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와 뮤즈 (1) 만 레이(Man Ray)와 '몽파르나스의 키키'
Artist & Muse <1> Man Ray & Kiki de Montparnasse
빵가게 점원에서 '몽파르나스의 여왕'으로
Man Ray in front of a portrait of 'Kiki de Montparnasse', 1954. Photo: Michel Sima
"내가 원하는 것은 양파 하나, 빵 한 조각, 그리고 레드 와인 한병 뿐이랍니다.
저는 항상 이것을 제안할 누군가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몽파르나스의 키키-
'몽파르나스의 키키(Kiki de Montparnasse, 1901-1953)'는 1920년대 파리 보헤미안 작가들의 모델이었다. 키키는 그중에서도 뉴욕에서 온 아티스트 만 레이(Man Ray, 1890-1976)의 뮤즈(Muse)이자 연인이 됐다. 키키의 본명은 알리스 프랭(Alice Prin), 만 레이의 본명은 에마누엘 래드니츠키(Emmanuel Radnitzky).
Man Ray, 흑과 백(Noire et blanche), 1926
1901년 프랑스 와인 산지 부르고뉴(버건디)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알리스 프랭은 할머니 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12살 때 파리로 가서 생모와 살기 시작하면서 빵집 점원으로 일했다. 14살 때 보헤미안 아티스트들의 눈에 띈 후 누드 모델이 된다.
알리스는 화가들의 집성촌 몽파르나스에서 피카소, 모딜리아니, 하임 수틴, 프란시스 피카비아, 알렉산더 칼더, 모이즈 키슬링 그리고 시인 장 콕토, 소설가 헤밍웨이 등과 어울리면서 모델, 나이트클럽 가수, 배우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키키(Kiki)'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28세엔 '몽파르나스의 여왕(Queen of Montparnasse)'으로 불리우게 된다.
한편, 에마누엘 래드니츠키는 1890년 필라델피아의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옷감 공장에서 일했다. 7살 때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로 이주해 자랄 때 엄마는 옷을 직접 만들어 입혔고, 헝겊 쪼가리를 기워 자잘한 생활용품을 만들곤 했다. 이는 훗날 만 레이의 콜라쥬와 회화 기법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는 유대인 차별이 심하던 20대 초에 애칭 '매니(Manny)'와 부르기 간편한 성 '레이(Ray)'로 이름을 바꾸었다. 새 이름 Man Ray에는 '빛의 남자'라는 의미도 있다.
Man Ray, Kiki, 1924(left)/ Man Ray, Self-Portrait
1913년 피카소, 마티스, 세잔, 반 고흐, 고갱, 브라크, 고야, 뒤샹 등의 작품이 소개된 뉴욕 아모리 쇼에서 감흥을 받은 만 레이는 관습을 떨치고 혁신적인 다다(Dada)에 빠진다. 그해 벨기에 출신 시인 아동 라크루아를 만나 결혼했으나, 1919년 이혼했다. 1920년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과 미술 잡지 '뉴욕 다다(New York Dada)'를 발간했다.
마르셀 뒤샹은 1915년 뉴욕으로 이민왔지만, 만 레이는 1921년 파리로 갔다. 몽파르나스에 정착해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어울렸리다가 '몽파르나스의 키키'에 반하게 된다. 이후 10여년간 키키는 만 레이의 연인이자 뮤즈가 되었고, 사진과 실험영화 '이성으로의 회귀(Retour à la Raison)'와 '불가사리(L'Étoile de mer)'에 출연했다.
Man Ray, 앵그르의 바이올린(Le violon d'Ingres), 1924/ Jean-Auguste-Dominique Ingres, The Valpinçon Bather, 1808
'앵그르의 바이올린(Le violon d'Ingres, 1924)'은 고전주의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에 대한 만 레이의 오마쥬다. 앵그르를 찬미했던 만 레이는 앵그르의 누드('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1808)에서 영감을 받고, 앵그르의 취미가 바이올린 연주라는 것에 착안했다. 터번을 감은 키키의 뒷모습을 잡고, 사진 인화지에 바이올린의 F 구멍을 그린 후 다시 인화지를 촬영함으로써 고전적인 누드에 변화를 주었다. 키키는 팔을 감추고, 바이올린 악기 그 자체가 됐다.
키키가 아프리카 탈과 함께 있는 '흑과 백(Noire et blanche, 1926)'은 형태, 컬러, 구도, 유럽과 아프리카(식민주종국)를 대조한 작품으로 1926년 프랑스 '보그(Vogue)'지에 실린 후 찬사를 받으며, 유럽의 잡지에 연달아 실리게 됐다.
Man Ray, Glass Tears, 1932
이들의 관계는 1929년 만 레이가 뉴욕에서 온 사진 견습생 리 밀러(Lee Miller)와 바람을 피우면서 종지부를 찍게 된다. 만 레이와 리 밀러는 사진기법 솔라리제이션(solorization)을 발견했다.
'몽파르나스의 키키'는 배우의 꿈을 안고 할리우드로 갔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파리로 돌아온 키키는 대신 화가로 데뷔했다. 그동안 몽파르나스 화가들과 어울리며 틈틈히 그렸던 그림을 공개했다. 1927년 마티스, 피카소의 그림을 팔던 갤러리스트 앙리 피에르 로셰가 열어준 1927년 파리 개인전에서 마티스풍에 꿈결같은 풍경화들을 선보였고, 그림은 모두 다 팔렸다.
1930년대 초 키키는 클럽 사장으로 변신했다. 몽파르나스의 캬바레 오아시스(L'Oasis)'를 인수해 '셰 키키(Chez Kiki)'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했다. '몽파르나스의 키키'는 20세기 최초의 진정한 독립 여성이었다.
Kiki de Montparnasse, Le marché aux soieries à Paris , 1932
1953년 4월 29일, 몽파르나스의 주택 앞에 한 여인이 쓰러졌다. 술과 약물 중독으로 싸늘하게 시체가 된 키키, 그녀 나이 53세였다. 라이프(LIFE) 잡지는 그녀의 사망기사를 3페이지에 걸쳐 대서특필했다.
한편, 키키를 즐겨 그렸던 폴란드 출신 화가 모이즈 키슬링(Moïse Kisling, 1891-1953)은 프로방스에서 미스테리하게도 같은 날 생을 마감했다.
Moïse Kisling, Kiki de Montparnasse, 1925/ Moïse Kisling, Self-Portrait
만 레이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LA로 이주했다. 무용가 마사 그레이함의 제자 줄리엣 브라우너를 만나 1946년 화가 막스 언스트, 도로시아 태닝 커플과 이중 결혼식을 올렸다. 1951년엔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1963년엔 자서전 '자화상(Self-Portrait)'를 출간했으며, 1976년 폐감염증으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