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와 뮤즈 (19) 프란시스코 고야와 '벌거벗은 마야(La Maja Desnuda)'
Artist & Muse <19> Goya & Maja
프란시스코 고야와 '미스테리 뮤즈' 마야(Maja)
마드리드 프라도뮤지엄에 전시된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와 '옷입은 마야'.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는 중년에 궁정화가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고야는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리며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알 수없는 불치병으로 인해 청각장애자가 되었다. 그는 말년에 마드리드 인근의 '귀머거리 집(La Quinta del Sordo)'에 은둔하며 벽에 전쟁과 인간의 광기를 묘사한 'Black Painting'을 그리게 된다. 살바도르 달리는 이 시기 고야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고야의 위대한 걸작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El tres de mayo de 1808 en Madrid, 1814)'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침공해 마드리드 양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을 묘사한 그림이다. 훗날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Guernica, 1937)'와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묘사한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1951)'도 이 회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Francisco de Goya, The Third of May 1808, 1814, Museo del Prado, Madrid
Pablo Picasso, Massacre in Korea, 1951
고야는 뿐만 아니라 에로스의 화신 '마야(Maja, 스페인어로 마하)' 연작으로 스캔달을 일으키기도 했다. '옷벗은 마야(La Maja Desnuda, 1790–1800)'와 '옷 입은 마야(La Maja Vestida, 1800–1805)'는 서양미술사 최초로 신화나 종교의 알레고리를 배제한 전신 여성 누드화였다. 즉, 누드 모델이 현실 속의 여성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마야는 미술사에서 예술과 외설의 논쟁을 일으킨 첫 케이스가 된다. 커다란 베개를 베고 누운 당돌한 표정의 누드 여인은 관람객을 당혹시켰다. 여인의 시선은 부끄럽지 않고, 당당했다. 고야의 '마야'는 이후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의 '올랭피아(Olympia, 1863)'에 영향을 주었다.
'마야(Maja, 마하)'는 스페인어로 풍만하고 요염한 여자를 가르킨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고야와 은밀한 관계였던 알바공작 부인이었을까? 재상 마누엘 고도이의 애인 페피타 투도였을까? 아직도 미스테리에 싸여있는 마야의 정체는 당시 스페인 궁전과 귀족의 '위험한 관계' 속에서 추정하는 수 밖에 없다.
#고야의 뮤즈: 알바공작 부인 The Duchess of Alba
Francisco de Goya, Duchess of Alba(The White Duchess), 1795, Liria Palace/ Duchess of Alba(The Black Duchess), 1797, Hispanic Society of America
프란시스코 고야를 사로잡았던 그녀의 이름은 도나 마리아 드 필라 테레사 카예타나 드 실바 알바레즈 드 톨레도(Doña María de Pilar Teresa Cayetana de Silva Álvarez de Toledo,1761-1802), 알바 13세 공작부인이었다. 알바공작 부부는 당시 스페인 왕궁에서 가장 부유한 커플이었다. 그들의 유일한 라이벌은 오수나 공작(Suke of Osuna) 부부 뿐이었다. 고야는 알바공작 부인이 10대일 때 처음 궁정에서 만나 친밀해졌다. 1793년 알바공작이 39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공장 부인은 과부가 됐다. 그녀 나이 34세였다.
남편이 사망한 후 아름답고, 젊고, 부유한 알바공작 부인은 고야를 지중해의 산루카 드 바라메다 별장으로 초대했다. 당시 고야는 50세에 청각을 상실한 유부남 화가였었다. 고야는 수개월간 알바공작 부인 곁에 머무르며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고야는 1795년 알바공작 부인이 흰 드레스 차림에 강아지와 함께 포즈를 취한 전신 초상화를 그렸다. 1797년 이와 한쌍이 되는 또 한점의 초상화에서 알바공작 부인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다. 지금 보수공사 중인 맨해튼의 히스패닉소사이어티(The Hispanic Society)가 소장한 대작이다. 알바공작 부인은 이 그림에서 두개의 반지를 끼고 있는데, 그 반지에는 각각 Alba와 Goya가 새겨져 있다. 또한, 공작부인은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바닥의 고야 서명을 가르키고 있다. 그 서명은 "Solo Goya(오로지 고야뿐)"이다. 알바공작 부인과 고야의 은밀한 관계를 드러낸다.
Francisco de Goya, The Duchess and la Beata, 1795
알바공작 부인은 야성미에 괴짜 기벽이 있는 여인으로 고야 이외에도 투우사, 평민, 그리고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애인이었던 스페인 총리 마누엘 고도이와도 연애를 했다. 그녀의 패션 센스는 탁월해서 왕비를 질투심에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알바공작 부인은 왕비가 공식 행사에서 입을 옷을 알아내서 자신의 하녀에게 입히며 왕비를 조롱하는 스캔달을 일으켰다.
1802년 마흔살의 나이에 알바공작 부인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공식적으로는 사인이 결핵이었다고 발표됐지만, 왕비의 독살설도 풍겨나왔다.
Francisco de Goya, The Nude Maja/ La Maja Desnuda, c.1795–1800, Museo del Prado
Francisco de Goya, The Clothed Maja/ La Maja Vestida, c. 1800-1807, Museo del Prado
고야가 1797년과 1800년 사이에 그린 '벌거벗은 마야'의 모델은 알바공작 부인이라고 믿어졌다. 하지만, 근래 전기 '고야(Goya, 2003)'을 집필한 미술 비평가 로버트 휴즈(Robert Hughes) 등은 마야가 당시 스페인 총리였던 마누엘 고도이의 애인 페티타 투도(Pepita Tudó/ Josefa de Tudó y Catalán, 1779-1869)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총리의 애인: 페티타 투도 Pepita Tudó
José de Madrazo, Pepita Tudó(doña Josefa Tudó), 1779/ Spanish Stamp, 1930
1799년 고야는 스페인 최고의 궁정화가(Primer Pintor de Cámara)로 임명됐다. '마야'는 당시 스페인 총리였던 마누엘 고도이(Manuel de Godoy, 알쿠디아 공작, 1767-1851) 위임을 받아 그린 작품이다. 미남 고도이는 사실 왕비 마리아 루이사(Maria Luisa, 1751- 1819)의 애인이었다. 하지만, 왕비와 바람을 피우면서도 고도이는 집에 애인 페티파 투도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사실 고도이는 알바공작 부인과도 연인관계였다.
마누엘 고도이는 바다호스의 가난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노래와 기타 솜씨가 빼어난 미남으로 17살에 마드리드로 이주 왕궁의 근위병이 됐다. 고도이는 카를로스 4세 국왕과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총애를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고도이는 왕비의 애인이 됐고, 외교부 장관으로 승진했다. 당시 총리였던 플로리다블랑카는 고도이가 왕비의 애인이라는 것을 폭로한 후 해고됐고, 그 자리를 고도이가 차지하게 된다. 고도이는 총리로 프랑스와 바젤 평화협상을 체결하며 '평화의 왕자'라는 영예까지 얻었다.
이탈리아 파르마 출신 귀족 마리아 루이사는 14살 때 사촌 카를로스(영어로 찰스) 4세와 결혼했다. 카를로스 4세는 별명이 '사냥꾼(El Cazador)'이었다. 그는 사냥에 미쳐 늘 궁을 비웠기 때문에 왕비는 끊임없이 궁안의 남자들과 바람을 피웠고, 24번 임신해서 14명의 자식을 낳았다. 마누엘 고도이는 수많은 애인 중 한명이었고, 몇명은 그의 자식으로 추정된다. 카를로스 4세는 정치에 관심도 없고, 능력도 없었다. 때문에 마리아 루이사와 애인 고도이가 섭정하는 것을 용인했다.
고도이의 애인 페티파 투도는 스페인 남서부의 항구도시 카디스(Cádiz)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총잡이로 페티파가 어릴 적 사망했다. 페티파는 16살 때 엄마, 자매들과 함께 마누엘 고도이의 저택 안에서 살면서 고도이의 정부가 됐다.
#위험한 연인들: 마리아 루이사 왕비와 마누엘 고도이
Francisco de Goya, Carlos IV, 1789/ Maria Luisa of Parma, 1789/ Francisco Folch de Cardona, Manuel de Godoy, 1788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고도이의 몸과 마음을 빼앗은 페티파 투도를 질투했다. 그래서 왕비는 고도이를 카를로스 4세의 사촌 마리아 테레사와 정략 결혼을 주선했다. 고도이는 결혼을 조건으로 돈까지 챙겼다. 하지만, 페티파는 여전히 고도이 집에서 살았다.
야망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에게 라이벌은 스페인의 부자 쌍두마차인 알바공작 부인과 오수나공작 부인이었다. 특히 왕비보다10살 어린 미모의 알바공작 부인이 고도이와 바람이 나자 질투가 활활 타올랐다. 이에 왕비는 고도이에게 알바공작 부인을 독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왕비는 또한, 1806년 며느리였던 마리아 안토니아가 사망한 배후에도 등장한다.
Francisco de Goya, Charles IV of Spain and His Family, 1800-01
고도이는 당대의 플레이보이로 왕비의 후원 아래 국왕처럼 행세했다. 1802년엔 영국과 아미엥 조약을 맺었다.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에게 "고도이가 스페인 국왕이며, 왕비의 애인"이라고 폭로하는 편지를 보냈다. 1807년 고도이와 나폴레옹은 퐁텐블뢰 조약을 체결했다.
마리아 루이사의 아들 페르디난드 황태자(페르디난드 7세)는 아버지 카를로스 4세를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기획하고 있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고도이가 스페인을 나폴레옹에게 팔았다며 대중 봉기를 일으켰다. 1808년, 카를로스 4세는 퇴위하고 페르디난드 7세가 왕으로 즉위했다.
Francisco de Goya, The Dog, 1819–1823. Museo del Prado
그해 고도이는 1808년 마리아 테레사와 이혼했고, 카를로스 4세, 마리아 루이사, 애인 페티파와 그 자식들과 함께 프랑스에서 4년간 망명생활을 거친 후 로마로 이주했다. 로마 시절 마리아 루이사와 카를로스 4세는 레오나르도, 티치아노, 브론지노, 틴토레토, 베로네즈, 푸생 등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했다.
1818년 고도이는 폐렴에 걸려 죽어가는 왕비를 지켜봤다. 왕비의 유서에는 고도이가 상속자로 지명되어 있었다. 회고록을 집필하던 고도이는 카를로스 4세의 요청으로 페르디난드 7세가 사망할 때까지 출판을 미루었다. 1828년 전부인 마리아 테레사가 파리에서 사망했다. 1개월 후 고도이는 페티파와 결혼해 파리에서 소박하게 살았다. 고도이는 1836년과 1839년 회고록을 출판햤고, 1851년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말년에 페티파는 가족의 재산을 찾기 위해 스페인으로 귀국했다. 90세가 된 페티파는 고도이가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은 여왕 마리아 루이사였다고 기자에게 밝혔다. 페티파는 1869년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
Francisco de Goya, Self-portrait at an Easel, 1790-1795/ Vicente López Portaña, Portrait of Goya, c.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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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aine-