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피카소와 일곱 뮤즈들 (중) 마리-테레즈와 도라 마르
Artist & Muse <16> Picasso and Seven Muses <중>
금발소녀 마리-테레즈/사진작가 도라 마르
Pablo Picasso, Self-Portrait/Le Marin, 28 October 1943/ Marie-Thérèse Walter, 1937/ Dora Maar, 1936
-피카소와 일곱 뮤즈들 <상> 페르낭드, 에바와 올가
-피카소와 일곱 뮤즈들 <중> 마리-테레즈와 도라
-피카소와 일곱 뮤즈들 <하> 프랑소아즈와 자클린과 실베트
"나는 사람들이 자서전을 쓰듯이 그림을 그린다.
그림들은 완성되었거나, 미완성이거나 내 일기의 페이지들이다."
-파블로 피카소-
파블로 피카소와 일곱 뮤즈들 <중>
#4 초현실주의 시대: 마리-테레즈 월터(1927-1940)
Marie-Thérèse Walter, 1929/ 1936
"넌 참 흥미로운 얼굴을 가졌어. 너를 그리고 싶어. 나는 피카소야."
1927년 1월, 45세의 유부남 피카소와 17세의 소녀 마리-테레즈 월터(Marie-Thérèse Walter, 1909-1977)는 파리의 백화점 갤러리 라파예트에서 만났다. 수영으로 다진 몸매에 뚜렷한 윤곽, 코발트블루의 눈빛과 금발의 마리-테레즈는 피카소가 끊임없이 왜곡하는 초현실주의 시대의 뮤즈가 된다.
마리-테레즈는 피카소와 올가의 집 길 건너편에 아트딜러 폴 로젠버그가 마련해준 아파트에서 살며 은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피카소는 1930년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의 부아겔루프의 성채를 구입해 조각 작업실로 사용하면서 새 뮤즈 마리-테레즈를 불러들었다. 노르망디는 피카소가 부인 몰래 마리-테레즈와 바람을 피울 수 있는 지상의 낙원이었다. 마리-테레즈는 피카소에게 수영을 가르쳐주었다.
Pablo Picasso, Le Rêve, 1932/ Rest, 1932
마리-테레즈와의 연애시절 피카소의 그림은 밝고 화사했다. 마리가 금발로 등장하는 '꿈'(Le Rêve, 1932)은 1997년 소더비에서 4천840만 달러에 팔리며 경매 사상 네번째 비싼 회화를 기록했다. 이 그림은 2013년 프라이빗 세일에서 헤지펀드 매니저 스티브 A. 코헨이 1억5천500만 달러에 구입했다.
Pablo Picasso, Nude, Green Leaves and Bust, 1932/ Picasso by Cecil Beaton, 1933
2010년 마리-테레즈를 모델로 그린 '누드, 녹색잎, 흉상, 1932)'가 크리스티에서 1억650만 달러에 팔렸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은 피카소의 창작열이 가장 왕성했던 1932년의 작품 100여점을 모은 'Picasso 1932–Love, Fame, Tragedy'를 열었다.
1935년 마리-테레즈가 임신하자 올가의 친구가 일러 바쳤다. 8년 동안의 불륜을 그제서야 깨달은 올가는 일단 아들 파올로를 데리고 남부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리고, 이혼소송에 들어갔다. 하지만, 피카소는 이혼해주지 않았다. 프랑스의 이혼법은 재산의 절반을 부인에게 주어야했기 때문이다. 올가는 이후 20년간 피카소와 별거하며 법적 부인으로 남았다. 그리고, 1955년 칸에서 눈을 감았다.
Pablo Picasso, Woman and Child, 1938/ Maya with a Doll, 1938
한편, 마리-테레즈는 1935년 9월 딸 마야(Maya Widmaier-Picasso)를 출산했다. 1895년 피카소가 13살 때 여동생 콘치타가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금발의 콘치타는 겨우 7살이었다. 아마도 마리-테레즈는 여동생을 연상시켰는지도 모른다. 피카소는 마야에게 여동생 이름을 따서 'Maria de la Concepcion'라고 지어주었고, 마야(Maya)라고 불렀다. 마리-테레즈와 마야는 피카소와 남부 프랑스에서 살다가 베르사이유 인근에 정착했다. 피카소는 주말에 방문해 모녀를 모델로 그리기도 했다.
피카소의 바람끼는 마리-테레즈가 임신했을 때 다시 발동했다. 1935년 마리-테레즈가 예고없이 피카소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초현실주의 사진가 도라 마르(Dora Maar)가 있었다. 두 여인은 피카소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고, 피카소는 둘이 싸워서 결정하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두 여인은 몸싸움까지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Pablo Picasso, Girl before a Mirror, 1932. MoMA Collection
1940년 마리-테레즈는 피카소와 결별하고, 마야와 파리로 이주했다. 피카소는 양육비와 재정지원을 해주었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올가와 법적으로 부부 관계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1977년 10월, 피카소가 사망한 지 4년 후 마리 테레즈는 남프랑스의 주앙레빵에서 자살했다.
마리-테레즈의 딸 마야는 아버지 피카소 작품 연구와 보존에 헌신했다. 마야의 아들 올리비에 위드마이어 피카소는 할아버지 전기 'Picasso: The Real Family Story'를 출간했고, 손녀 다이애나 위드마이어 피카소는 큐레이터로 피카소의 조각 카탈로그를 집필했다. 2011년 뉴욕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Picasso and Marie-Thérèse: L’Amour Fou', 2017년 파리 가고시안 갤러리에선 'Picasso and Maya: Father and Daughter' 전시가 열렸다. 두 전시의 큐레이터는 손녀 다이애나 위드마이어 피카소였다.
#5 '게르니카(Guernica)'의 탄생: 도라 마르(1935-1944)
Man Ray, Portrait of Dora Maar with little hands, 1936/ Dora Maar, Constellation, 1936, ink and collage
1935년 마리-테레즈 월터와 사이에 딸이 갓 태어났을 즈음 피카소는 사진작가이자 시인 도라 마르(Dora Maar, 1907-1997)와 열애를 시작하게 된다.
도라 마르의 본명은 앙리에트 테오도라 마코비치(Henriette Theodora Markovitch). 파리에서 크로아티아 출신 건축가 아버지와 프랑스인 엄마의 외동딸로 태어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완벽한 스페인어를 구사했다.
19살 무렵엔 파리로 돌아와 이름을 도라 마르로 바꾼 후 사진학교,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 그리고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수학했다. 1929년 경제 대공황 이후 바르셀로나, 런던 등지에서 빈곤을 담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었다. 그후엔 광고, 패션 사진계에서 일하며 초현실주의의 영향으로 거울과 그림자를 종종 작품에 이용했다. 도라의 초현실주의풍 포토몽타쥬 작업에는 앙드레 브레통과 만 레이도 찬사를 보냈다.
Dora Maar, Sans titre, 1935/ Dora Maar, Untitled(Hand-Shell), 1934
1935년 말 도라 마르는 장 르노아르(*화가 오귀스트 르노아르의 아들) 감독의 영화 '랑쥬씨의 범죄'의 홍보용 사진을 찍던 중 피카소를 처음 보고 매료됐지만 정식으로 만나지는 않았다. 며칠 후 시인 폴 엘루아르(*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부인 갈라 달리의 첫 남편)의 소개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모여들던 카페 데 뒤 마고(Cafe des Deux Magots)에서 피카소를 만났다.
첫 만남에서 도라는 칼을 잡더니 재빠르게 손가락 사이사이 나무 테이블에 찍는 묘기를 보였다. 그러다가 손가락을 베이기도 했지만, 피카소는 도라의 기이한 행동에게 반해버린다. 그리고, 도라가 꼈던 장미수가 놓여진 피묻은 검은 장갑을 보관하게 된다.
Eileen Agar, Dora Maar and Pablo Picasso on the beach, 1937
훤칠한 키, 미모에 사진작가, 시인 겸 화가로 재색을 겸비한 도라는 또한 피카소와 스페인어로 소통할 수 있었다. 도라는 그후 7년간 피카소의 뮤즈가 되어 반전 걸작 '게르니카(Guernica, 1937)'의 작업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전의 절정기에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대는 제 2공화국 정부에 맞서 싸우는 민족주의자들을 지원하는 명목으로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를 폭격했다. 피카소는 정부로부터 그해 8월 파리 세계박람회의 스페인관에 전시할 작품을 위임받았다.
Pablo Picasso, Guernica, 1937, Museo Reina Sofia, Madrid
피카소는 신문기사에서 착안해 1개월 반만에 50여점의 드로잉과 스케치를 그린 후 수정을 거쳐서 3.5미터 x 7.8미터((137.4 in × 305.5 in) 크기 캔버스를 완성했다. 사람들과 동물들이 폭력과 혼돈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묘사한 흑백 그림으로 강력한 반전의 메시지를 담았다. 도라 마르는 그해 5월 11일부터 6월 4일까지 피카소의 스튜디오에서 작업 과정을 찍었다. 도라와 피카소는 함께 실험 사진과 판화 테크닉 작업도 했다.
Dora Maar, Photograph of 'Guernica', 1937
"내게 그녀(도라 마르)는 우는 여인이다. 나는 몇년 동안 그녀를 가학도, 쾌락도 아니라 고문당하는 형태로 그렸다. 내게 강요된 비전에 순응할 뿐이다. 그것은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깊은 현실이었다... 도라는 내게 항상 우는 여자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여자들이란 고통하는 기계들이라는 점이다."
-파블로 피카소-
피카소는 잔인했다. 도라 마르를 때렸으며, 때로는 마리-테레즈 월터와 자신의 사랑을 두고 싸우게 만들었다. 마리-테레즈가 화사한 캔버스였다면, 도라가 담긴 그림은 암울했다. 도라의 초상은 '우는 여인(Weeping Woman, 1937)'처럼 고통스럽다. '게르니카'의 인물도 도라의 캐릭터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Pablo Picasso with Weeping Woman, 1937. Tate Modern Collection
도라는 1943년 피카소와의 불륜관계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듬해 도라는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걸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에 의해 당시엔 금지됐던 전기충격 치료를 받았다. 이후 피카소가 프로방스 지방의 메네르베에 사준 집에 은둔하며 추상화 작업을 했다. 그리고, 말년엔 파리로 이주, 1997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도라 마르의 작품이 발견되면서 뮌헨, 마르세이유, 바르셀로나, 퐁퓌두센터, 테이트 모던 등지에서 대규모 전시회가 열렸다. <계속>
*아티스트와 뮤즈 <4> 모딜리아니와 잔느, 안나, 베아트리스
*아티스트와 뮤즈 <5> 앙리 툴루즈 로트렉과 수잔느, 카르망, 제인
*아티스트와 뮤즈 <10> 폴 세잔과 부인 오르탕스 피케
*아티스트와 뮤즈 <11> 마크 샤갈의 등대, 뮤즈, 부인 벨라 로젠필드
*아티스트와 뮤즈 <12> 에곤 쉴레와 '비엔나의 모나리자' 발리(Wally)
*아티스트와 뮤즈 <13> 바실리 칸딘스키와 가브리엘 뮌터
아주 오래전에 단체로 스페인을 여행했습니다. 제일 먼저 가이드가 마드리드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게르니카"가 전시돼있는 뮤지움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이 그림이 거의 초입에 있었던 걸로 압니다. 한벽을 차지하는 큰 그림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압도를 당했습니다. 빈틈없이 그려진 화폭에 동물과 사람이 전쟁의 상흔 속에서 헤매는 표정이 언어로 어찌 나타내겠습니까? 피카소니까 화폭으로 그것을 다 쏟아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르니카"가 너무 강렬해서 다른 그림은 기억이 희미합니다. 그런데, 그 시절 그의 뮤즈가 도라 마르였군요. 우는 여자라니 한이 뼈 속까지 맺혔나봅니다. 컬빗이 "게르니카"를 올려주셔서 많이 공부했고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