무대를 셋업하는 모습을 취재하던 중 영국인 조명감독과 한국인 스태프 사이의 소통을 잠시 돕게 됐다. 조명감독은 고맙다며 내게 듀란 듀란의 ‘Big Thing’ CD를 선물했다. 당시 내게는 CD 플레이어가 없었다. 그 사실을 함께 일하던 패션 코디네이터 후배에게 말했더니 "내가 녹음 떠다 드릴게요"라며 CD를 가져갔다. 카세트테이프에 음악을 담아주기는 했지만, CD는 결국 돌려받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1989년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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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영국의 침공: 뉴웨이브 공습군

 

"영국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평범하고 딱딱한 느낌을 주던 미국 밴드들과 달리, 듀란 듀란 같은 밴드들은 마치 캐비어처럼 고급스럽고 특별하게 다가왔다. MTV는 라디오만으로는 온전히 느낄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시각적 요소는 영국의 젊은 '스타일의 제왕'들이 가진 예술적 감각을 돋보이게 했고, 시청자들이 살던 동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이국적인 분위기를 선사했다."

—Parke Puterbaugh, Rolling Stone, November 1983

 

음악잡지 Rolling Stone은 1983년 11월호에 '영국 찬미: 제2의 영국발 침공: 미국이 영국에 항복하다—하지만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Anglomania: The Second British Invasion: America Surrenders to the Brits—but Who Really Wins?)'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으며 영국의 승리를 선언했다.

 

초기 MTV는 앨범 록 중심의 편성 때문에 백인 록과 뉴웨이브가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영국의 젊고 스타일리시한 뉴웨이브 공습군이 이 틈을 타 미국 안방의 시청자들을 자극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등장할 새로운 스타들이 이 '록 채널'의 정체성을 글로벌 팝의 무대로 확장시키고 있었다.

 

영국의 젊은 신스팝(*Synth-Pop) 군단이 MTV 화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미국 차트를 점령하고 있을 때, 미국에서는 새로운 비주얼 팝스타들이 등장했다. 그 선두에는 마이클 잭슨이 있었다. 'Billie Jean'과 'Beat It'의 뮤직비디오는 MTV가 흑인 음악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꾸었고, 1983년의 'Thriller' 신드롬은 음악과 영상의 결합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팝의 신데렐라가 등장했다. 1983년 혜성처럼 나타난 댄스 아이콘 마돈나(Madonna)는 데뷔 앨범의 'Borderline'과 'Lucky Star' 뮤직비디오를 통해 MTV 시대를 대표하는 미국의 새로운 비주얼 팝스타로 떠올랐다. 가죽 재킷과 레이스 장갑, 십자가 목걸이를 한 채 춤추며 노래하는 마돈나는 영국 뉴웨이브 밴드들이 만들어놓은 '보는 음악'의 공식을 완벽하게 흡수했다. 그리고 1984년 가을, 마돈나는 제1회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VMA) 무대 위 17피트짜리 웨딩케이크에서 내려와 바닥을 구르며 부른 'Like a Virgin'의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1980년대 글로벌 팝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영국의 뉴웨이브 군단과 마이클 잭슨, 마돈나는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MTV는 음악의 성공 기준을 '얼마나 잘 들리는가'에서 '얼마나 잘 보이는가'로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래미의 음악적 위계와 심사 체계는 이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곧바로 따라가지 못했다.

 

MTV와 빌보드에서는 영국이 미국을 점령했다. 그러나 그래미에서는 영국의 공습군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로드 스튜어트, 엘튼 존, 그리고 조지 마이클은 1980-90년대 초 그래미 스넙(Snub/ 배제, 외면)의 대표적인 영국 스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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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grammy.com

 

#'록-디스코-팝의 카멜레온' 로드 스튜어트 

 

1981년 8월 1일 MTV 개국 첫날 24시간 동안 총 209편의 뮤직비디오가 방영됐다. 중복 재생된 MV를 제외하고는 총 116편. 이중 화면을 가장 많이 장악한 주인공은 뜻밖에도 미국 아티스트가 아니었다. 영국의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는 'Sailing' 'Da Ya Think I'm Sexy?' 'Passion' 'Tonight's the Night (Gonna Be Alright)' 등 무려 11편의 뮤직비디오가 총 16회 방영되며 당일 최다 출연 아티스트가 됐다. MTV 시대를 연 비주얼의 아이콘이 비로소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래미는 그의 찬란했던 전성기 내내 주요 부문(본상) 후보에서 그의 이름을 철저히 제외했다. 

 

로드 스튜어트는 1960년대 초 공동묘지 인부, 장례식장 조수로 일하며 기차역 플랫폼에서 하모니카를 불던 거리의 악사였다. 영국의 블루스 거장 롱 존 볼드리(Long John Baldry)의 눈에 띄어 밴드생활을 시작하는데, 당시 그는 시그내처가 될 딱따구리 헤어 스타일과 뛰어난 패션감각으로 '로드 더 모드(Rod the Mod )'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 1967년 기타리스트 제프 벡(Jeff Beck) 밴드에 합류하며 첫 대형 무대에 섰다. 

 

1960년대 초 공동묘지 인부와 장례식장 조수로 일하던 그는 기차역 플랫폼에서 하모니카를 불던 거리의 악사였다. 그러다 영국의 블루스 거장 롱 존 볼드리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밴드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훗날 자신의 시그니처가 될 파격적인 딱따구리 헤어스타일과 독보적인 패션 감각 덕분에 '로드 더 모드(Rod the Mod, 멋쟁이 로드)'라는 별명으로 이름을 알렸다. 1967년 천재 기타리스트 제프 벡(Jeff Beck) 밴드에 합류하며 첫 대형 무대에 섰지만, 이듬해 뉴욕 첫 데뷔 콘서트에선 긴장감에 못 이겨 무대 대형 앰프 뒤로 숨어 노래를 불러야 했던 무대 공포증 청년이기도 했다.

 

제프 벡과 결별 후 그는 마침내 자신만의 독특한 허스키 보컬을 무기로 홀로서기에 나섰다. 1971년 발표한 솔로곡 '매기 메이(Maggie May)'가 빌보드 핫 100 1위에 올랐고, 이어 'Tonight's the Night'(1976)로 무려 8주간 빌보드 정상을 장기 집권했다. 

 

1979년에는 전 세계를 휩쓴 디스코 곡 'Da Ya Think I'm Sexy?'로 다시 한번 빌보드 톱에 등극했다. 하지만, 레코딩 아카데미의 시선은 싸늘했다. 딱따구리 머리를 흔들고 허스키 보이스로 무대를 휘저으며, 록에서 디스코로 유연하게 갈아타는 그가 보수적인 심사위원들의 눈에는 진지한 아티스트가 아닌 상업성에 눈먼 '철새 스타'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리하여 그의 황금기였던 1970년대는 그래미 후보조차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하는 지독한 가뭄의 시대였다. 

 

그가 처음 그래미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은 전성기가 저물어가던 1980년이었다. '최우수 디스코 레코딩(Da Ya Think I'm Sexy?)'과 남성 팝 보컬, 록 보컬 퍼포먼스 등 3개 부문에 올랐으나, 정작 디스코 상은 글로리아 게이너('I Will Survive')에게, 팝은 빌리 조엘에게, 록은 밥 딜런에게 돌아가며 고배를 마셨다. 이후로도 그래미는 그에게 팝·록·뮤직비디오 부문 후보 자리를 가뭄에 콩 나듯 던져줄 뿐이었다.

 

그래미가 마침내 그에게 첫 트로피를 쥐여준 것은 첫 후보에 오른지 25년이 지난 2005년이었다. 그것도 그의 오리지널 록이 아닌, 미국의 고전 명곡들을 리메이크한 커버 앨범 'Stardust: The Great American Songbook Volume III'으로 '최우수 전통 팝보컬 앨범'을 주었다. 이로써 로드 스튜어트는 통산 15회 후보 지명 중 단 1승을 거두었다. 당시 호주 브리즈번 투어를 준비하고 있던 로드 스튜어트는 그의 생애 첫 그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난 세월 동안 이기지 못한 걸 꽤 즐겨왔지만, 뭐 이제는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겠죠."

 

2008년 빌보드지는 스튜어트를 '빌보드 핫 100 역대 최고 아티스트' 순위에서 17위에 선정했다. 그리고 2016년, 영국의 왕실은 71세 노장의 록 스타에게 최고의 영예인 '경(Sir)' 작위를 수여했다. 

 

그래미는 심지어 그 흔한 평생공로상에도 인색했다. 2025년 5월, 대중의 투표를 기반으로 하는 아메리칸뮤직어워즈(AMAs)가 먼저 로드 스튜어트에게 평생공로상을 바쳤다. 그러자 그래미는 2026년 5월 19일 부랴부랴 허둥지둥 CBS-TV와 특집 헌정 프로그램(Forever Young: A Grammy Salute to Rod Stewart)을 방영했다. 2027 그래미상 시상식에선 진짜 평생공로상을 로드 스튜어트에게 시상하는 장면을 볼 수 있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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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번째 EGOT 달성자 엘튼 존

 

로드 스튜어트보다 두 살 어린 '영국의 피아노 맨' 엘튼 존(Elton John)은 '미국의 피아노 맨' 빌리 조엘(Billy Joel)과 비교당해 온 숙명의 라이벌이다. 그러나, 그래미가 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엘튼 존보다 두 살 어린 뉴요커 빌리 조엘은 1979년 명반 'The Stranger'의 메가 히트곡 'Just the Way You Are'로 그래미 최고 본상인 올해의 레코드와 노래를 단숨에 석권했다. 이듬해엔 '52nd Street'로   올해의 앨범과 최우수 팝보컬 퍼포먼스를 거머쥐었고, 1981년에는 'Glass Houses'로 다시 한번 올해의 앨범 후보에 오르며 최우수 록보컬 퍼포먼스 트로피를 받아 간 '그래미의 달링(Grammy Darling)'이었다.  

 

조엘은 그 후로 통산 23회 후보 지명에 그치며 트로피를 추가하지 못했고, 1993년을 끝으로 신곡 발표를 중단했다. 과거의 유산 속에서 투어를 지속해오던 중 지난해엔 뇌 질환으로 콘서트를 중단해야 했던 '단거리 주자'로 남았다. 반면, 엘튼 존은 그래미 스넙이었고, 세대를 불문하고 끝없이 트랙을 달려온 독보적인 '마라톤 주자'였다. 

 

1970년 전반기 미국의 음반 시장은 엘튼 존이 휩쓸었다. 1972년 그의 시그니처 송이 될 'Rocket Man'이 수록된 'Honky Château'로 빌보드 200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후, 1975년 'Rock of the Westies'까지 7개의 앨범이 연속으로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싱글 차트 역시 'Crocodile Rock'(1972), 'Goodbye Yellow Brick Road'(1973), 'Bennie and the Jets'(1974),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1974) 등이 줄지어 빌보드 핫 100 정상에 오르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레코딩아카데미의 성벽은 엘튼 존의 질주 앞에서 차갑고, 견고했다.  잔혹사는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엘튼 존은 그해 올해의 앨범, 신인상, 최우수 팝 보컬의 3개 후보에 올랐으나, 그해 그래미는 사이먼 앤 가펑클(Bridge Over Troubled Water)에게 본상을 몰아주었고, 신인상마저 카펜터스에게 내어주며 그를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특히 1973년 발표된 불멸의 걸작인 더블 앨범 'Goodbye Yellow Brick Road'의 패싱은 치욕적인 외면(Snub)이었다. 타이틀곡을 비롯해 훗날 다이애나 비 추모곡으로 더 유명해질 'Candle in the Wind', 'Bennie and the Jets' 등이 실려 세계적으로 2천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고, 롤링스톤지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500'에서 112위에 랭크된 이 걸작 앨범은 그래미 후보에서 통째로 누락됐다.  

 

게다가 1976년 10월 엘튼 존은 롤링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양성연애자라고 커밍아웃한 후 상황은 악화됐다. 그래미 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미 중남부와 AM 라디오에선 그의 음악을 제외하거나, 방송 횟수를 줄이기 시작했으며, 일부 극성팬들은 그의 앨범과 포스터를 폐기하는 등 반발했다. 이미지 타격으로 심신이 지친 엘튼 존은 1977년 11월에 라이브 공연 은퇴를 선언했다. 

 

엘튼 존은 1980년 9월 센트럴파크에서 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대규모 무료 콘서트를 열며 무대로 돌아왔다. 도널드 덕 의상을 입고 피아노를 부술 듯 연주하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다시 선보이자 대중은 그의 사생활 대신 음악과 무대에 다시 열광하게 된다. 

 

그가 그래미 수상자 명단에 처음 이름을 올린 것은 전성기가 한참 지난 1987년에 이르러서였다. 그것도 독자적인 성과가 아니라 디온 워윅, 스티비 원더, 글래디스 나이트와 함께 에이즈(AIDS) 기금 모금을 위해 녹음한 이벤트성 싱글 'That's What Friends Are For'의 팝 듀오/그룹 부문 공동 수상이었다. 1992년이 되어서야 엘튼 존은 'Basque'라는 곡으로 첫 독자적인 연주곡 작곡상을 건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의 마라톤은 멈추지 않았다. 1995년 뮤지컬 영화 '라이온 킹'의 삽입곡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과 'Circle of Life'로 두곡이 동시에 올해의 노래에 지명되는 기염을 토했으나, 표가 갈라지는 바람에 브루스 스프링스틴(Streets of Philadelphia)에게 넘겨주게 된다. 결국 그해에도 팝보컬 퍼포먼스 상 하나만 쥐고 돌아섰을 뿐이다. 이후 1998년 다이애나 왕세자비 추모 버전의 'Candle in the Wind 1997'로 팝 보컬상을, 2001년 '아이다(Aida)'로 뮤지컬 시어터 앨범상을 공동 수상하며 명맥을 이었다.

 

2018년 고별 월드 투어 'Farewell Yellow Brick Road'를 시작한 엘튼 존은 팬데믹을 거쳐 2023년 7월 스웨덴 스톡홀름 공연을 끝으로 330회에 달하는 역사적인 대장정의 투어를 마쳤다. 그리고 그의 멈추지 않는 마라톤 커리어는 최근까지도 계속되었다. 그의 음악 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 'Elton John: Never Too Late'의 주제가로 2026년 그래미 비주얼미디어 최우수 곡과 최우수 전통 팝보컬 앨범 후보에 동시에 지명되며 지치지 않는 생명력을 전 세계에 과시한 것이다. 마침내 2024년 1월, 엘튼 존은 라이브 실황 다큐멘터리로 에미상(Emmy)까지 거머쥐며  19번째로 TV, 음악, 영화, 연극의 4대 상인 'EGOT(에미·그래미·오스카·토니상)'을 석권한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통산 37회라는 그래미 후보 지명 속에서도, 정작 음악계의 최고 상인 '빅 4(올해의 앨범·레코드·노래·신인상)' 타이틀은 단 하나도 받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로 남아야 했다. 그래미는 1999년 평생공로상 대신 그래미레전드상(Grammy Legend Award)을 주었다.

 

그래미는 무대 위에서 거대한 색안경을 쓰고, 깃털 옷을 입은 채 피아노를 부술 듯 무대를 휘젓던 한 영국 아티스트의 화려한 쇼맨십을 끝내 거대하고 보수적인 색안경을 낀 채 거부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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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마이클: 틴 아이돌에서 진정한 아티스트로 

 

가죽 재킷, 부츠, 십자가 귀걸이, 텁수룩한 수염, 그리고 보잉 선글라스.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 1963-2016)은 자신의 데뷔 앨범 첫 트랙 제목처럼 팝계의 '악동(Bad Boy)'이자, '그리스 신(Greek god)' 같은 야누스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 스타였다. 하지만, 그 역시 엘튼 존처럼 그래미의 철저한 아웃사이더였고, 퀸의 프레디 머큐리처럼 출생부터 뼛속까지 이방인이었다. 

 

조지 마이클의 음악적 궤적은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 1946-1991)와 평행이론을 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영미 팝계의 철저한 앵글로색슨 주류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국식 이름으로 활동해야했던 태생적 아웃사이더들이었다. 아프리카 잔지바르(현 탄자니아)의 인도계 페르시아인 가정에서 태어나 1964년 혁명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한 '파록 불사라(프레디 머큐리)'. 그리고 1950년대 영국으로 이민한 그리스계 사이프러스인 가정에서 태어나 본명이 '게오르기오스 키리아코스 파나요투'였던 조지 마이클. 성소수자라는 비밀을 품은 채 무대 위에선 섹스 심벌로 소비되어야 했던 두 전설, 그리고 신이 내린 가창력까지 두 사람은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래미는 이 위대한 이방인들을 약속이나 한 듯 외면했다. 

 

10대 시절, 조지 마이클은 뮤지션을 꿈꾸던 동창 앤드류 리즐리(Andrew Ridgeley)를 만나 듀오 왬!(Wham!)을 결성했다. 왬!은 1983년 데뷔 후 'Wake Me Up Before You Go-Go', 'Careless Whisper', 'Everything She Wants' 등 3곡을 잇따라 빌보드 핫 100 1위에 올려놓았고, 'Freedom'과 'Last Christmas'를 각각 2위와 3위에 랭크시키며 MTV 화면을 지배했다. Wham!은 듀오였지만, 음악적으로는 사실상 조지 마이클의 프로젝트에 가까웠다. 앤드류 리즐리는 기타와 백킹 보컬을 맡았고, 일부 곡을 공동 작곡했지만, 히트곡의 작사·작곡과 프로듀싱은 대부분 조지 마이클의 몫이었다.

 

이후 틴 아이돌(Teen Idol)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솔로 활동을 시작한 조지 마이클은 'Faith', 'Father Figure', 'One More Try', 'Monkey' 등을 줄지어 빌보드 정상에 올리며 솔로 통산 7곡의 빌보드 1위 기록을 썼다. 왬! 시절의 히트곡 'Carelss Whisper'(1985)와 솔로곡 'Faith'(1988)로 빌보드 연말 Hot 100 차트 1위를 두번이나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로써 1980년대 전 세계 대중음악계는 미국의 흑인 마이클(마이클 잭슨)과 영국의 백인 마이클(조지 마이클)이라는 두 명의 위대한 마이클이 양분하는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그래미는 이 백인 마이클마저 철저히 패싱했다. 단 두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 왬! 시절을 포함해 통산 9회 후보에 올랐던 조지 마이클은 1988년 아레사 프랭클린과의 듀엣곡 'I Knew You Were Waiting (For Me)'으로 R&B 보컬 부문 상을 받았고, 이듬해인 1989년 솔로 데뷔작 'Faith'로 마침내 최고 본상인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을 석권했다. 가죽 재킷을 입은 섹스 심벌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이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2천 500만 장 이상이 팔려나가는 기념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진짜 잔혹사는 '올해의 앨범' 왕관을 쓴 이후 시작되었다. 1990년, 조지 마이클은 미디어가 소비하는 섹스 심벌 이미지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오직 음악 그 자체로 인정받기 위해 새 앨범 'Listen Without Prejudice Vol. 1(편견 없이 들어라)'을 출반했다. 그는 거대한 도발을 시도했다. 앨범 재킷에서 자신의 얼굴을 대신 1930년대 군중들의 흑백 사진을 넣었고, 메가 히트곡 'Freedom! '90'의 뮤직비디오에는 본인이 단 한 장면도 출연하지 않았다. 대신 나오미 캠벨, 신디 크로포드, 린다 에반젤리스타 등 당대 최고의 수퍼모델들을 내세워 자신의 전성기를 상징하던 주크박스와 가죽 재킷을 불태워버리는 파격적인 비디오를 공개했다.  

 

이 앨범은 영국 차트 1위, 빌보드 앨범 차트 2위까지 올라갔고 평단으로부터 '팝 역사상 최고의 명반'이라는 극찬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래미는 비주얼을 거부하고 진지해진 이 영국 청년을 배척했다. 그래미는 조지 마이클을 단 하나의 후보에도 지명하지 않았다. 비주얼을 앞세우면 '상업적'이라며 패싱하고, 비주얼을 지우고 음악성으로 승부하면 '오만하다'며 외면하는 것이 그래미의 이중성일까?

 

그래미 홀대(Snub)의 상처 속에서 조지 마이클은 거대 자본 권력인 소속사 소니(Sony) 레코드를 "전문적인 노예제(Professional Slavery)"라 혹독하게 비판하며 계약 해지를 위한 법정투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1994년 소니의 승리로 끝나며 수백만 파운드의 소송비용까지 떠안은 채 혹독한 암흑의 터널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조지 마이클이 거대 음반 권력에 맞서 창작자의 자유와 권리를 세계적인 공론장으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이 소송은 대중음악 비즈니스 역사에 거대한 이정표를 남겼다. 

 

1992년,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 무대 위에서, 조지 마이클은 퀸의 'Somebody to Love'를 부르며 같은 선배 머큐리의 영혼을 환생시켰다. 그것은 이방인 거장들이 나눈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교감이었다. 이후 1993년 엘튼 존과 함께 부른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로 다시 한번 그래미 팝 보컬 퍼포먼스(듀오/그룹) 부문 후보에 올랐으나, 셀린 디온과 피보 브라이슨이 부른 영화 '미녀와 야수' 주제가에 밀려 고배를 마셔야 했다. 

 

1998년 본의 아닌 커밍아웃 이후, 조지 마이클은 자신을 체포한 공공장소 외설 혐의 스캔들을 유머러스하게 패러디한 뮤직비디오 'Outside'를 공개했다. 그는 위선적인 주류 사회의 벽과 당당히 맞서 싸우다, 2016년 크리스마스 날 거짓말처럼 눈을 감았다. 그날은 위대한 아티스트 조지 마이클의 '라스트 크리스마스'였다.

 

 

#'그래미 최후의 성찬'과 제 3차 영국의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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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정점을 찍었던 제2차 영국의 침공은 1980년대 후반 들어 서서히 막을 내렸다. MTV와 뉴웨이브, 신스팝과 록이 주도했던 제2차 침공의 대미를 장식한 인물은 조지 마이클이었다. 1989년 제31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그는 솔로 데뷔작 'Faith'로 최고 본상인 '올해의 앨범'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같은 해 올해의 레코드와 노래는 목소리와 휘파람만으로 평화를 노래한 바비 맥퍼린의 'Don't Worry, Be Happy'가 휩쓸었고, 신인상은 미국 사회의 이면을 노래한 포크 싱어 트레이시 채프먼에게 돌아갔다. 영국이 그래미의 최고상인 '빅 4(Big Four)' 가운데 마지막으로 지켜낸 보루가 바로 '올해의 앨범'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이것은 그래미가 영국에 선사한 제2차 침공, 그 ‘최후의 성찬’이었을지도 모른다. 영국 뉴웨이브 군단이 물러난 자리에서, 그 침공의 마지막 세대가 된 영국 솔로 거장이 거둔 위대한 승리였다. 이후 미국의 대중음악 차트는 다시 마돈나, 마이클 잭슨, 휘트니 휴스턴, 자넷 잭슨, 머라이어 캐리 등 미국 팝스타들의 시대로 빠르게 회귀했다. 대중이 뉴욕 브롱스에서 태어난 길거리의 거친 힙합과 시애틀발 그런지 록(*Grunge Rock) 혁명에 열광하는 동안, 보수적인 그래미는 이 거친 소음을 피해 다시 한번 안전한 성벽 안으로 숨어버렸다. 

 

그래미는 1990년대 중반까지 바비 맥퍼린, 나탈리 콜, 베트 미들러, 에릭 클랩튼, 토니 베넷, 셰릴 크로우 등 성인 취향의 팝, 소프트 록, 발라드와 전통적 음악성에 가까운 아티스트들에게 본상 트로피를 잇따라 안겼다. 청년들의 길거리 문화를 대변하는 빌보드 차트와 박물관 속 취향을 고수하는 그래미의 시선 사이에 다시 한번 거대한 간극이 벌어진 것이다. 

 

미국의 대중이 이 정제된 발라드의 안온함과 그런지 록의 지독한 우울함 모두에 깊은 피로감을 느낄 무렵인 1996년 말, 저 멀리 영국 해협 너편에서 전 세계 대중음악사의 판도를 바꿀 새로운 복병들이 나타났다. 미국인들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극단의 비주얼과 찬란한 팝 사운드, 그리고 전 지구적 규모의 청소년 팬덤을 거느린 다섯 명의 영국 소녀들, 이른바 '제 3차 영국의 침공'을 주도한 여전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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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파워(Girl Power) 신드롬, 스파이스 걸즈 - 후보 0회

 

스케어리, 스포티, 베이비, 진저, 포쉬로 구성된 5인조 걸그룹 스파이스 걸즈(Spice Girls)는 1996년 7월 영국에서 데뷔 싱글 'Wannabe'를 발표하자마자 '걸 파워(Girl Power)' 신드롬을 일으켰다. 전 세계에서 2천200만 장 이상이 팔려나간 이들의 데뷔 앨범 'Spice'는 영국 차트에서만 15주간 정상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7년 벽두, 스파이스 걸즈는 미국에 상륙했다.

 

1997년 1월 빌보드 핫 100 싱글 차트에 역사적인 11위로 진입한 ‘Wannabe’는 단숨에 수직 상승, 4주 연속 정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당시 영국 그룹의 미국 데뷔 싱글 진입 순위 중 비틀즈의 'I Want to Hold Your Hand'가 기록한 12위 이후 가장 높은 기록이다. 이어 ‘Say You’ll Be There’가 3위, ‘2 Become 1’이 4위까지 치고 올라가며 미국 차트를 점령했다. 

 

데뷔 앨범 'Spice' 역시 미국 빌보드 200 앨범 차트에서 5주간 1위에 랭크된 것을 넘어 팝 역사상 걸그룹의 데뷔 앨범 최초로 '1997년 빌보드 연말결산 앨범차트 최종 1위'라는 기록을 세웠다. 기세를 몰아 발매된 2집 'Spiceworld'마저 빌보드 3위를 기록하면서 이들은 1집과 2집을 빌보드 Top 10에 동시에 올려놓았다. 이는 영국 밴드로서는 1975년 롤링스톤즈 이후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스파이스 걸즈는 단순한 음악적 침공을 넘어서 당시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 취임과 함께 시작된 문화적 부흥기 '멋진 영국(Cool Britannia)'를 대표하는 얼굴이 되었다. 1997년 영국의 그래미상이라 불리는 브릿 어워드(Brit Awards) 무대에서 멤버 제리 할리웰이 입고 나온 영국 국기 유니언잭(Union Jack) 드레스는 그 시대의 집약적인 상징이었다. 

 

당시 이들이 전면에 내세운 모토 '걸 파워'는 페미니즘 진영 내에서도 뜨거운 화두였다. 한편에서는 이들이 여성들의 주체성과 연대감을 대중 문화의 영역으로 끌어내려 강화했다는 찬사가 쏟아졌고, 다른 편에서는 그저 통굽 부츠와 음반을 팔아치우기 위해 급조된 '상업적 페미니즘(Commodity Feminism)'에 불과하며, 파격적인 의상과 안무는 결국 남성의 시선(Male Gaze)을 의식한 기획 상품일 뿐이라는 냉혹한 비판이 공존했다.

 

그렇다면 그래미는 스파이스 걸즈의 거대한 폭풍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앞서 조지 마이클이 온몸으로 저항했던 '틴 아이돌'을 향한 그래미의 고질적인 편견은 오디션으로 기획된 걸그룹과 이들을 추종하는 거대한 청소년 팬덤 앞에서도 문을 걸어 잠구었다. 전 세계 음악시장과 미 음반 산업의 지도를 바꾼 이 여전사들은 자신들의 커리어 내내 그래미 후보 명단에 단 한 번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통산 '0회 노미네이트'의 이력을 남겼다. 

 

미 레코딩아카데미의 폐쇄적인 패싱과 달리 스파이스 걸즈가 남긴 상업적·문화적 성공은 전 세계 대중음악계의 패러다임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들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걸쳐 영국과 유럽, 미국, 호주, 그리고 한국에 이르기까지 전 지구적인 걸그룹 대홍수 시대를 개막했다. 올 세인츠(All Saints), 비위치드(B*Witched), 아토믹 키튼(Atomic Kitten) 등 1999년 영국에서만 약 20개, 이듬해에는 무려 35개의 걸그룹이 쏟아져 나왔다.

 

이 거대한 나비효과는 한국의 가요계까지 이어졌다. 1세대 걸그룹 베비복스(Baby V.O.X)와 후대의 에프엑스(f(x))는 스파이스 걸즈가 구축한 다채로운 멤버별 캐릭터 분화 공식을 모티브로 삼았다. 이후 투애니원(2NE1), 소녀시대, 그리고 블랙핑크(Blackpink)의 정체성 역시 스파이스 걸즈가 심어놓은 '걸 파워'의 DNA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스파이스 걸즈는 미국에서는 백스트리트 보이즈(Backstreet Boys), 엔싱크(NSYNC) 같은 보이밴드와 브리트니 스피어스, 크리스티나 아귈레라로 이어지는 대규모 '차세대 틴 팝(Teen Pop) 황금기'를 촉발시켰다. 2000년 브릿 어워드는 스파이스 걸즈에게 1990년대 세계 음악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업적을 기리며 '음악공헌상(Outstanding Contribution to Music Award)'을 헌정했다. 그래미의 철저한 지우기 속에서도 스파이스 걸즈의 거침없는 플랫폼 부츠 자국은 이미 대중음악사에 불멸의 발자국으로 선명하게 각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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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스 걸스(Spice Girls)의 불꽃이 시들해질 즈음 미국에선 틴 아이돌의 열풍이 불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와 크리스티나 아귈레라(Chritina Aguilera), 보이밴드 백스트릿 보이즈(Backstreet Biys)와 NSYNC가 팝을 장악하더니, 2000년대 들어서서는 데스티니즈 차일드(Destiny's Child), 어셔(Usher), 알리시아 키즈(Alicia Keys), 머라이아 캐리(Mariah Carey), 저스틴 팀버레이크(Justin Timberlake), 비욘세(Beyoncé), 제이-지(Jay-Z), 에미넴(Eminem) 등 R&B와 힙합 스타들이 부상했다. 

 

2002년 4월 27일, 약 40년 만에 빌보드 핫 100에서 영국 아티스트가 자취를 감췄다. 5월 4일 주간까지 2주 연속 영국 아티스트가 단 한 명도 없는 이례적인 주간, 'UK 음악의 진공 상태'가 되었다. 1963년 11월 2일 이후 처음이었다.

 

그 공백 끝에 2007년, 재즈와 소울로 무장한 영국 아티스트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가 등장했다. 그리고, 이어서 아델(Adele), 에드 쉬런(Ed Sheeran), 샘 스미스(Sam Smith)처럼 어쿠스틱 기타를 매거나 빈티지 소울을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들이 도래했다. 그래미는 이들에게 흔쾌히 본상 트로피를 선사했다. 

 

그러나, 영국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을 통해 결성된 5인조 보이밴드 '원 디렉션(One Direction)'은 철저히 그래미의 홀대(Snub)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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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디렉션: 소셜미디어 시대의 수퍼스타 보이 밴드 - 후보 0회

 

2010년 프로듀서 사이먼 코웰(Simon Cowell)이 영국의 TV 오디션 프로그램 '엑스 팩터(The X Factor)'를 통해 탄생시킨 보이밴드 원 디렉션(One Direction)은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라는 완전히 새로운 모바일 생태계를 타고 세상 밖에 나왔다. 다섯 명의 10대 소년(해리 스타일스, 나일 호란, 리암 페인, 루이 톰린슨, 제인 말릭)들은 트위터와 유튜브를 기반으로 한 전 지구적 규모의 강력한 글로벌 팬덤을 구축하며 메인스트림 시장에 화력을 과시했다. 

 

이들이 써 내려간 빌보드의 기록들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2011년 데뷔 싱글 'What Makes You Beautiful'로 영국 싱글 차트 1위에 오르며 폭풍을 예고한 이들은 데뷔 앨범 'Up All Night'으로 미국 빌보드 200 앨범 차트 정상에 등극했다. 이후 'Take Me Home'(2012), 'Midnight Memories'(2013), 'Four'(2014)까지 발표한 네 장의 정규 앨범을 모두 연속으로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로 진입시킨 팝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밴드가 되었다. 

 

무대 밖의 경제적·문화적 파급력 역시 상상을 초월했다. 2014년 월드 투어 'Where We Are Tour'는 무려 2억 9,000만 달러의 티켓 수익을 올리며 그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매출을 기록한 콘서트 투어로 기록됐다. 2015년에는 빌보드 핫 100 싱글 차트에서 다섯 번째로 'Top 10 데뷔'를 달성하며 이 부문 비틀즈가 보유했던 기록을 갈아치웠다. 2016년 팀의 공식적인 활동 중단(Hiatus) 선언으로 신곡과 투어가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포브스 선정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린 셀러브리티' 1위를 차지할 만큼 이들의 브랜드 가치는 철옹성 같았다. 

 

나아가 2017년에는 솔로로 독립한 멤버 중 무려 3명(해리, 제인, 나일)이 각각 솔로 앨범으로 빌보드 1위를 차지함으로써 비틀즈 이후 최초로 팀과 솔로 모두 차트를 정복한 역사적 동률을 이루기도 했다.

 

미국 대중의 투표로 결정되는 아메리칸뮤직어워드(AMAs)는 이들의 업적을 인정해 2014년과 2015년, 2년 연속으로 최고 영예인 '올해의 아티스트(Artist of the Year)' 상을 바쳤다. 막대한 팬덤의 화력과 대중적 패권은 훗날 2021년 아시안 최초로 AMAs '올해의 아티스트'를 수상하고, 2026년 두 번째로 이 상을 거머쥐는 K팝의 수퍼스타 BTS의 대기록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게 된다.

 

원 디렉션은 2015년 12월 31일,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열린 '딕 클라크의 뉴 이어스 로킹 이브' 무대를 마지막 TV 출연으로 남겨둔 채 활동 중단에 들어갔다.

 

그러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그래미의 시선은 차가웠다. 원 디렉션이 전 세계 곳곳의 거대 스타디움을 매진시키고 팝 산업의 지도를 디지털로 재편하며 새로운 기록을 세우던 5년의 전성기 내내, 그래미는 완고하게 성문을 걸어 잠갔다. 가장 권위 있는 본상의 빅 4(Big 4)은커녕, 팝이나 록 같은 장르별 하위 부문에서조차 단 한 장의 후보 카드도 끼워주지 않는 철저한 외면을 고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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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미가 이토록 원 디렉션을 철저하게 배척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 레코딩 아카데미가 10대 지지층에 대해 품고 있는 '팬덤 포비아(Fandom Phobia)'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팬덤의 압도적인 규모가 오히려 그래미의 보수적 심사 기준과 충돌했을 가능성이 있다.

 

오랫동안 중장년층 백인 남성들이 주류를 차지해 온 레코딩 아카데미는 자신들을 위대한 대중음악의 최후를 지키는 관문이자 권위 있는 '문지기(Gatekeeper)'로 정의한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으로 무장한 거대한 디지털 팬덤은 이러한 아카데미의 고리타분한 권위를 비웃으며, 자신들의 조직적인 화력(스트리밍, 음반 총공, 글로벌 투어 매진)으로 음악 시장의 판도를 밑바닥에서부터 주도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기득권과 엘리트주의에 젖어 있던 그래미에게 이 통제 불능의 강력한 대중 권력은 자신들의 영토를 침해하는 거대한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또한, 레코딩 아카데미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기획사의 손에 의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보이밴드와 걸그룹을 '진정한 아티스트'가 아니라, 공장에서 찍어낸 일회성 '기획 상품(Manufactured Gimmick)'이라 폄하하며 외면해 왔다. 대신 이들은 어두운 방구석에서 고뇌하며 통기타를 튕기거나 피아노 앞에서 고독하게 음악을 자아내는 싱어송라이터의 아날로그적 이미지에 로망을 품고 표를 던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미가 화려한 군무를 추는 보이밴드와 걸그룹, 스타디움 록 스타들의 역동성을 본능적으로 거부해 온 구조적 배경이다. 레코딩 아카데미는 10대 소녀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열광하는 ‘보이밴드(Boy Band)’라는 장르적 꼬리표가 붙는 순간, 그들이 구사하는 세련된 팝/록 사운드와 뛰어난 자작곡 능력을 아예 심사 대상에서 누락시키거나 깎아내렸다. 거대한 대중적 팬덤이 음악적 예술성을 증명하는 훈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을 가려버리는 그래미 특유의 유구한 색안경이자 편견이었다.

 

 

그들의 편견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1950년대 말 엘비스 프레슬리와 초기 로큰롤의 혁명을 패싱했고, 1970-80년대 차트의 제왕 마이클 잭슨의 본질을 배제했으며, 조안 바에즈와 니나 시몬이 노래한 시대의 묵직한 정치적 메시지에는 아예 귀를 닫았다. 1960년대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꾼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 더 후와 레드 제플린, 그리고 1970년대 자이언트 퀸에 이르기까지, 그래미는 음악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꾼 새로운 문법 앞서 언제나 성문을 걸어 잠갔다. 

 

음악의 중심이 라디오에서 비주얼(MTV)로 전환되는 대격변의 시대에도 눈을 감아버린 채 로드 스튜어트와 엘튼 존의 화려한 쇼맨십을 홀대했고, 1990년대 아이돌에서 탈피하려는 조지 마이클의 예술적 자립마저 외면했다. 그리고, 그 오래된 'UK 팝 및 팬덤 혐오'의 장벽으로 스파이스 걸즈와 원 디렉션이라는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을 그래미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수십 년간 축적된 그래미의 이 공고한 제도적 바리케이드와 장르적 편견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미국의 메인스트림 심장부에 당도하여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노래하며 칼군무와 전 지구적 아미(ARMY) 팬덤을 거느린 K팝 수퍼스타 BTS가 마주하게 될 거대한 절벽의 역사적 거울이자 예고편이었다. 

<계속>

 

 

<용어 해설>

#어덜트 컨템포러리(Adult Contemporary, AC): 1970년대 미 대중음악계를 지배했던 성인 청취자 타깃의 부드럽고 세련된 대중음악 장르. 멜로디가 아름답고 자극적이지 않으며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팝 발라드나 이지리스닝 음악을 통칭한다. 날카로운 일렉기타 소리나 강렬한 드럼 비트를 철저히 배제하고, 어쿠스틱 기타, 피아노, 부드러운 현악기, 감미로운 보컬 화성을 중심에 둔다. 휴식을 취할 때나 운전할 때 배경음악(BGM)으로 듣기 가장 좋은 음악. 카펜터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배리 매닐로우, 닐 다이아몬드가 대표 아티스트. 

#어덜트 컨템포러리 록(Adult Contemporary Rock/ Soft Rock/ AOR): 부드러운 AC 감성을 '록(Rock)' 밴드 포맷에 이식한 장르. 매끄러운 기타 톤,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 완벽하게 조율된 스튜디오 녹음 상태가 특징이다. 이글스, 플리트우드 맥, 시카고, 두비 브라더스(The Doobie Brothers) 등이 이에 속한다.  

#요트 록(Yacht Rock):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 서해안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극도로 세련되고 매끄러운 소프트 록/AOR의 하위 장르. 부유한 중산층이 요트를 타고 샴페인을 마시며 바다를 항해할 때 흘러나올 법한 음악이라는 이미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세일링을 연상시키는 낙천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에 정교한 사운드로 록, 재즈, R&B와 소울의 그루브를 혼합한 퓨전 장르다. 크리스토퍼 크로스 (Christopher Cross), 마이클 맥도널드(Michael McDonald)와 두비 브라더스(The Doobie Brothers), 토토(Toto)가 이에 대표적이다.  

#뉴 웨이브(New Wave): 1970년대 말 펑크록의 반항정신을 유지하면서 팝, 재즈, 디스코, 레게 등 다양한 장르를 잡식성으로 흡수했다. MTV 개국과 맞물려 화려한 메이크업, 파격적인 패션, 독창적인 뮤직비디오 등 '시각적 비주얼 혁명'을 전면에 내세웠다. 듀란 듀란, 컬처클럽, 폴리스, 블론디 등이 이에 속한다. 

#신스팝(Synth-pop/ synthesizer pop/ techno-pop): 전통 록밴드의 핵심인 일렉트릭 기타와 베이스 대신 신디사이저(Synthesizer)와 드럼 머신 등 전자 악기를 전면에 내세웠다. 뉴웨이브 사조 안에서 파생된 하위 장르다. 미래지향적이며, 기하학적인 전자 음향이 특징이다. 특유의 차가우면서도 낭만적인 도시적 감수성으로 훗날 댄스 팝과 일렉트로닉 음악의 직계 조상이 된다. 휴먼 리그(The Human League), 소프트 셀(Soft Cell), 유리스믹스(Eurythmics), 카자구구(Kajagoogoo)가 대표적이다. 

#그런지 록(Grunge Rock): 1980년대 말 시애틀에서 탄생한 장르로 화려함을 거부하며, 거칠은 기타 톤과 날 것 그대로의 드럼 비트를 전면에 내세웠다. 헤진 체크무늬 플란넬 셔츠, 찢어진 청바지, 군화같은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소외감, 우울증, 분노 등 젊은이들의 고통을 대변했다. 이는 그런지 룩이라는 패션 신드롬으로 이어졌다. 1991년 9월 시애틀 출신의 3인조 밴드 너바나(Nirvana)가 발표한 'Smells Like Teen Spirit'가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를 밀어내고 1위를 차지했다. 이에 대해 평론가들은 "길거리의 분노한 아웃사이더들이 거대 자본의 팝 제국을 무너뜨린 음악적 혁명"이라 불렀다. 

 

 

*BTS '아리랑 월드 투어' 5월 세계 그룹 사상 최고 매출 기록

*2026 아메리칸뮤직어워드(AMA)와 'K팝의 침공(KPop Invasion)'

*그래미상 2027부터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부문 신설

 

*한국 EGOT (BIG 4) 국가 공인...골든(케데헌) K팝 사상 최초 그래미상 수상 

*롤링스톤: K-Pop의 경이로운 한해를 정의한 10가지 순간들, 2025

*아리랑(Arirang)의 여정: 하워드대 7인에서 나운규를 거쳐 BTS까지 <Korean version>

*Arirang's Journey: From 'The Howard Seven' to Na Woon-gyu and BTS <English version> 

*'올해의 아티스트' 후보 BTS, 2026 아메리칸뮤직어워드(AMA, 5/25)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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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를 이해하는 33가지 코드: BTS, 기생충, 그리고 오징어 게임을 넘어서 

#26 비틀즈 Vs. 방탄소년단 The Beatles vs. BTS

1960년대 비틀즈(The Beatles)와 오늘의 보이밴드 BTS를 비교한다. 빌보드 No. 1, HOT 100, 베스트셀링 앨범, 비틀 매니아와 BTS 팬클럽 ARMY까지. 그리고, 2022년 6월 휴지기 선언 후 홀로서기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하며 정국, 제이홉, RM, 슈가, 뷔, 지민, 진은 새로운 챕터를 열었다. 

https://www.nyculturebeat.com/?mid=Focus&document_srl=4087049

 

 

33 Keys to Understanding the Korean Wave: Beyond BTS, Parasite and Squid Game 

#26 비틀즈 Vs. 방탄소년단 The Beatles vs. BTS

A comparison between the 1960s Beatles and today's boy band BTS. Billboard No. 1, HOT 100, best-selling album, lyrics, and Beatlemania & BTS ARMY. 

https://www.nyculturebeat.com/?mid=Zoom&document_srl=4100896

 

#26. The Beatles vs. BTS   365

The Beatles vs. BTS by the Numbers   365

From Liverpool to Seoul: Two Boy Band Phenomena   365

Supergroup Comparison: The Beatles and BTS   366

1. Billboard Charts    368

2. YouTube Views    371

3. Bestselling Album    372

4. Music Awards   374

Billboard, AMAs, and MTV VMAs   376

5. Guinness World Records    377

6. Lyrics    378

7. Beatlemania and the BTS ARMY   380

BTS in the COVID-19 Era    382

BTS: Chart-Topping Success    383

BTS: Military Service and Future Plans    385

A Timeless Legacy: The Beatles & BTS   385

 

 

'33 Keys to Understanding the Korean Wave: Beyond BTS, Parasite and Squid Game' 

한류를 이해하는 33가지 코드: BTS, 기생충 그리고 오징어 게임을 넘어서

https://www.youtube.com/watch?v=29auuZ2a_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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